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발견의길 (1839년 이전)
사진술은 그 결정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발명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애당초 과학적인 목적에서 고안되었던 사진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몇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도화법을 통해서 채택되고 또 완성을 보았다.
어두운 방의 덧문에 뚫린 둥그런 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햇빛은 방안의 덧문 맞은편 벽면 위에 거꾸로 뒤집어진 태양 이미지르 그려놓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계예 알려지면서 이장치는 유명한 것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를 널리 알리고 또 그것을 사용하도록 화가들에게 권장하기도 했던 인물은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로 였다.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중욯나 개선책을 내놓았다. 카메라 옵스쿠라, 즉 암사자의 구멍에 렌즈를 끼우면 이미지가 한결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17세기에 와서야 운반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카스파르 쇼트는 1657년 암실을 암상자 형태로 만들었고, 요한 찬이 제작한 상자 형태는 사진의 초창기에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갖추었다.
18세기부터 이 광학기구는 결정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규격을 띄게된다.
당시에 유행했던 과학적인 놀이 기구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찬의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던 1658년 카메라 옵스쿠라는 사진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었던 셈이다.
수학자들이 빛의 물리적 속성을 발견했고 또 예술가들이 그것을 인지했더라도 확학자들이 광선이 어떤물질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주목하지 못했더라면 미래의 발명에 불가결한 기술적 방법을 완성되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13세기에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16세기에는 제오르지우스 파브리쿠스가 은염류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그 특성에 관해서 주목한 바 있다. 17세기엔느 은염류가 검게 변하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지만, 이러한 변질이 공기라든가 태양열 탓이지 빛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제네비어는 또한 송진이 빛에 노출된 장소에서는 테레빈 유로 용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839년 이전까지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데셍예술"이라고 알려진 도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구성할수있었다.
리얼리즘에 대한 열망과 눈속임 기법에 대한 취미는 나중에 가서 다른 여러가지 기법의 성공을 보장하게 되는데 1787년에 로버트 바커가 발명한 파노라마 1811년부터 시작된 프란츠니클라우스 쾨니히의 디아파노라마 그리고 1822년에 다게르가 내놓은 디오라마 등이 그것들이다.
화가들은 평면위에 공간과 입체를 재현하고자 번번이 회화 밖의 낯선 수단에 의존하고자 했다.
일종의 인공적 눈이라고 할수있는 카메라 옵스쿠라가 서투른 화가들에게는 예술적 결함을 메워주는 용도로 널리 쓰이게 되었지만 진정 솜씨있는 예술가들의 손에서는 "마음대로 조정되며 언제나 미적인 목표에 따르게"되었던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조준기를 통해서 소재의 윤곽과 세부를 일광속에서 따라 그릴수 있는 카메라 루시다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울러스턴이 제작했고 뒤이어 파리의 광학자 슈발리에 형제의 손으로 더욱 다듬어졌다.
원래 화가 렘브란트 필이 "프로필로그래프"로 불렀던 이 기법은 엉성하거나 조잡한 물건을 가리킬떄 루이15세 당시 잠시 재무감사를 지냈던 에티엔 드 실루엣의 이름을 빗대어 "실루엣 모양"이라고 하던데에서 새롭게 불리게 된것이다.
초상에 대한 또 다른 열정의 결과는 이보다 조금뒤에 자동 전자식 초상기 "피지오노트라스"를 통해서 드러났다. 인물의 프로필을 그려내는 이 초상기계의 발명자는 질 루이 크레티앙이었다.
빛의 작용을 빌려서 일싲거인 영상을 형상화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상상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사진이 18세기에 출현하지 못했던 까닭은사회가 그것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상태였고 부르주아지의 상승과 과학의 진보가 그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그림의 가치는 전적으로 그 현실성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으면 장차 자신의 통제하에 두게 될 세계에 대한 정확한 목록의 작성이나 완벽한 탐사가 어렵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객관성에 대하 적극적인 추진이 회화를 다른길로 몰아내는 가운데 사진의 성공을 보장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불가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물체와 현상들까지도 신속하고 정확하며 이해하기 쉽도록 가시화하고 측정할 수 있게 만드는 재현방식이 요구되었다.
1824년에 브라질에 정착한 에르퀼르 플로랑스의 경우는 경제적 문홪거 정치적 국면들이 적절히 조정되지 못한 환경에서 성공을 거둘만한 발명이 어떻게 불가능한 것이 되는지를 놀랄만하게 예증하고 있다. 1832년부터 1834년 사이에 이 프랑스 사람은 사실상 니에프스 이후 그리고 그와 유사한 기법을 채택했던 폭스톨번보다 약간앞서서 사진이라는 단어와 또 그 실물을 개발했다. 그러나 리우데자네이루를 제외한 전세계 어느곳에서도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은 1977년까지도 아무도 없었고 사진의 발명은 제작이나 보급 어느점에서도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웨지우드가 좌절을 맛보았던 시돈느 그와 마찬가지의 목표를 추구해나간 뒤이은 연구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은 1834년 1835년 두해동안 최초의 실험들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은염류로 감광성을 띠게 만든 종이 위에서 물건의 자취들이나 "광소묘"를 만들어내었고 이어서 "쥐덫"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암상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레이콕 장운"의 모습을 촬영했다.
촬영시간은 30분가량이었고 인화지는 식염수에서 정착과정을 거쳤다.
첫댓글 슨생님은 안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