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對 광복
이화여대 사학과 대학원 박리나
* 용어 논쟁의 기원
우리나라는 1949년 8월 15일 정부주관으로 ‘광복절 4주년 기념식’을 처음으로 거행했다. 이때 좌파들은 광복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우파정부의 ‘광복’에 맞섰습니다. 본격적인 용어논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이승만을 위시한 당시 우파들은 우리 민족 스스로 피지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이라는 우리의 노력이 있었기에 미,영,중 등 강대국이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통하여 우리의 독립을 약속한 결과이니 ‘광복’이 맞다고 주장했고, 좌파에서는 우리 독립군이 일본과 직접 전쟁을 하여 승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단순히 남의 힘에 의하여 속박에서 풀려난 사건’이니 ‘해방’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 두 진영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함에 따라 ‘해방’이냐 ‘광복’이냐 하는 언어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 광복
- 광복 : 빛 광(光)에 돌아올 복(復). ‘빛을 되찾다. 빛을 다시 보다’라는 의미로서 사전을 찾아보면 ‘잃었던 국권을 도로 찾음’이라고 되어있다.
- 용어 사용자들의 입장 : ‘광복’이 ‘해방’보다 주체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광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해방됐다’는 말을 사용하면 ‘일본이 한국을 풀어놓았다’ 또는 '일본이 한국을 풀어놓아 자유롭게 됐다'라는 뜻이 되므로, 즉 ‘해방’이라하면 일본이 한국의 주인으로서 한국을 풀어놓아주었다는 의미가 되며, 자의든 타의든 해방시킨 주체는 일본이라는 뜻이 강조된다.이러한 해석은 어불성설이다. '해방되었다'는 표현에는 주어가 없다. 따라서 누가 누구로부터 누구의 힘에 의해 해방되었는가 하는 점이 명확해져야 한다. 이 경우 미국을 위시한 여러 국가들의 노력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해방되었다라는 표현을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일본을 주체로 해석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해방이라는 용어에는 주인(일본)과 노예(우리)의 두 가지 개념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 용어로서 우리 스스로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일간의 역사 문제를 말할 때 ‘해방’이라는 잘못된 역사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 ‘해방’의 반대말은 속박이나 구속으로서 ‘해방’이라는 말보다는 ‘광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光(광)復(복)은 한국이 잃었던 주권을 도로 찾았다는 뜻이므로, 예속적이고 굴욕적인 해방이라는 용어보다는 광복이라는 용어를 역사 용어로 통일하는 것이 합당하다.
* 해방
- 해방 : 解(해)라는 글자는 ‘풀 해, 흩어질 해, 벗을 해’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放(방)이라는 글자는 ‘놓을 방, 내쫓을 방, 이를 방’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해방’에는 ‘풀어놓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리고 해방이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몸과 마음의 속박이나 제한 따위를) 풀어서 자유롭게 함”이라고 되어 있다.
- 용어 사용자들의 입장 : 당시의 시대, 문화적 배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용어는 ‘해방’이었고, 지금도 나이가 든 사람들은 광복보다는 해방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광복이라는 용어는 이승만의 ‘해방’ 후 정치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용어에 불과하다. 해방공간에서는 우익도 광복과 더불어 해방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썼지만, 분단정부 수립 이후 정통성 경쟁, 체제 경쟁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광복'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해방이라는 말은 보다 폭넓은 의미로서 광복을 포괄한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이 단순이 '빛'을 되찾은('광복'), 즉 국가의 주권을 되찾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복'이라고 하면 국가를 되찾았으니, 즉 국권을 잃기 전으로 원상회복되었으니, 그 자체를 기뻐하고 기념하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즉 되찾은 국가가 일제파시즘체제를 그대로 베낀 것이든, 봉건왕조체제든 고민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조선인들은 주권을 빼앗긴 민족모순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하에서 존속하고 있는 봉건적 모순(지주소작관계)과 제국주의 하에서 확대되고 있는 계급모순(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성모순(가부장제) 등 중첩된 모순구조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어떻게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만 했다. 결국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새로운 세상의 '창조'와 맞물린 것이고, 이는 과거의 모순을 어떻게 파악하고 극복할 것인가와 직결된 것이었다. 즉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 지주소작제도로부터의 해방, 제국주의 잔재로부터의 해방, 노동억압적(착취적) 현실로부터의 해방, 나아가 이러한 모순들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함의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선택
: 물론 현재의 공식 용어는 ‘광복’이다. 그럼에도 해방이냐 광복이냐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논설위원은 시론에서 ‘용어가 뭐가 중요하냐. 인민이든 동무든 친구는 다 친구 아니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광복 혹은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역사인식을 제대로 하느냐 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나도, 용어가 무슨 상관이냐 중요한 것은 본질이 아니냐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규제한다. 언어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등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언어를 통하지 않는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장난에 불과하더라도 용어의 문제를 보다 ‘진실 되게’ 정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당위성이 성립된다.
광복이라는 용어는 ‘잃었던 빛, 즉 권리를 되찾았다’는 의미로써 우리가 일본에게서 ‘주체적으로’, ‘원래 있던 권리’를 되찾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은 ‘노예적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남의 힘에 의해 풀려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좌파 혹은 맑시스트들이 ‘해방’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김일성이 이끌던 단체의 이름은 ‘조국 광복회’였으며 지금의 북한에서도 해방 대신 ‘광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이 용어들의 문제는 비단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1945년 8월 15일 얻어졌다고 믿는 그 ‘무엇’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광복이라고 주장할 때의 문제점은 첫째, 일제 시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시절은 분명히 존재했고, 또한 우리가 우리의 주체적인 독립운동보다 외세의 힘에 의해 소위 ‘독립’을 쟁취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애써 그런 것을 덮고 부정하려 하는가? 둘째, 광복이라는 단어 자체는 과연 주체적인가? 다시 빛을 찾는 일의 주체성 여부에 대해 단어는 침묵한다. 광복이라는 단어의 어디에 ‘내가 빛을 스스로 찾았소’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셋째, 광복이라는 단어는 어둠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온전히 어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역시 문제가 있는 역사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이라고 주장할 때의 문제점은 첫째, 광복이 60년 전의 8월 15일에 얻어진 것에 대해 매우 작은 한 부분만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과연 ‘해방’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을 얻어냈는가?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혹은 자본주의로부터? 혹은 성예속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그 답은 아마도 ‘아니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해방이라는 단어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이전의 어떤 것을 온전히 버리고 나아감을 연상시킨다. 식민 지배의 잔재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문화는 섞이고, 제도는 수용되었다. 현실과 지향점의 간극은 적당해야 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 3의 다른 용어를 선택하고 싶다. 그래도 굳이 택하라면 해방을 택하겠다. 그 이유는 보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살리는 용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학도로서 최대한 그 시대의 시각으로서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퍼온데 : http://blog.naver.com/hat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