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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사우회 1박2일 문화탐방 종가고택 체험
경향신문 사우회는 지난 8월 30일, 31일 1박 2일 일정으로 영주 안동일원의 종가고택 등을 둘러보는 문화역사탐방행사를 가졌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값진 여행이었다. 먼저 경향사우회 유사 이래 최초로 이루어진 이번 문화역사 탐방이 성사되기까지 각별한 성원을 아끼지 않은 이원창 회장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면서 1박 2일 동안 느끼고 맛본 기쁨을 단편적으로 나마 회고해 본다.
역사공부 많이한 소수서원, 부석사
우리 일행은 8월 30일 오전 10시 52분 청량리역 출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오후 1시 24분 풍기역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무궁화 관광버스로 처음 찾은 곳은 순흥 전통 묵집, 풍기 인삼 막걸리를 반주로 묵사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니 입맛 또한 개운하기 이를 데 없다.
뒤이어 찾은 명소는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명종 5년(1550년)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합법적이고 정책적인 지원책을 조정에 건의한 결과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니 조선조 최초의 "사학(私學)"이 된 연유다.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이다.
부석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 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고찰이다. 창건 후 고려 초기 쯤 한 차례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석사의 크고 작은 건물 중에서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과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이 잘 알려져 있다. 무량수전은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석사 경내의 가장 큰 풍광은 뭐니 뭐니 해도 부석사가 앉은 자리, 소백산 연봉을 바라보는 시야가 장관이다.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당나라 처녀 선묘간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의상은 699년 불법을 닦으러 중국에 도착해 어느 불교신도 집 에서 묵었는데 선묘는 그 집의 딸이었다. 사랑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의상이 불법 정진을 위해 선묘를 멀리하면서 헤어지게 됐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부석사의 안양루엔 방랑시인 김삿갓(金炳淵 : 1807~1863)이 말년에 이곳 경치에 감탄하며 지은 시가 걸려있다.
平生未暇踏名區(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白首今登安養樓(흰머리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江山似畵東南列(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天地如萍日夜浮(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安貧樂道의 삶을 살며 해학과 풍자로 자신을 위로 했던 김삿갓이 이곳 부석사에서 느낀 소회가 심금을 울린다.
고색창연한 무섬마을 종가고택
해질 무렵 우리일행이 도착한 곳은 영주 무섬마을, 김지영 회우(전 경향신문 편집인, 현재 동양대학교 교수)가 기거하고 있는 해우당(海愚堂)이 자리한 마을, 보고 또 봐도 예스러움이 물씬 풍겨나는 고택들이 눈길을 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원래 이름이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는 매화꽃이 피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 하여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힌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入鄕祖)인 박수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 후 박수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대(臺)가 영조 때 다시 무섬에 들어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해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한 이 마을엔 해우당(海遇堂), 만죽재(晩竹齋) 김규진가옥(金圭鎭家屋), 김위진가옥(金渭鎭家屋)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엔 김지영 회우의 증조부인 김화진이 주도한 치열한 항일투쟁 마을로 이 작은 마을에서 다섯 분이나 건국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해우당(海愚堂)은 마을에서 가장 큰 선성김씨(宣城金氏) 가옥으로 김대의 손자 영각이 1836년 건립하고, 1879년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金樂豊 ,김지영 회우 5대조부)가 중수, 1990년 도 민속자료 제92호로 지정됐다. 역시 □자형 구조이며, 전면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사랑과 아랫사랑을 뒀다.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현재 이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다리는 무섬교 외에 수도교가 하나 더 있는데 1983년 이전까지는 세로로 쪼갠 통나무 수십 개로 이어놓은 외나무다리가 유일한 외부연결로였다고 한다. 외지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꽃가마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넌 후 죽어 상여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넌다.’는 말이 나올 만큼 외부와 단절됐던 곳이다.
추억 듬뿍 안겨준 해우당 만찬
무섬마을에서 김지영 회우가 베푼 안동 간고등어 반찬을 곁들인 저녁은 생각할수록 군침이 돈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해우당 대청마루에 김지영 교수가 차린 주안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산 술병에 와인(우찬웅 회우가 지참), 막걸리와 캔 맥주, 가진 음료수들이 즐비한 대형 테이블엔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문어회 성찬이 백미였다.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에 모두들 감격 또 감격이다.
한창 술잔이 오가고 돌아가며 외친 건배사는 경향사우회 대화합의 한마당 잔치 바로 그것이었다. 마치 치밀하게 준비된 건배사인양 저마다 덕담이 오가는 가운데 이원창 회장이 긴급 제안한 노래자랑이 또한 흥을 돋 꾼다.
