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고 긴 여정의 시간 동안 우리 일행은 아직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 했다. 나오기 전 숙소에서 먹었던 컵라면 하나로
남원에서부터 내내 배고픈 여정에 올랐고,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 되니 더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함양에 있을 때
먼저 말을 걸어주신 분께 여기에 맛있는 맛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분의 대답은 '안의를 가라'는 것이었다. 안의의
갈비탕이 그렇게 맛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정말이지 애향심이 대단하신 분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갈비탕이 그렇게
맛있나 싶은 생각도 얼핏 들었다. 날씨도 제법 쌀쌀한 게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기도 했고.
하지만
곧바로 안의를 갈 수는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터미널 방문보다는 88고속도로의 마지막을 경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로는
안의로 나가는 출구가 없다. 함양나들목의 다음 목적지는 곧바로 거창나들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지가 없었다. 거창을 먼저
들렸다가 안의로 가는 것뿐이었다. 결국 거창에 먼저 발자취를 남기고 새로 주유까지 한 후에야 안의라는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이 들른 곳은 갈비탕 집. 배고픈 몸을 이끌고 문을 열자마자 은은한 갈비탕 냄새가 진동하니 참기가 힘들었다.
과연 소문으로만 듣던 갈비탕은 어떤 느낌일까. 들었던 만큼 맛은 깔끔하니 좋았다. 가격이 만 원으로 결코 저렴하진 않았으나
배부르게 배를 채우고 만족할 만한 맛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네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의라는 지명은 정말 생소하다. 전국을 수없이 누빈 나로서도 잘 입에 와닫지 않는 이름이다. 그럴 만도 한 게 내가 사는 지역(수도권)과 가까운 것도 아니며, 딱히 이름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고속도로 톨게이트조차 이곳을 피해 간다. 양옆으로 두 개의 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여기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니 알 턱이 있나. 안의라는 이름은 함양, 거창 사람이 아니라면 주변 지역민들도 '거기가 어디?'라고 되물을 만큼 인지도가 하염없이 낮다. 이제는 면 단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아파트조차 하나도 없는 산간벽지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의 인구는 5천 명 정도로 주변 면 지역과 눈에 띄게 차이가 보인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고 유동 인구도 제법 보이는 곳이다. 그러한 이유는, 이 지역이 옛 조선시대의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까지, 이 지역은 '안의현'이라는
독립된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함양군과 강제로 합쳐지면서 면으로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함양 출신이라는 것에 이의를 가지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었지만, 함양 북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어 고을로서의 역할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안의라는
지역은 소백산맥이 짙게 드리운 산줄기 한가운데 계곡 속에 움푹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곳의 약초가 꽤
유명하다고 한다. 덕유산 등반을 왔다가 약초를 사는 외지인들이 꽤 되는 모양인지 마을 입구에서부터 약초 홍보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외지인들과 함양 북부 지역 주민들을 위한 버스터미널 역시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길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숨은 것일까?
안의터미널은 놀랍게도 1차선 골목길처럼 보이는 제방 뒤에 숨어있다. 외곽으로 다니는 3번 국도에선 볼 수 없다 쳐도, 안의면을 가로지르는 마을 도로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위치에 꼭꼭 숨어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주변에 버스를 세울 공간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모습이 부끄러워서 꽁꽁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뭐 이런 곳이 어디 한두 군데겠냐만, 여기에선 터미널이라는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그재그 승차장과 행선지를 알리는
판때기,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여기에서 버스를 탈 수 있음을 어림짐작해본다. 그리고 그 주차장과 연결된 무언가의
건물에서 매표업무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어렴풋에 알게 해줄 뿐이다.
