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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1-14
신학적 관점
마태복음은 대제사장 및 바리새인들과 예수 간의 비판적인 대화가 계속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오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를 소개하는데, 이 비유는 성경 전체의 신학적 가르침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 1~14절은 선택의 은총,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이에 따르는 순종과 믿음과 감사의 의무 등의 상호 관계를 미묘한 연관 속에서 그려주고 있다. 이 상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동적 신비의 핵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면서, 오늘의 비유는 하나님에 관한 서술문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부가되는 명령문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또한 선택의 은총에 적합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심판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너희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명령문은 선행하는 어떤 것의 결과와 관련된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선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에 관한 서술문과의 관련 속에서이다. 이 서술문은 명령문에 선행하며 명령문을 제한한다. 요약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그리고 당연히 교회는 선택과 관련하여 어떤 선택권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 선택은 순종을 요구한다.)
은총에 의한 선택과 삶을 통해 구현되는 순종 간에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이 있는데, 이것은 "무법"(antinomianism)이나 "신법(新法)"(neonomianism)의 단순한 이분법을 거부한다. 아마도 우리는 긴장을 해결하지는 못하면서 긴장의 범위 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언약 관계에 관한 신학이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된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다른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칼뱅도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율법의 목적인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롬 10:4).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영적인 결혼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첫 번째 전달자-아마도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가 백성들을 잔치에 데려오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온 이스라엘이 미래의 성취를 기대하도록 초대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분명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선취적으로(proleptically) 해석했다. 비록 하나님의 집에 속하기 위해 그 초청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은 배제되었지만, 이제 초대는 다시 연장된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집에 속해 있기 때문에 초대받았다. 은총적 선택의 성취는 잔치에로의 초대와 그것을 따를 의무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다.
초대된 사람들-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은 왜 그들의 선택이 완성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표면적 이유는 그들은 바쁜 일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더 심층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선순위와 관점의 근본적 충돌이었다. 자신들의 선택이 완성하는 단계로 들어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격분하면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죽인다. 두 경우 모두 초대를 거부한다. 위에서 제시한 표현을 따른다면, 하나님에 관한 서술문과 순종의 응답 간의 언약 관계가 깨진다.
임금은 분노하여 선택의 완성을 폭력을 통해 거부하는 사람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은총적 선택은 남아 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혼인 잔치는 취소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이방인의 부름으로 해석되는 새로운 선택은 그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이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9,10 절) 다 잔치에 초대된다.
은총적 선택과 순종의 의무라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서 우리는 아주 곤란한 문제, 즉 보편적 선택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모두가 선택되었다면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의미인가? 이제 온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지은 요소가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더욱이, 이 선택의 해석학은 같은 비유의 누가복음의 서술방식에 의해 확실한 지지를 받는다. 누가복음은 임금이 종에게 사람들을 강제로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4:23) 비유에서 선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보편적 선택을 보편주의(universalism), 즉 만인 구원론의 단초로 이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혼인 잔칫집은 가득 찼다. 모두가 안에 있다. 다시 은총적 선택과 순종의 의무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임금이 손님들을 살펴보니 혼인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왜 적절한 복장을 갖추지 못했는가? 왜 그에 대한 처벌은 그토록 가혹한가?
칼뱅은 본문에 관한 주석에서 바울 서신의 두 구절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로마서 13장 14절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한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을 근거로 우리는 바깥 어두운 데로 던져진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런 심판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옛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 바울의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관 대신 하늘의 아버지가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비유는 우리를 선택의 은총(모두가 초대됨)과 순종의 의무(그리스도로 옷 입기,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사이의 미묘한 관계로 이끌어 간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다. 사랑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부여된다. 그것은 임금에게,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롱하는 셈이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우리로 옷을 입고 자만 속에서 독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혼인잔치의 비유는 예수가 성전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세 비유 중 마지막 비유이다. 누가복음의 이 비유는(눅14:15-21) 예수를 저녁에 초대한 바리새인집에서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이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눅14:21). 그런데 마태의 버전은 이전 비유에서도 볼 수 있는 심판에 대한 주제가 강조된다. 왕은 혼인잔치를 열고 많은 손님들을 초청한다. 그들은 첫 번째 초청에는 응하지 않았고, 두 번째 초청에 대해서는 왕의 종들을 붙잡아 죽이기도 하는 등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 왕은 동일하게 대응했는데,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7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초청은 거리에 나가서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주어졌는데 그래서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차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와 같다고 말했다. 초대받은 사람은 없고,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전반부 장에서 마태는 예수가 이방인의 믿음을 보고 이와 같은 예언을 했다고 기술했다. “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8:11-12). 이 일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그대로 일어난 일이다(22:13).
