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곡 (穀)-색 (穡)-종덕 (種德)-맹진 (孟畛)-연기 (衍基)-서 (湑)-윤번 (允蕃)-귀지 (貴枝)-희백 (希伯)-대형 (大馨)-문영 (文英)]
(브론테 세자매)
19세기 중반 영국의 문단에 해성처럼 나타나 짧은 기간동안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세 자매가 있으니 바로 샬롯 ( Charlotte), 에밀리 ( Emily) , 그리고 앤 ( Anne) 이 세명의 브론테 ( Bronte) 자매이다. 샬롯은 <제인에어 (Jane Eyre)>,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그리고 앤은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The Tenant of Wildfell Hallo)> 이란 대표작을 내놓았는데, 이 세자매의 소설들은 아직도 영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다. 하지만 문학 등단때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세 자매 모두 결핵때문에 요절했다는 특징이 있는데, 샬롯은 40세에 (1816~1855) 에밀리는 31세에 (1818~1848) 그리고 막내 앤은 30세에 (1820~1849) 각각 아쉽게 세상을 하직했다.
천재는 단명이라는 말이있다. 사실 브론테 자매말고도 인류역사속에는 짧고 굵게 살다 단명한 아까운 인재들이 적잖다. 예를 들면 음악계엔 엘비스 프레슬리, 커트 코베인, 지미 헨드릭스, 에미 와인 하우스, 휘트니 휴스톤, 존 레논 등의 귀재들이 재명에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음을 맞았다. 필자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은 무병장수하며 아무 문제없이 백세까지도 충분히 살고도 남겠지만, 자의던지 타의던지 이렇게 천재들은 오래 살지 못한 경우가 꽤 있었다. 만약에 단명한 천재들이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천수를 누리고 살다 갔으면, 아마 이 지구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의 운명을 그렇게 정해놓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우리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감히 점쳐 볼 염두가 나지 않는다.
우리 한산이문에도 일찌기 천재성을 보여주다 아깝게 단명하신 귀재들이 좀 계시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휘 문영 (文英, 1568~1598) 해산공 (海山公 ) 이라 할 수 있겠다.
해산공은 1568년(선조 1) 에 태어나셨는데, 자는 국화(國華)이며 호는 해산이다. 공의 고조는 사간원대사간 (司諫院大司諫) 휘 윤번 (允蕃)이고, 증조부는 풍저직장(豊儲直長) 증 좌승지 (贈左承旨) 귀지 (李貴枝)이며, 조부는 연안부사 (延安府使) 증 이조참판 (贈吏曹參判) 휘 희백(李希伯)이다. 공의 부친은 찰방 (察訪) 증 (贈) 사복정 (司僕正) 휘 대형(大馨) 이며, 모친은 직장 (直長) 남궁혜 (南宮蕙) 의 따님, 종사랑 교서관권지부정자 (從仕郞 校書館權知副正字) 남궁효 (南宮孝) 의 손녀, 고창현감 (高敞縣監) 산수주인 (山水主人) 남궁필 (南宮弼) 의 증손녀, 강원도관찰사 (江原道觀察使) 남궁찬 (南宮璨) 의 현손녀, 지평 (持平) 권헌 (權憲) 의 외손녀, 경주부윤 (慶州府尹) 권걸 (權傑) 의 외증손녀 , 길창부원군 (吉昌府院君) 권남 (權覽)의 외현손녀 인 의인 (宜人) 함열남궁씨 (咸悅南宮氏) 이다. 해산공은 부친 휘 대형 찰방공과 모친 의인 함열남궁씨의 귀한 독남무녀 유일한 자식이었다.
해산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였는데, 8∼9세에 이미 시경 (詩經) 을 읽을 수 있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좀 더 자라서 공은 풍산인 (豊山人) 서애 (西厓) 류성룡 (柳成龍) 과 아계 (鵝溪) 휘 산해 ( 山海) 선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류성룡과 아계공 모두 사위를 삼고 싶어 하였다 한다. 아계공 휘 산해 선조가 장래가 촉망되고 훤칠하고 똑똑하며 잘 생긴 해산공이 넘 맘에 쏙 들어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졌는지, 아님 종친끼리 혼인이 어느 정도 가능했는지 의구심이 들게하는 대목이다.
