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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금강심론 특별대법회(6)
이른바 참선해서 깨닫는 방법이, 기본적인 참선이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아홉 차원인데 이른바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그래요. 사선정은 네 차원의 그런 선정에 드는 것이고, 사공정은 그 보다도 한 차원 더 높여서 무색계를 관조(觀照)하는 삼매(三昧)입니다. 멸진정은 우리 범부중생의 번뇌를 모조리 다 없애는 그런 삼매가 멸진정입니다. 멸진정이 돼야 비로소 우리가 참다운 성자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그렁저렁 하다 보면, 저와 같이 팔십 세가 되면 그야말로 처량하지요. 팔십이란 참 무서운 나이입니다. 무서운 나이지만 부처님께서 팔십에 가셨고, 제가 존중하는 그리스 철인인 플라톤도 그 나이에 갔어요. 또 인광대사라고, 중국 대만의 위대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도 팔십세에 가셨고 해서 내가 그 분들 나이에 가게 되면 영광이지요.
한편으론 내가 참회가 되겠구나, 그렇게 자기 위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인광대사는 인격이 굉장히 고매하신 분입니다. 그이는 계행도 아주 청정하고 모두를 다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신 자기 이름을 상참괴승(常慙槐僧)이라, 그러니까 항시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그런 중이란 뜻이지요. 저 같은 사람도 삼년 결사도 몇 번하고 애쓰고 살았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그때 좀 잘했으면 될 것을...’하고 뉘우칩니다. 부처님 법문은 누구나가 다 그대로만 닦으면 꼭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닦지를 못하니까 지금까지도 확철대오(確澈大悟) 못하고 아직도 범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로 사신분도 상참괴승이라, 항시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중이란 뜻인데, 저 같은 사람들도 중생들한테, 중생들의 빚더미 속에 지금까지 살았단 말입니다. 옷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들을 위해서 크게 도움도 못되면서 아주 빚더미 위에서 살아놔서 그야말로 참 한도 끝도 없이 참괴를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저 같이 나중에 나이 들어서 후회를 안 하시도록, 후회를 않도록 사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정견(正見) 그대로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마땅히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이블(Bible)에도 이런 대문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일반 신도들한테 ‘너희들은 저 하늘에 계시는 주님같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무엇인가, 진리에 맞는 진리 그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공자의 논어에도 소중한 말씀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성자의 말이란 것은 모두가 다 옳습니다.
우리 중생의 쥐꼬리만한 지식 가지고서 그런 성자를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들은 우선 진리를 바로 깨달은 분들이니까 그때그때 사정 따라서 다르게 표현이 됐다하더라도 우선 저분들 말씀은 다 옳거니, 이렇게 전제를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불교만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한 가지 법집(法執)입니다. 우리 수행법도 그래요. 염불(念佛)을 하는 사람들은 염불만 최고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께서나 성인들, 조사스님들께서 말씀한 수행법은 다 옳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묵조(黙照)하는 것이나 염불이나 다 옳습니다. 다만 그 마음 태도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하더라도 화두공안이라는 것은 그 부처님 도리,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아야 참다운 공안이란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라든가 또는 ‘무(無)’자라든가 그 원리가 어디에 있는 고 하면, 그 부처님이 무엇인가? 부처님 도리에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불성(佛性)을 찾는, 불성을 찾는 방편으로 해서 ‘이뭐꼬’가 생기고 ‘무’자가 생기고,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뭣고’라고 해야 되겠지요. 모든 의단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찾기 위해서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나온 것이지,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령 우리가 염불선(念佛禪)이다 하면 염불선을 잘 모른 사람들은 염불선을 갖다가 부처님 당시나 그 뒤에는 별로 없던 것을 청화(淸華)가 만들었다든가 그래버리면 그것이 큰 탈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슨 한 선을 만들만큼 그렇게 출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염불선이란 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육조혜능스님 선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또 사조 도신스님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안 떠나고 염불하면 다 염불선입니다. 여러분이 지장보살을 외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시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체, 우주의 본 바탕자리인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고 하면 그것 모두가 참다운 염불선입니다.
원래 참선이란, 묵조선 즉 말하자면 아무런 무슨 의단이 없이 잠자코 명상하는 묵조선이나 또는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공안선이나 부처님 명호를 외는 염불선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떠나지 안해야 되요. 진여불성자리를 떠나면 참선이 아니어요. 참선과 일반 공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일반 공부도 근원은 똑 같지만은 화두를 하건 묵조를 하건 또는 염불을 하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설사 ‘이뭐꼬’ ‘이뭐꼬’ 애쓰고 땀을 흘리면서 선방에서 애쓴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떠나면 그때는 참선이 못돼요. 그렇게 되어야 쓰겠지요?
