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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봉문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그의 부친 윤사우(尹仕佑)는 경북 영일군 사람이었는데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 영세하게 되었다. 신자가 된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現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 살았는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마도로 피신 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윤사우는 거제도에서 날품팔이와 필묵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서 동수(洞首-洞長)로 있던 진진부(陳進富)를 알게 되었고 열심 권면하여 그를 입교시키게 되었다. 한편 신자가 된 진진부(요한)는 윤사우의 둘째 아들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그가 윤봉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순교자는 옥포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윤봉문의 체포와 순교는 1888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의 결과로 공적으론 신앙이 허용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즉 1886년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수교(修交)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골의 교우들은 이 사실을 알리 없었고 지방의 관리들도 신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에 윤봉문의 순교가 가능했던 것이다.
1888년 2월 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순교자는 거제 부사(府使) 박병용(朴炳容)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官衙)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천주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통영으로 압송된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어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로 순교자를 다시 진주로 옮겼다.
윤봉문의 무덤 앞 첫 비석에는 그의 이름을 봉용(鳳用)이라고 새겨놓았고 옥포 본당 주임이었던 김후상(金厚相 바오로) 신부가 지은 ‘거제도 천주교 연혁’에도 그의 이름은 봉용으로 나온다. 봉용은 그의 속명(俗名)이었고 봉문(鳳文)은 관명(冠名), 곧 항렬을 따른 족보상 이름이었다. 몇몇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봉주(鳳周) 혹은 봉동(鳳同)으로 나오는데 봉용을 잘못 읽은 결과다.
로베르 신부의 서한집 1권
『꽁뜨랑뒤 Compte-rendu 1887~1888』에서 발췌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으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미신자(未信者)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나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흘린 윤 베드로의 피가 거제도에 많은 구원의 열매를 싹트게 하리라고 희망할 만한 여러 가지 조짐이 있습니다.
이 서한에서 로베르 신부는 윤봉문의 세례명을 ‘베드로’로 적었다. 그래서 훗날 그의 세례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편지 원문에는 ‘요셉’으로 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편지를 ‘꽁뜨랑뒤 잡지’에 올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바뀌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신은근 신부)
병인치명사적 18권
윤 요셉. 본디 양산 사람으로 거제에 와서 살더니, 무자년(1888년) 사군난(私窘難)에 통영 포교에게 잡혀 중영(中營. 군인들 감옥)에 갇혔다가 진주 진영으로 이수(移囚)하였더니, 영장(營長) 구연팔이 잡아 들여 물어 가로되 “너 무엇을 하느뇨” 답 왈 “천주교를 합니다.” 영장이 또 문 왈 “너 천주교를 하면 읽어보라.” 하거늘 천주 십계를 읽으니, 영장이 또 문 왈 “너 천주교를 누구에게 배웠느냐.” 요셉이 답 왈 “양대인(洋大人)에게 배웠습니다.” 영장이 또 묻기를 “그러하면 진서를 배웠느냐 언문으로 배웠느냐.” 하고 또 묻기를 “너 그러면 진서를 배웠거늘” 요셉이 대답하기를 “언문으로 배웠습니다” 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언문으로 배웠으면 가짜를 배웠구나” 하고 또 가로되 “너는 웃관(上官)에서 도적으로 죽이라 분부가 있는 고로 내가 죽이겠다” 하니 요셉이 대답하기를 “지금 천주교 하는 사람을 죽일진대 영문(營門)으로 초문(初問)하여 회문(回聞) 후에 죽이주소” 하니 영장이 대답하기를 “네 말이 쓸데없다” 하고 오문(午門. 성의 남쪽 문)으로 보내어 가둔 후에 모든 하인에게 분부하여 가로되 “이 일을 누설치 말라” 하고 옥중에서 가만히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요, 때는 무자년 2월 21일이라.
증인(證人) - 동진규. 외인(外人) 진영(陣營) 장교(將校)라. 지금 살고 이 사정은 진주 비라실 장(張) 도민고가 동진규에게 친히 들었느니라.
하느님의 종 124번
윤봉문(尹鳳文)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통영시 이운면)에 정착하였다. 요셉의 부친 스타니슬라오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 담임 로베르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요셉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였고 교리 교육과 공소 예절을 도와주었다. 그 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개월이 안 된 이듬해 그곳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함으로써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박해였다. 이 박해 때 요셉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관장이 강요하는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요셉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봉문 요셉은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계명을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하옥시킨 뒤 그날 밤으로 옥리들을 시켜 교수형을 집행토록 하였으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로, 당시 요셉의 나이는 36세였다.