동성동본불혼제도 (同姓同本不婚制度) 는 성리학 (性理學) 이 한반도에 도입된 후 조선을 건국한 유교를 숭배하는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 들에 의해 조선초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산공이 장가들 무렵인 16세기 말에 이 법이 철저하게 전국적으로 잘 지켜졌는지 아니면 소수의 예외가 존재했는지 필자는 정확하게 알수가 없다.
(서애 류성룡 영정)
다만 결과적으로 임금에게 중매를 부탁한 서애 류성룡은 결국에는 본인이 원한데로 해산공을 사위로 삼았으며, 아계공 휘 산해 선조는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역사에 알려진 명재상 광주인 (廣州人) 한음 (漢陰) 이덕형 (李德馨) 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해산공은22세인 1589년 (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공은 사포별제별좌 (司圃別提別座), 인도찰방 (仁道察訪)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공은 사후에 승정원좌승지 (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 (兼經筵參贊官) 에 추증되었다.
공이 25세인 1592년(선조 25) 에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발발하자 공은 조모인 정부인 (貞夫人) 반남박씨 ( 潘南朴氏) 와 모친 의인 함열남궁씨를 모시고 피난을 가게되는데 먼저 관동 (關東)으로 피난을 갔다가 호남 (湖南)으로 돌아왔다. 피난길을 떠날때 조모와 모친뿐 아니라 공을 따라 동행한 식솔은 공의 배위 풍산류씨, 당시 7세였던 공의 장남 휘 창조(昌祚), 공의 나이 어린 11세 소년 처남 수암 (修巖) 류진 (柳袗) 및 하인과 하녀들이 있었다.
류진의 부친 서애선생은 임진왜란 발발당시 영의정이였으므로 선조임금을 호종 (扈從) 하고 서행 (西行) 길에 올랐고, 백부인 겸암 (謙菴) 류운룡 ( 柳雲龍) 은 조모를 모시고 피난을 떠났다. 수암 류진은 매형인 해산공을 따라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류진은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일부지역인 영동지역으로 피난다니면서 경험한 사실을 후일 한글로 당당하게 <임진록 (壬辰錄)> 에 기록하였다. <임진록>은 임진왜란 발발년 4월 한양을 떠날때부터 11월사이에 껶은 피난기록이다. 사실 <임진록> 은 수암선생이 29세 되던 1618년도에 18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적어 쓰게 되었다. 이 책자는 문학적 가치외에도 당시 관리의 부패상과 왜적 (倭賊) 의 잔학상, 왜적과 결탁한 도적들의 실상, 필설 (筆舌) 로 표현키 어려울 만큼 쓰라린 고난 (苦難), 처참한 전쟁의 시련과 고초, 목불인견 (目不忍見)의 참상과 인심의 후박(厚薄), 피난 살이의 생활과 갖가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바 체험 이야기와 이듬해에 한양집에서 이뤄진 가족들과의 반가운 해후 등 생생한 사실 (事實) 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데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임진록> 은 수암종가에 전해왔으나 그 훼손이 심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지금부터 약 150여 년 전에 규중에서 필사한 것이 현재 전한다고 한다.
많은 식솔을 인솔하고 피난길을 떠나 정처없이 전국을 헤메어 다니는 동안 그들 모두의 생사화복을 관리-책임지는 역활을 맡은 해산공이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임진록> 에 의하면 피난일행은 죽을 고비도 여러번 겪게된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이 도우사 피난일행은 큰 피해없이 피난생활을 마감하게 되고 무사히 한양집으로 귀가하게 되는 것이다.
1595년 해산공이 28세일때 공의 차남 휘 홍조 (弘祚) 수은공 (睡隱公) 이 피난가 있던 전라도 함열군에서 태어났다. 함열은 해산공의 외가가 되는데 해산공은 전란을 피해 이 곳으로 잠시 옮겨와 살았던 것이고, 사실 공의 본가는 한양의 낙선방 (樂善坊), 지금의 인사동 (仁寺洞), 현 한산이씨 대종회 건물이 있는 수송동 바로 근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