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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 산책하는 버릇은 변함이 없다. 초록이 투명하고 초록의 빛이 무지개 빛만큼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숲의 모든 색을 마음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 오르기 위한 일도 정상에 서서 시선에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시선에 자유가 물들면 마음 또한 여유로운 자유가 넘친다. 그것은 나를 버릴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험한 과정, 즉 위험한 인자들을 사지(四肢) 만으로 극복해 가며 오른 정상, 그곳에는 바로 자유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 곳에선 스스로 미세한 채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험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 오른 자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의 평화, 극지점이었다. 자신을 버리려면 자기가 자신에게 혹독해야 한다.
한양성의 그대로 모조한 성이 바로 南漢山城이다. 漢陽 都城처럼 남북 길이는 짧고 동서방향은 길다. 그리고 社稷壇과 宗廟가 있고 王宮이 있고 어진 왕과 신하가 만나 국정을 논하는 嘉會의 空間도 있다. 모여사는 공간의 안위를 염려하여 石築을 쌓아 올려 城郭을 이어 만들고 그곳에 사대문을 달았다. 인간의 삶은 시간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간으로 시작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다 자신의 삶의 시간이 멈춰지면 자신만의 시간은 멈춰진다. 왕권을 지키는 일은 백성의 시간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래 성안 중앙에 각이나 루를 세우고 鐘을 매달아 시간을 알린다. 28번을 타종하고 33번을 타종하여 관리하는 것이다. 仁義禮智信을 기본으로 한 축성은 같으나 요새의 성격이 큰 산성은 각 문마다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두었다. 당파싸움으로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 정조의 생각과 행위는 탕평과 효심으로 비롯된 것이 많았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찾아 사대문에 이름을 새로 짓고 판각하여 걸어 놓은 글도 그 기준을 따랐다. 정문인 南門의 이름은 至和門이라 하였고 東門은 左翼門이라 하였으며, 서문은 右翼門, 北門은 勝戰門이라 하였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힘차게 짓을해야 몸통이 제대로 뜨게 된다. 좌우가 제대로 날아 지대한 화합을 이루어 나라를 늘 승전으로 이끌어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없자는 정조의 결의 담긴 현판이 바로 남한산성 사대문의 이름뜻이다. 그러나 역사는 굴곡지게 흐르고 있다.
주차를 한 후 성지를 지나며 가벼운 인사를 하는 순간 누군가 오래토록 현양비 앞에 서서 기도 중이었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넓은 郡은 바로 廣州郡이었다. 동인들의 본거지 광주, 이곳출신 사대부들에 의하여 학문으로 시작된 천주교는 결국 신앙화 되어 정국을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한다. 신해박해(1791) 기해, 병인박해(1866- 1873) 통해 300여 명의 순교자를 생기지만 신분이 파악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산성 동문밖에 형장이 있었고 백지사라는 특이한 방법으로 처형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산성이다. 창호지를 겹겹이 얼굴을 가리고 물 붓는 방식으로 숨통을 조인것이 바로 백지사다. 이곳에서 최초 순교자는 하우현 출신 한덕운 토마스다. 서소문 사거리에서 처형된 순교자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옹기장수로 변복을 하고 나섰다가 관헌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산성으로 옮겨진 뒤에 순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후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복자 반열에 오른다. 토마스의 자제는 박해를 피해 떠돌다 곡성으로 내려가 정해박해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기도 한다.
남한산성의 매력은 성 안에 분지가 있다는 것이다. 왕궁 남쪽 방향으로 대신들이 살던 곳이 있다. 면적은 크지 않으나 산의 세력을 거스르지 않고 흙의 형세에 따라 건물을 정좌시킨 후 풍광을 맑게 이끌어 주는 활엽수를 심어 한옥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어울린다는 것은 공존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다는 것이다. 서로 절제를 내어 보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부드러움은 곡선에서 가능하지 직선에서는 만날 수 없다. 강하면 부딪치지만 부드러우면 자유자재로 선을 이어갈 수 있다. 곡선의 풍경 안에서 살던 사람들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이웃과 마을 전체와 더불어 대동 단결하며 나누며 살았다. 백의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외세와 섞이면서 본은 사라지고..... 삶이라는 문명의 진화일까? 잠시 세웠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하였다.
곡선 길 양지바른 곳이면 분별하기도 힘든 작은 야생화들이 핀다. 그리고 나름대로 벌, 나비를 유혹할 비장의 멋을 지니고 있다. 곤충의 화려한 색 옷을 입은 여성은 나비이고 남성은 벌이다. 향기와 색과 모양의 아름다움이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유혹의 결과는 수정으로 나타난다. 생존! 자신을 희생하여 후대의 혼을 이어가는 일. 이것이 바로 생명을 지닌 것들에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얻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준비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작은 장애가 생겨도 추악함이 드러난다. 성품이라는 것은 살 수도 없고 빌려 올 수도 없으며 급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독한 시련의 엄동을 이겨내고 봄이라는 계절의 아주 작은 인자에 불과하지만 최선을 선택하고 그렇게 보여주고 있기에 개별별 꽃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이란 것은 사회에 공헌하고 기여하며 이용자들과 선린을 이뤄나가고 조력과 협력을 통하여 더 좋은 가치를 무한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믿고 그 재화를 마음 놓고 구매하는 것이 소비자다. 추악한 인성을 지닌 자들은 지배의 욕심밖에 없으니... 성품이 없는 인간말종들이 지배하는 기업, 그것은 스스로에게 독화살과 독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실패한 인생들이다.
