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가마에 들다
글/김덕길
가을이다.
코끝을 스치는 실바람의 뒤태가 서늘하다. 지난밤 tv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았다. 조폭 영화다. 남자 한 명이 30명과 싸워서 이긴다. 가능한가? 영화에선 가능하다. 꿈에서 조폭을 흉내 낸다. 내 발길질에 아내가 기겁을 하며 일어난다. 잠을 설친다. 눈뜨니 아침 8시다. 아내가 가방을 싼다.
‘내가 꿈꾸다가 아내를 때렸나?’
무섭다. 슬그머니 아내에게 묻는다.
“어디 가게?”
“저번에 말 했잖아. 장흥에 참숯 가마가 있는데 가서 고기도 구워먹고 찜질도 하고 오자고.”
휴……. 다행이다. 아무래도 아내의 말을 거역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아내가 지난번 나와 운동했다. 라테스민턴이다. 라켓볼, 테니스, 스쿼시, 배드민턴이 통합된 운동이다. 공에 고무줄이 달렸다. 공을 치면 다시 돌아오는 운동이다. 너무 재미있어 아내가 무리했다. 아내의 팔에 인대가 늘어났다. 아내가 말한다.
“나 팔이 아픈데 자기가 된장 감잣국 좀 끓여주면 안될까?”
“응, 당연히 해 줘야지. 가만히 있어. 내가 차려줄게.”
점수를 딸 기회다.
아프리카 오지 여행 중 일행 남자 세 명을 감잣국 하나로 먹여 살린 저력을 보여줄 기회다. 쌀뜨물을 받는다. 멸치를 넣는다. 물을 끓인다. 된장 두 스푼을 물에 으깨어 넣는다. 감자 두 개를 달 모양으로 얇게 잘라 넣는다. 액젓 한 스푼, 대파, 양파 반개를 넣는다. 매콤함을 위해 청양고추도 넣는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는 라면 스프로 간을 했지만, 오늘은 넣지 않는다. 소량의 미원으로 간을 맞춘다. 목젖을 건드리며 몸속으로 스미는 된장 감자국의 구수함은 내 고향 정읍 시골 감자밭을 통째로 가져다 놓은 기분이다.
아르바이트 야근을 하고 온 대학생 아들이 묻는다.
“엄마! 이게 무슨 냄새죠?”
“응, 네 아빠가 감잣국을 끓이셨어.”
“아빠가요? 참, 엄마도……. 내가 국을 먼저 먹어보고 나면, 엄마가 저보고 맛이 어떠니? 하고 물으면 그때 내가 참! 맛있어요. 라고 했을 때, 이 국은 아빠 작품이란다. 하고 말했어야지요. 하하.”
나는 깜짝 놀란다. ‘아들이 말의 앞뒤를 분간해서 글의 짜임새를 가지고 놀 줄 아는구나.’
텔레비전에서 복싱 미들급 세계 타이틀전을 한다. 무패 복서 골로프킨과 카넬로 알바레스의 경기인데 골로프킨의 아버지가 고려인이다. 당연히 나는 그를 응원한다. 그런데 졌다. 판정패다. 아쉽다.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다. 영원한 대통령도 없다. 영원한 생명도 없다. 나도 그렇다. 그렇다는 것이 공감대를 형성해서 나에게 안식을 준다.
차는 어느새 외곽 순환고속도를 타고 사패산 터널을 지난다.
사패산 터널은 광폭이 무려 17.6m나 되며, 세계에서 가장 긴 광폭 터널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터널가운데 버팀목이 없다. 그 넓은 공간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음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다. ‘터널 주변 소음, 먼지, 배기가스, 지하 수맥 단절’ 등 여러 가지로 환경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산을 허물고 도로를 놓는 방법보다는 낫다.
지율스님과 환경단체가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으로 외곽순환도로가 모두 이어졌다.
지나는 길에 민속박물관이 있어 들린다. 비가 추적추적 박물관의 옛 추억을 적신다.
발을 굴러 타작을 하던 호롱기, 솔방울을 부엌에 들이밀고 바람을 부치던 풀무,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 비사표 육각 성냥갑, 환희와 청자담배, 밤길 비추던 남폿불, 그리고 어머니의 바느질 모습. 갑자기 울컥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바로 저 바느질 하는 조각상 같다.
숯가마에 들어간다. 숯을 빼지 않은 가마 안에서 새빨간 숯불이 이글거린다. 철도 녹일 만큼 높은 온도일 것이다. 우리는 야외 하우스 평상에 앉아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는다. 참나무의 좋은 성분이 숯으로 만들었을 때 45배의 응집력으로 스며든다. 숯은 수질 정화작용, 피부노폐물정화작용, 전자파차단, 냄새 제거 등에 특효라 한다. 김밥에, 고기에, 맥주에, 고구마구이까지 푸짐하다.
하우스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정겹다. 어느 평상 아래서인가 수탉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바람에 묻어 들이치는 이슬비도 좋고 군고구마의 뽀얀 김도 정겹다.
한증막에 들어간다. 고온, 중온, 저온, 방과 꽃방으로 나뉜다. 꽃방은 가장 뜨겁다. 맨살로 있으면 화상을 입는다. 나막신을 신고 온몸을 수건으로 감싸야한다. 몸 안의 땀방울이 일제히 몸 밖을 향해 아우성친다. 내 안에 침잠된 냉가슴을 펄펄 끓여 녹일 것만 같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잊을 것은 잊자. 저렇게 붉게 타올라야만 까만 숯이 되듯, 내 사는 날이여! 활활 타올라라!
비 내리는 한증막 밖 차가운 평상에 누워 낮잠을 잔다.
아!
신선이 따로 없다.
꿈을 꾼다.
눈이 펄펄 내리는 시골 온돌방에서 어머니는 새알 옹심이를 만든다. 팥죽을 쑤려는 게다. 나도 옆에서 새알 옹심이를 만든다. 내가 만든 옹심이는 왕사탕만 했고 어머니의 옹심이는 작은 구슬 같았다. 내가 웃자 어머니는 나보다 더 환하게 웃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