훤히 뚫린 배경 틈새로 조촐하게 몸을 가눈 승차장 지붕은 이곳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된다. 굳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심풀이 마실 나온 사람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이다. 여기를 둘러싼 배경도 제법 훌륭하겠다, 일종의 야외 노인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개의 버스터미널들은 건물이 먼저 나오고 그 건물을 지나야 승차장이 나오는 구조인 반면에, 이곳은 정반대로 승차장이 먼저 보이고 뒤에 표를 파는 건물이 나온다. 시골 정류장만이 갖는 특징 중 하나이다. 굳이 버스가 드나드는 장소에 큰 건물을 세워 막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오려니 골치가 아픈데, 앞에 떡하니 건물을 박아버리면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올 테니까.
승차장에 밀려 꽁꽁 숨은 건물의 속살을 훑어보려 한다. 낯선 사람들에게 제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운지 여기가 대합실이라는 광고 문구 하나 없이 텅 비어있다. 옛날 병원 의자, 교회 의자 같은 것 서너 개가 방치되어 있고 난방 하나 제대로 해주는 법이 없다. 그래서 차라리 햇빛이라도 맘껏 쐬는 야외가 여기보다 더 따뜻하다. 비록 사람 하나 없지만 이 건물의 속살만큼은 따뜻하게 품고 있으리란 기대가 와장창 붕괴되는 순간이다.
방치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속 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둘러봐도 왠지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일단 너무 비좁다. 아무리 사람이 적은 시골의 버스터미널이라지만 이 정도 크기로는 버스 한 대 기다리는 사람을 수용하기도 버거울 것 같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한다고 광고판 다 떼고 노란색으로 벽을 덧칠하고 바닥 타일도 바꿔본 흔적이 역력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역으로 더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깔끔은 하지만 그게 더 숨 막히게 하는 느낌이랄까. 그나마 매표소에 서 있는 화초가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이게 한다.
이렇게 보면 참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영 딴판이다.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입지가 탄탄한 곳으로, 함양과 거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라북도로 통하는 길목이다. 그렇기에 행선지가 단순히 근처 동네 수준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서울을 비롯하여 대전, 마산, 부산, 수원, 인천 등으로 발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표를 보아하니 함양에서 출발한 노선의 상당수가 이곳을 들리는 듯하다.
그중에는 '경남권을 종주하는 근성 노선'도 빠지지 않는다. 거창에서 출발해 이곳을 거쳐 함양, 또는 진주로 향하는 노선. 이 중 극소수는 진주를 넘어 통영, 마산까지 운행하기도 한다. 꽤 자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중간 시간이 1시간 이상, 최대 2시간까지 벌어진다. 오히려 거창까지 다니는 노선이 더 자주 있다. 소속은 함양군이지만 거창과 함양까지의 거리가 각각 비슷하고, 거창읍내의 인구가 함양의 2배라는 점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 외에도 전북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덕분에 장수(장계), 진안, 전주로 가는 노선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인데, 최근 들어 배차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는지 땜질이 세 군데나 쳐져 있다. 거의가 함양이 아닌 거창 방면에서 오는 차들이다.
여기는 시외버스뿐 아니라 농어촌버스까지 죄다 포함하는
'종합버스터미널'의 성격을 갖고 있다. 웬만한 농어촌버스들이 퍼져나가는 중심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주차된 차량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운행을 끝내고 들어왔다가 곧바로 행선지를 바꾸고 다른 동네로 향하는 식의 노선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안의를 생활권으로
하는 서상 지역으로 가는 버스들이 가장 자주 있는 편이고, 중간중간 근처 마을로 들어가는 노선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상행
다음으로 자주 있는 노선은 함양행으로, 중간에 있는 지곡면을 거쳐가는 노선이 약 30분 간격으로 있다. 대체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겹치는 농촌 지역은 시외버스의 배차가 더 좋은 경우가 많은 반면에 이곳은 정반대로 농어촌버스가 더 자주 다닌다. 정확히
30분 간격을 지키며 출발하고, 중간에 막힐 일도 없으니 시간 맞추기엔 딱 좋다. 거창행은 1시간 간격으로 배차가 약 두 배
정도 벌어지는데다, 첫차는 더 늦게 막차는 더 일찍 끊겨 상대적으로 이용이 불편하다.