당연히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면 ‘똥막대기’를 부르나 뭘 부르나 그때는 모두가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존재의 실상(實相)자리를 안 떠나면 돼요.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두가 다 바로 보면 그때는 실상(實相)이 아님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참선 공덕(功德)은 참선하는 것은 그냥 애만 쓰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깨달을 때에야 활연대오(豁然大梧)해서 다시없는 위없는 행복을 느끼겠습니다마는 깨달은 뒤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부해 나갈 때도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만큼, 우리 마음이 조금씩 열려 가면 열려 간만큼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훨씬 좋아집니다. 사실 보통 명상공부를 한다 해도 잔병이 떨어지고 머리도 더 좋아지고 눈도 밝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선해서 약간 힘을 얻어 놓으면 밤새껏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별로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근원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은 또 무한의 공덕자리, 무한의 가능성이 거기에 포괄되어 있는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佛性)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행복감이라든가 재미라든가 건강이나 그런 모든 것이 거기에 상응됩니다. 그래서 참선의 이름을 현법락주(現法樂住) 현공덕주(現功德主)라, 모든 공덕이 나타나는 그런 공부란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할 때 그냥 고통만 생각하고 아무런 거기서 얻는 것은 나중에 깨달 때 외에는 별로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가 하루 닦으면 닦은 만치는 우리 마음이 불성(佛性)하고 가까워짐과 동시에 우리 행복감이나 건강이나 우리 재주나 모든 것이 거기에 따라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참선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참선할 때는 꼭 기본적인 준비가 있어야 됩니다.
누구나가 다 참선에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맨 처음부터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가령 밤에 염불도 하고 그러다가도 한 30분이나 한 시간 그렇게 앉는 버릇을 붙이면 그렇게 버릇이 차근차근 들어가면 나중에는 더 앉기도 훨썩 쉽고, 우리 마음도 그만큼 차근차근 정화되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습관성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때도 우리 마음 자세가 참선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참선하는 자세를 간단히 말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상삼매란 것은 모든 것이 부처라는, 하나의 실상 외에는 없다. 천 번 만 번 되뇌어도 일체존재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러는 것이지 바른 정견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불성(佛性)뿐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이 그래야 됩니다. 다른 것은 없이 모두가 다 만능을 갖춘 만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상삼매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을 끊임이 없이 생각 생각에 계속해야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때그때 순간 생각은 더러 할 수 있지만 지속을 시키지 않지 않습니까. 기분이 좀 좋거나 환경이 개운할 때는 모르지만 시끄러운 데라든가 또는 기분이 언짢을 때는 그냥 그런 쪽으로 우리 마음이 달려가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두가 다 진여실상뿐이다. 불성(佛性)뿐이다, 하는 그런 일상삼매를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이 지속을 시키는 것이 일행삼매라. 그렇게 때문에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항시 달라붙어 있어야 되어요.
육조 혜능스님이라든가 사조 도신스님이라든가 그런 도인들 스님 또는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있는 이 금타선사님 가르침도 내내야 모두가 다 그런 쪽으로 포괄이 됩니다. 육조단경에서 부촉품(付囑品)이라, 부촉품은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부촉품에 가서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님의 무량지혜를 알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공부할 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여란 것은 하나의 진리인 동시에 다른 것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참다운 도리가 진여 아닙니까. 그 진여라는 것은 우리 인생과 모든 참다운 진리가 진여입니다. 또 그 자리는 하나의 도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佛性)그래요.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모든 그런 진리라는 것은 바로 진리만으로 해서 사변(思辨)적으로 이론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한뻔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을 항시 놓치지 않아야 그래야 이른바 일상삼매고 일행삼매 입니다. 또는 그런 자리를 생각 생각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리에 이제 누울 때나 그 자리를 안 놓치면 그때는 꿈속에도 우리가 공부가 되어 갑니다.
우리 꿈이라는 것이 과거 전생부터서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니까 우리 범부들은 별스런 꿈을 다 꾸지 않습니까. 금생에 경험도 안한 것들이 자꾸만 꿈속에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잘 때까지 강인하게 우리 의지를 진여불성(眞如佛性)에다 딱 매어 놓고서 그래서 일상삼매를 하고, 또는 일행삼매로 해서 빈틈없이 우리가 저절로 자지면 잘망정 빈틈없이 하다보면 결국은 꿈속에서도 다른 꿈은 안 꾸고 부처님 공부 쪽으로 우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차근차근 꿈속에 정화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은 장절마다 또는 구절마다 굉장히 소중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또 그 한글 관음문자(觀音文字)란게 있어요. 관음문자란 무엇인가 하면 성자의 눈으로 봐서 모든 소리를 다 부처님 소리 부처님의 청정한 범성(凡聖)으로 봐가지고서, 모든 가사 사람 말소리라도 어떤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욕심(慾心)이 많고, 또 어떻게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진심(瞋心)이 많고 말입니다. 그 음성으로 사람의 성질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도리가 관음문자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로 해서는 여러 가지로 모든 음을 다 표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우나 이 관음문자로 할 때는 모든 그 아주 괴상한 소리라든가 그런 한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다 표현할 수 있는 관음문자의 구조가 돼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책을 받으신 뒤에 그런데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불성(佛性)공덕이 얼마만치 위대한 것인가, 깨달은 분들이 우리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견증하고 본다고 생각할 때 얼마만큼 위대한 것이 어떻게 빛나고 어떻게 위대하고 하는 것인가 하는 불성공덕을 간단히 다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또는 모든 것을 모든 물질을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서 나중에 진여불성(眞如佛性)까지 딱 도달하는 그런 경구도, 다만 그것이 하나의 참 불교의 도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물리 화학적인 그런 도리와도 같이 절충을 시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따지기 좋아하고, 분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불성(佛性) 쪽으로 자기가 다가서게 됩니다.