요셉이 순교한 뒤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저에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서이말에 은둔 중이던 한정선(바오로)과 일운면 삼거리에 거주한 강도찬(시메온) 그리고 함안에서 지세포 고래실(메뚜기골)에 정착한 김무연(마가리오) 등 세 명의 신자가 지세포지역에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이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지세포지역의 신자들은 미조라공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923년 가을, 후에 전주교구장이 되신 김양홍(스테파노) 신부는 지세포지역에 공소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고래실 김무연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다가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공소신축기성회를 조직하여 1926년 지세포리 대동마을에 흙과 돌로 벽을 쌓은 아담한 초가공소를 신축하여 봉헌하였고, 초대 공소회장은 조사숙(요셉)이 임명되었다. 이후 1926년부터 김후상(바오로) 신부의 열심한 선교활동에 힘입어 1929년경에는 신자수가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신자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으로 1956년경 신축 공소에서 동쪽방향으로 약 500M 아래인 대동마을 890번지에 위치한 대지 550여 평을 확보하여 매입하였다. 신자들은 이 땅에 새로운 성전을 건립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노력 때문에 후에 성전 건립 때 큰 보탬이 되었다. 삼거리(당시에는 행정구역상 일운면으로 소속)에 경당이 있었으며 구조라, 망양에도 공소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김효 베르나르도 주임 신부님과 기념촬영)
1993년 10월 제2대 주임 이재열(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설립1주년 기념미사 봉헌 및 축하행사를 하였고, 화해와 쇄신 연수 및 활발한 레지오 활동과 가두선교운동을 하면서 신자증가운동을 실시하였다. 지하에 마련된 수녀원에 습기가 너무 많아 어려움을 겪던 중 성당 뒤편에 있는 부지를 매입하여 새 수녀원을 준공하였다. 이후 제3대 주임으로 김한주(마르코) 신부가 부임하였고, 제4대 주임 이원태(클레멘스) 신부가 부임한 후 본당의 어려운 재정으로 인하여 1999년 2월 더 이상 수녀를 상주시키지 못하고 본원으로 철수하게 되는 안타까움을 겪었다. 2002년 2월 제5대 주임 이정근(요한) 신부가 부임하면서 조금씩 활력을 찾기 시작하였다. 제대회 창립, 레지오 부활, 성가대 창립, M.E교육 참가 등을 통하여 신앙쇄신에 노력하였고, 주변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조금씩 신자가 늘어남으로써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하여 신자들이 본당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로 인하여 성당지붕이 완전 파손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지하 강당에 임시성전을 마련하고 성전복구를 위한 신자들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물품과 성금을 보내어 왔고 신자들은 그 물품을 가지고 성당 마당과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온갖 노력을 하면서 성전복구를 위하여 땀을 흘렸는데, 태풍 ‘매미’로 인하여 많은 고충을 겪었지만 오히려 신자들의 결속에는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성전보수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층 성가대 증축과 함께 성전보수공사를 시작하는 한편 잃은 양 찾기운동과 고리기도 실시, 성령세미나 등을 통하여 성전보수공사로 인하여 힘든 신자들의 마음에 활력을 일으켜 주었다. 마침내 2004년 5월 23일 박정일 주교의 주례로 태풍피해복구 감사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소시절 사용하던 종을 성전입구에 설치하고 최재상(마티아) 신부의 작품인 14처(십자가의 길) 설치로 더 운치있고 아담한 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5년 1월 제6대 주임 최태준(필립보) 신부가 부임하면서 소년 쁘레시디움을 창설하는 등 주일학교 활성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0월 2일 예구공소설립11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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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공소 회장 제1대 조사숙(요셉), 제2대 채덕이(요한), 제3대 조명재(안토니오), 제4대 김수용(마리오) 제5대 김병오(요셉), 제6대 주덕민(요셉), 제7대 장영도(요셉) 당시 공소는 부산교구에 소속되어 있었고 1966년 마산교구가 설립된 후에 마산교구에 소속되었는데, 처음에는 명진성당(현 거제성당) 소속으로 있다가 장승포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장승포성당 관할공소가 되었다. 장승포성당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임신부가 방문하여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던 중 1985년경에는 해성고등학교 교목으로 조재영(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면서 지세포공소에 약 1년간 상주하면서 매주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 후 전신자들의 성전 건립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기도와 노력의 결실이었다. 마침내 성전 건립의 염원이 현실로 다가와 타당성 조사를 마치고 1991년 7월 초대 주임으로 이재철(아드리아노) 신부가 부임하면서 지세포공소는 공소시대를 마감하고 준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재철(아드리아노) 신부는 새성전신축을 위하여 성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공소로 사용하던 건물과 땅을 팔고 신자들로 하여금 1인 1구좌(400,000원) 봉헌을 하도록 하여 마침내 성전부지를 매입하였다. 곧이어 새성전 설계를 시작하였고, 1992년 3월 31일 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의 주례로 성전 기공식을 가지게 되었다. 기공식 이후 성전 건축을 위한 전신자들의 기도와 노력의 결과 1992년 10월 28일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되는 큰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평화의 모후 꾸리아 창단(8개 쁘레시디움), 울뜨레야 창단 등 신자들의 열심한 생활과 노력으로 본당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3월에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에서 전교수녀를 파견함으로써 이 지역의 복음화에 더한층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녀들은 시골 노인들을 위하여 한글교실을 개설하여 비신자들한테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성전신축이 끝난 후에도 성전부지 확장을 위하여 유자청 제조판매와 음식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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