놀라운
점은 용추사로 가는 버스가 거창행과 거의 비슷하게 있다는 점인데, 용추계곡으로 놀러 가는 관광객들이 이 정도로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정말 의외이다. 하긴 필자도 용추계곡이라는 이름을 얼핏 들어본 것 같으니, 지역 사이에서는 이름난 관광지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딜 가나 시간표가 있으면 요금표도 있는 법이다. 시간표 옆에는 목적지별로 얼마나 돈을 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다. 가장 비싼 동네는 인천으로 21,400원이고, 의외로 부산이나 서울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거창이 함양, 서상보다 300원 정도 더 저렴하다. 괜히 거창행 시외버스가 더 자주 다니는 게 아닌 듯하다. 또한 국도로만 다니는 전주행이 거리가 더 먼 대구행보다 1.5배나 더 비싸다. 이쯤 되면 국도 요율이 너무 비효율적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뇌게 된다.
이처럼 계속 사진을 찍고 있으면서 많은 버스들을 눈으로 보았다. 농어촌버스 한 대가 사람들을 내려줌과 동시에 실은
다음 쏜살같이 다른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고, 시외버스 두어 대가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표에 빽빽하게 적힌 수많은 이름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터미널을 빠져나오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큼지막한 정자 하나가 눈에 띈다. 첫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장소에 있는 누각으로, 이름은 '광풍루(光風樓)'라고
한다. 맞은편에 있는 냇가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커다란 공간에서 술을 띄우고 풍류를 읊조렸을 옛 조상들을 떠올려 본다. 이러한
누각은 옛 고을 중심지에 강 또는 호수가 있는 위치에 주로 지어졌는데, 경복궁의 경회루나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등이 유명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 지역이었다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현'에 불과했던 이 조그만
동네에도 누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데서 이렇게 큰 유적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굉장히 신기한 장면이다.
누각 맞은편에는 이 건물에 있게 해준 조그만 냇가가 있다. 이 냇가의 이름은 '남강'. 그렇다. 진주 시내 한가운데를 구불구불 흐르는 그 강이다. 그 강의 시작점이 바로 안의현에 속했던 서상 일대이고, 안의는 남강이 처음으로 만나는 고을이었다. 옛날과는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바뀌었지만 수려한 산속에 조용히 흐르는 모습이 평화롭고 차분해 보이는 것은 단순히 눈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강과 산을 끼고 있는 이곳을 찾아오는 버스 기사분들께는 어쩌면 그저 경치를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지 모르겠다. 이런 조촐한 분위기를 낀 안의버스터미널은 골목길 사이에 있는 그 모습이 왠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배를 채우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마음도 더욱 상쾌해지는 것만 같다.
첫댓글 2003년에 안의면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꽤 오래 됐네요. ^^;
갔다오신 적이 있으시군요. 그때랑 많이 바꼈나요?
@Maximum 밤에 지나가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
사실 안의면이 어디있는 줄은 몰랐고 함양고속의 지리산행 버스를 보고 함양의 지리산 기슭에 있는 시골지역인가 보다 했습니다. 자세한 역사설명까지 잘 배우고 갑니다^^
지리산행 버스가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바로 여기라지요. 위치는 덕유산 쪽에 가깝지만 산골마을의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참 좋았습니다.
친구집이 안의라서 한번씩 들리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반갑네요 지난주에도 다녀왔습니다 ^.^
친구분께서 물 좋고 공기 좋은 데서 사시는군요. ^^
제 본가인 안의를 다녀오셨네요^^
참고로 진주. 부산행 (하루 3회) 은 함양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생초. 산청으로 해서 간답니다~~
안의에서 함양을 안 들리고 가는 노선도 있는줄 몰랐네요. ㅎㅎ
제 아버지 고향도 안의입니다. 따라서 아버지 차 타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안의가 본가인 분들이 참 많으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