하나님의 메시야 통치를 꼭 혼인잔치가 아니더라도 큰 잔치에 비유하는 것은 유대문학에서 익숙한 일이다(시107:1-9;사25:6-8). 옛날 왕들이 자기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 듯이, 왕으로 묘사된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출24:9-11)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잔치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인데, 그 아들은 전 비유에서처럼 예수로 보이는데, 마9:15과 25:1에서는 신랑으로 묘사된다. 그러기에 혼인잔치의 인물들은 분명하다. 왕은 하나님이고, 예수는 그의 아들이며, 초청받은 사람들은 전 비유에서의 불의한 소작인들과 같다. 그 동네가 불살라진 것은 로마군대가 주후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을 말하고, 종들이 이후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잔치에 데려오는 것은 선교사들이 누구든지 교회에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비유는 핵심은 이전 두 비유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고, 세리와 창녀 같은 버림받은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맺으며(21:43),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그들이 내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2000년 역사의 반유대주의가 보여주듯이 기독교인들이 이 비유를 잘난 체하며 자신들이 구원받은 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유대인들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으로 위험하게 해석해 왔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마지막 손님은 누구인가? 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고 준비할 시간도 없이 온 사람이 꼭 필요한 예복이란 무엇인가? 본래 초대받은 사람에게 한 폭력을 왕이 그들에게도 한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여기에서 단지 복장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혼인 예복에 대한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계19:8)를 말하거나, “해와 같이 빛나는”(마13:43) 부활한 몸이거나, 아마도 세례 뒤에 입는 옷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의 심판에 대한 해석은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는 비유의 마지막 경구와 긴장을 가지며 생각해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이란 동사는 비유의 초기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오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이 혼인잔치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뽑힌 사람은 적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비유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히 뽑혀 잔치에 참여했는데 쫓겨났기 때문이다. 뽑혔다는 것은 하나님이 뽑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신적인 수동태(divine passive)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의 역설이 주어진다. 이 역설은 기독교인들의 심판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방지한다. 한편으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초대와 소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통해 전체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인물은 비유의 주인공인 왕이다. 비록 다른 인물들에게도 여지는 있지만, 왕의 결정이 최종적이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지만 마지막 추수 때 하나님이 고르실 때 까지 같이 자란다(마13:24-30,36-43)고 했다.
비유의 이 부록은(11-14절) 마태에서만 나타나는데, 마태복음의 전형적인 것으로 교회의 심판에 대한 이미지를 확장한다. 유대교 안에서도 심판이 분열을 만들듯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성된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주어진 심판은 마8:11-12의 유대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심판과 같아서, 마태의 비유를 들으며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비유가 해당되게 한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많은 사람인가, 뽑힌 적은 사람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나 이웃들의 처지를 결정하실 것이다.
목회적 관점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심판이 준비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예수의 두 비유 가운데 두 번째 이야기이다. 지난주에 읽었던 첫 번째 비유(21:33-44)는 집주인이 없는 포도원의 기회주의적인 소작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이야기를 수단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초대한 예언 전통의 전달자들을 거절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반항적인 소작인들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과거의 패턴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주장한다면, 예수는 이제 미래를 직시하라고 지시한다. 두 번째 이야기를 말하면서, 마태는 좀 더 과장된 일련의 상황들과 함께 우화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선택된 사람들이 왕실 결혼식에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무시하는 바람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들을 대신한 손님들이 잔치에 초대받자마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아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 하지만 그는 잔치에 초대받으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경고의 긴박성은 내러티브의 명백한 논리보다 우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이 우화에는 긴급한 위로가 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을 위하여 엄격하고 불편한 본문을 찾을 때, 때로는 심판의 말씀이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맥(21:23-27)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논쟁하려고 하는 성전 권력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려고 한다. 마태는 자신의 의도 역시 이야기에 담아냈다. 이 비유의 좀 더 단순하고 아마도 초기 버전인 누가 복음(14:15ff.)과 도마복음(말씀 64)에서는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함께 보여주는데(7절).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마태 공동체에 큰 충격을 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선포하려고 한다. 비유를 우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마태는 시간의 범위를 동시대의 상황에서 역사의 종말까지로 확장시킨다: 약탈된 도시의 불타는 폐허 한복판에서 종말론적인 연회가 펼쳐진다.