다음 날 아침식사는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별천궁 식당에서 간고등어 정식으로 구미를 돋웠다. 간 고등어도 일미였지만 식당 주인의 색소폰 연주가 더욱 심금을 울렸다. 비교적 조경에 신경을 쓴 식당 주변에다 노래방을 뺨칠 정도로 잘 꾸며진 방안의 연주공간이 손님들을 매료 시키고도 남을 만했다.
가장 오래된 봉정사 극락전
간고등어 반찬에 색소폰 연주에 마냥 심취할 수만은 없어 서둘러 차에 오르니 어느새 봉정사. 여성 해설사 박순화 씨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봉정사는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 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몇해 전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사찰로도 유명세를 더해준다.
한결 깨끗해진 안동 하회 마을
봉정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안동 하회 마을로 향했다.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며 물돌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마을주민의 70%가 류 씨이다. 하회마을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2005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문지로 국제적인 매스컴에 오르기도 했다. 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기인 '징비록'과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고택 중 양진당이라는 입암고택은 풍산 류씨 겸암파의 대종택으로 보물 제306호이다. 사랑채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어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하회마을 또 하나의 보물은 충효당, 보물 414호로 서애의 문하생들이 장손 류원지를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류의하에 의해 중수된 조선시대 사대부 양식의 고택이다.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이지만 다 돌아 볼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600년 뚝향 나무, 주촌종택(周村宗宅)
이어서 찾은 주촌종택(周村宗宅)은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의 대종택, 천연기념물 제314호로 지정된 600여 년 된 뚝향나무가 더욱 신기했다 조선 세종(世宗,1397~1450) 때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정(李禎)이 약산산성 쌓기를 마치고 귀향하면서 향나무 세 그루를 옮겨와 그중 한 그루를 본가에 심은 것으로 여늬 향나무와 비슷하지만 원줄기와 가지가 위로 자라지 않고 수평으로 퍼지는 것이 특징이다. 600년의 세월을 기둥에 두른 채 뻗어 나간 모습에 오랫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주촌(周村)은 진성이씨 가문이 600여 년간 대를 이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시조인 이석(李碩)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말년에 어지러운 풍파를 피해 ‘물러나 지킴’이라는 삶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방이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안락하게 자리해 있고, 주촌종택 약 300미터 아래쪽엔 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장처로 알려진 고택 한 채가 보인다. 동행한 진성 이 씨 가문의 이 선 회우에 따르면 이 마을은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장처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퇴계 이황선생의 도산서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이날 오찬은 까치구멍집 헛제사밥. 제사음식을 빼 닮은 탕과 반찬이 식욕을 돋 꾼다. 왜 까치 구멍집인가 했더니 식당을 새로 짓기 전에 있었던 집이 바로 까치구멍처럼 생긴 초가집이어서 그렇게 명명했단다.
이날의 마지막 코스는 도산서원, 사적 제170호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한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에 지어진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退溪) 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기록을 보니 1575년에 한석봉이 쓴 "陶山書院(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들른 퇴계 종택, 조선 중기의 대학자 선생의 학덕이 존경스럽다. 선생은 자신의 호를 왜 퇴계(退溪)라 했을까. 퇴계가 살던 고향의 시내 이름 토계(兎溪)를 퇴계로 고치고 자호로 삼았는데 산수와 하나가 되고자 했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퇴계는 평생을 나아가기보다는 물러나가를, 드러나기보다는 숨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身退安愚分 /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學退憂暮境( 학문 퇴보하니 늙으막이 걱정스럽네/溪上始定居 ( 퇴계의 가에 비로소 거처 정하고)/臨流日有省 (시냇물 굽어보며 날로 반성하네.) 바위에 새겨진 선생의 시가 ‘退溪’의 겸허한 삶과 선비정신을 일깨워 준다.
이번 경향사우회 1박 2일 문화탐방은 안동 역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저녁식사로 준비한 도시락 맛도 꿀맛, 한마디로 눈과 귀와 입이 즐거웠던 종가고택 체험은 마냥 신명나고 유익한 여정이었다. 이번 행사의 모티브를 제공한 '해우당 선비' 김지영 교수의 과분한 접대에 거듭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행사에 참가한 회우는 아래와 같다.
강남기 김홍운 맹태균 박우학(부부동반) 원종선(부부동반) 우찬웅 이선 이원창(부부동반) 이정세 임상학 장옥 전철수 정운종 최귀조(이상 가나다 순)<정리 정운종>
첫댓글 경향 사우회 문화탐방 기행문 쓰시느랴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너무나 상세히기록 현장을 보는듯 함니다 최귀조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해우당 보일러방 정말 감사했습니다. 보람찬 한주 되시기바랍니다.
정운종
정운종 선배님의 자세한 탐방 기사를 읽으니 현지에서 지금 체험하고 있는듯 합니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은 추억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