마루를 넘자 서울의 동남권역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漢水, 흐르는 강이 물 잔에 가득 담긴 물처럼 보였다. 호수와 같은 한강, 그 모습을 보아 요즈음 내린 강우량이 가늠되었다. 남산 넘어 노량진 강물도 보인다. 인왕산 지척같이 보이고 관악산도 손에 잡힐 만큼 다가와 있었다. 미세먼지 영향으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다정하게 마음을 내준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서울의 모습,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 후에나 볼 수 있는 귀한 풍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삶의 터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기와 물인데.. 원인을 타국에 돌려놓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요즘 들어서야 호들갑이다. 그가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걷는 방향에 따라 시선이 이렇게 바뀐다. 패기와 열정 덩어리 삼각산이 보인다. 숨은듯 보이는 노적봉 우측으로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보인다. 사계가 다 아름다운 곳이다.
걸음을 더 옮기자 육모정 안부를 감싸고 우이령 기슭을 만들며 영봉을 지나 하루재를 가로지르고 깔딱고개를 세운후 만경대 허리를 감은 후 걸음을 멈춰버리는 상장능선도 보인다.
걸음을 더 옮긴 후 만나게 되는 북한산 자락, 화계사 일대와 옛 빨래골, 정릉으로 넘어가는 곳곳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팽창은 북한산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이다. 이런 환경에서 북한산 계곡에 물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멸종되어 가는 곤충과 식물들도 당연한 일이다. 산 아래 지하 깊은 곳까지 파 시설물을 건축하니 북한산에 지표수들은 그쪽으로 전부 흘러 평상시 물이 없는 계곡을 보게 되고 단지 비가 온 후에야 물을 볼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뀐지 오래된 일 이다. 시선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렸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북한산 환경을 익히 과거와 현재를 뚜렷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곽을 끼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숲 그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점점 숲이 되어 가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분별된다. 마주 앉는다는 사실은 소통하기 위함이고 무엇인가 나누기 위한 준비 단계다. 사람의 형상 중 듣고, 보고, 말하고 지금의 생각을 대변하는 표정을 나타내는 곳은 전부 안면에 모여 있다. 마주 서거나 앉아야 살필 수 있겠끔 되어 있다. 이런데도 마주 보지도 않으면서 상대에 대하여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늘 우리를 지배한다. 흉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함께 하는 식탁문화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마주 앉은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앵글에 담게 되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사람은 우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걷다 가끔 걸어 온 길을 돌아다 보면 오면서 보고 느끼지 못한 풍광을 발견할 적이 많다.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안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참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 만치라는 단어가 뭉쿨하게 한다. 저~~ 만치, 그리움이다.
성곽 아래단에 피어 있는 제비꽃이다. 양지꽃과 더불어 봄을 전령하는 측에 끼는 꽃이다. 젊은날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 때 고 조동진 가수의 노래 제비꽃을 자주 불렀었다. 대학로에서나 종로 5가 연강극장에서 콘서트가 있으며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즐겨 듣곤했었는데..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음~~음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음~~음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음~~음
녹빛 넘어로 봉화불을 밝히는 臺가 보였다. 그것을 발견함으로서 자연스럽게 녹빛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완성된 색을 발하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각종 활엽수들이 자신의 빛을 만들어 가며 綠陰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이 초록 바다를 이루고 있는 중이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거북이 등을 닮은 소나무 樹皮, 아니지 거북이가 소나무 樹皮를 닮았지. 아무튼 북쪽면 이끼를 이런색으로 소나무는 바꿔 놓았다. 나는 이 빛을 화려한 녹빛이라 표현하였다. 궁궐이나 산사, 문살과 틀에 칠하는 색인데 인간의 조합 아니라 자연의 물, 바람, 햇빛이 만들어 낸 걸작인 것이다. 놋쇠나 구리에 드는 청동빛이 소나무 수피에 생긴 것이다.
산벚꽃이 만개되어 작설같은 새싹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초록바다에 핀 산벚꽃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산까치가 해바라기 하는 모습이 보기 좋고,
내가 넘어야 할 성곽 오름길이 다가 와 넘어서
꽃 그늘에 섰다. 내가 걸어 온 길이 저 아래에 보인다.
꽃그늘 뒤로 보이는 산 주름, 겹겹 그 사이마다 온통 초록빛이다. 농담이 다다르니 볼수록 아름답다. 등을 돌려 갈 길을 조망해 보니 가파르다. 그러나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시작하기 전 마음으로 목적지를 정해 놓았으니 안 갈 수 없다. 잠시 후회가 되는 듯하더니 아침 이슬처럼 그 마음이 사라졌다. 왜 길 끝에 목적지를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걷는 자의 끝은 바로 길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걷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직립은 인간으로서의 기둥이다. 창조적인 질서 안에서 걷는 일, 사색과 묵상도 겸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을 닮아가야 한다. 매일매일. 그리고 스스로 이뤄나가야 한다.
오르자 다시 평지가 나왔다. 다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길을 닮은 것 특히 산 길을 닮은 것이 바로 우리들의 감정을 담아 두는 마음 형편이다. 늘 출렁거리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생명이다. 마음을 잘 다독이며 평상심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적 가치 안에서의 평온, 자신만이 가능하게 한다. 海印라는 단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한 시도 정지될 수 없는 바다와 흡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 위에 새겨야 한다. 자신의 인격을 그리고 쌓아야 한다. 성품을.... 자신에게 지독해야 할 일이다. 철쭉밭으로 내려섰다. 꽃 길이 걸음의 쉼을 부추긴다. 다가 가 석양의 빛이 없는 것을 대신하여 마음으로 감싸며 철쭉과 어울리다 내려왔다. 봄의 시선을 거두고 산성 밖으로 나왔다.
첫댓글 참으로 시적인 글이에요 사진도 정말 마음에 듭니다
過讚이시라~ 쑥스럽고 그렇습니다. 5월에 뵙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