... 질문시간을 좀 줄려고 합니다마는 아,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 책은 한 권씩 나누어 드리게 되어 있습니까?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같은 책도 깨달은 성자가 낸 책이 있고 또는 범부승들이 낸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통 책을 내는 경우는 그야말로 참 그 이른바 결정설(決定說)이라, 조금도 오류가 없는 결정설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가 내신 책은 결정설이라,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구절을, 어느 장절을 펼치고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성불의 길로 우리 마음을 편달하는 귀중한 금옥 같은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다른 소설을 보듯이 일반 책 보듯이 그렇게 말으시고 그 장절마다 모두가 다 참고가 되는 것이고, 또 각 경론(經論)의 정수를 뽑아 있단 말입니다.
가령 화엄경에서 정수는 어떤 것이고,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어떤 것이고, 또 능엄경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고, 그런 것을 다 여기에 중점적으로 뽑아 놓았습니다. 또 뒤에 천문학도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도저히 천안통을 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언급할 수가 없는 그런 소중한 법문입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우주시대 아닙니까? 따라서 우주론적인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기 때문에 일반학자 분들이, 특히 불교학자분들이 꼭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을 참고로 해서 자기들이 느끼고 있는 애매모호한 점이라든가 또는 수행론에 있어서 꼭 금강심론을 참고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학자 분들은 여러모로 논문 쓰기에 바쁘고, 학생들 가르치기에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어서 유감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허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역시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간에 꼭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三昧)에 들지 않고는 부처가 될 길이 없단 말입니다. 이치로 해서는 불성(佛性)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삼매(三昧)에 들어서 명상으로 해서 다 놓아버리고서 상당한 시일동안 물론 근기 따라서 더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상당한 시일동안 삼매(三昧)에 들어야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적어도 한 삼 년 동안은 그래도 삼매(三昧)에 들 수 있는 그런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금생에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가정에서 내외분 같이 지내는 경우에도 꼭 두 분이 상의해서 말입니다. 똑같이 앉아서 참선하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동기를 삼아서 그렇게 하시고, 또 출가한 우리 스님들도 역시 지금까지는 그렁저렁 지내왔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이란 것이 언제 갈지를 모릅니다. 저 같이 나이가 많다 그래서 빨리 가고 젊다고 해서 많은 시간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어느새 가버립니다. 어느새 인지 모르게 가버립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렁저렁 살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먹지 않고 나름대로 함부로 살았지 않았기 때문에 아, 지금도 허리도 꼿꼿하고 팽팽하지만 보통은 저만치도 못 산 사람들은 그렇게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도 주의하셔서 건전한 몸일 때에 가장 소중한일 가장 좋은 일이 우리 공부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장사도 말고 사업도 말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하더라도 고객도 부처로 보고, 하나의 물건을 팔드라도 다 부처로 보고 모두 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것보나 저것보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그런 관념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서 오늘 나누어 드리는 이 책을 보고 또 보고 하십시오. 성불의 길에 있어서 순서로 해서는 지금 나온 책 가운데는 이런 책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그래서 그 근본선을 사선정, 사공정, 멸진정인데, 이 아홉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선근, 사가행지(四加行地)를 밟아야 돼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최제일(最第一) 최대(最大) 최상(最上) 최승(最勝) 최묘(最妙)라, 근본선을 닦아가는 것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 모든 팔만법문 가운데서 최제일(最第一) 최대(最大) 최상(最上) 최승(最勝) 최묘(最妙)라, 이렇게 부처님 스스로 찬탄을 하셨습니다. 제가 아함경에서 그걸, 아함경은 사아함경인데, 그런 대문을 조사해보니까 마흔 한 군데나 그런 대문이 있어요.
얼마나 부처님께서 그와 같이 역설 강조를 하셨으면 마흔 한 군데나 그러한 법문을 되풀이 했을 것입니까. 우리가 그걸 본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 행복과 직결됩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이 또한 더욱 더 환희심을 낼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온 것이 다만 한 발이라도 우리 본래 성품, 우리 본래 주인공 자리로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셔서 꼭 여러분들 머리맡에 두시고서, 보고 또 보고 하십시오. 저는 금타 선사님의 법문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원고를 주워 모아서 정리해 한 책으로 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와 같이 의미 있게 봐주셔야 여러분한테 좋고 그래야 저도 공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꼭 금생에 대오철저大悟徹底를 하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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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