마태의 이야기 속에서 비유는 한편으로는 명백한 불안감과 자아 성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암묵적인 확신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이 이야기는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모두가 실제로 잔치에 가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또한 잔치의 주인이 더 멀리 나가서, 가능성이 희박한 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얻기 위해 충분한 자격은 오직 변화된 삶이라고 역설한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교회의 혼란이 교회가 지금은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가라지에서 밀을 골라내는 과정 (13:24 이하)이 지금 진행 중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이 서 있는 세계를 다시 발견하려는 움직임에 따라 우화는 불길하게도 고난과 격변을 약속한다. 마태에게는 그 자신이 덧붙였든 아니면 Q 자료의 세부 사항을 보존했든, 누가와는 달리 폭력이 분명히 이야기의 필수 구성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파괴된 도시, 거룩한 곳에 대한 신성모독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 같은 두려운 이미지들-마태 공동체의 망막에 각인된 이미지들-이 결혼 잔치의 이미지로 대체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다니엘 해링턴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나눈 식사들과, 특별히 그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어떠할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 마태 자신이 예수와 함께 그 식탁에 앉아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다락방으로 가는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뒤따르는 고난의 시기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그 식사가 주는 확신과 지울 수 없는 은혜 가운데 만찬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폭력의 위협과 교회의 불안정이 계속 소용돌이칠 찌라도, 그 식탁에서 느꼈던 것을 기억하라고 마태가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다시 잔치를 할 것이다.
한편 마태 공동체가 위안을 얻는 길은 심판을 우회하지 않고 관통한다. 악한 세입자의 비유(21:33-44)와 결혼식 연회(22:2-14)의 비유에서, 세입자의 잘못과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하객의 실수라는 문제의 핵심은 열매를 맺는 것에 관한 것이다. 첫 비유에서 하나님은 포도원의 청지기 직분을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21:41) 맡김으로 상황을 바로잡는다. 오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은 은혜의 연회의 손님으로 삶의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몰락은 주인이 그에게 그가 살아온 길에 대해 설명하라고 요구할 때, 그가 할 말이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복음으로 사는 것은 오직 초대로만 시작된다. 그것은 단지 생각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변화된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지만 선택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권면한, 골로새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골로새서 3:12-3). 포도원에 있는 반항적인 세입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골 3:14).2) 예수는 열매 맺는 것이 참으로 결혼 예복이나 침례복을 입는 것과도 같다고 암시한다. 복음을 선택해서 생기는 외적인 영향이 마침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골 3:16).
설교적 관점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에 관하여 1세기 팔레스타인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 비유를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비유에 따르면, 한 잔치를 주관하는 어떤 왕이 종들을 보내 참석하기를 바랬던 모두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하지만 참석하겠다고 말했던 잔치에 오는 대신 그들은 핑계를 대고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집이나 밭으로 가거나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고대 약속체계의 중대한 위반이었다. 왕의 초대장을 받았던 사람들은 잔치가 시작될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의 구상 속에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초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선택했는데 그들은 떠도는 유목민들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고 430년간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모세)을 마쳤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과 말씀을 그 무엇보다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축복하고 높이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예로 그들을 사용하였다.
-이 비유가 계속 보여주듯이, 그리스도가 등장했을 때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 중요한 일이 일어났을 때 참석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는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의미) 외침 가운데 승리한 왕처럼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단지 5일 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 재판정에 예수가 섰을 때, 같은 도시에 있던 그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 27:22)라고 외쳤다. 때가 이르러 메시아가 이 옛 도시에 들어왔을 때 결국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독교 공동체 내에도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 같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안전하고 온건한 제자의 길을 원하고, 보다 어려운 봉사활동이나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으로부터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지만, 사역을 함께 해야 할 때는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짜로 저녁을 먹을 때는 언제나 볼 수 있지만, 무료급식소에서 배식을 하는 것은 꺼린다. 그들은 세상의 평화를 바라지만, 그 목표를 향해 일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기아가 종식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위해 한 끼를 굶는다거나 기부를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첫번 째 초대받은 손님들이 왕의 초대를 거절했을 때, 그는 스포츠 팀에서 대다수 감독들이 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선수교체를 했다. 감독이 경기에서 어느 순간 선수들이 체력이 떨어지고 이기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감독은 상대 팀에 경기를 내어주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감독은 경기 중에 있는 선수들을 벤치에 앉히고 대신 다른 누군가를 경기에 내보낸다. 하나님께는 섬김이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답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을 벤치로 불러들일 권한이 있다. 오늘날 미국과 서유럽교회가 그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점진적인 감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의 점진적 성장과 관련해서 보아야만 한다. 만일 포스트모던 시대의 서구인들이 하나님의 초대를 꺼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초대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몇몇 사람들의 열정과 꿈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 22:10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의 공로 (merit)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 (mercy)로 인해서이다. 마태복음 11:28에서 예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대부분의 기관들은 회원이 되는 데 어떤 제한과 조건이 있다. 예일대학은(Yale University) 2013년 2만 6천명으로부터 입학지원서를 받았다. 그 가운데 단지 7.5% 만이 실제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예일대학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라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공립대학은 입학지원서를 낸 사람 중 60% 미만의 사람들이 입학허가를 받는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어느 누구나(그들이 선하든 혹은 악하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기관이나 기구는 없다. 그러나 예수가 있는 곳에 첫 번째 규정이 있다: 주님께 오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좋은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롬 5:8, 저자의 사역).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롬 6:23). 이것이 세상을 매료시키는 메시지이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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