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수요일 말씀(판관 13, 2-7. 24-25;루가 1, 5-25) 이사악, 야곱, 사무엘, 삼손, 세례자 요한, 이들은 모두 아기를 못 낳 는 부부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인물들이다. 기나긴 세월 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바래서 얻게 된 아들들이다. 간절한 소원이 이루 어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 부모의 심정은 상상 만 해도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환호성을 올려야 할 기쁨의 정점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아니 게 다가 믿을 수 있는 징표까지 달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기운이 빠 지시겠나? 주님은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들려주려고 천사를 파견하셨다. 아무 데 서나 아무 때에나 그런 엄청난 소식을 듣게되면 혹시나 못 믿어워할까 봐 장소와 시간도 용의주도하게 선택하셨다. 일생에 한번 걸릴 듯 말 듯 한 분향의 행운까지 얻은 거룩한 예배시간에, 천사가 나타나기에 적합 한 성전 깊숙한 지성소에서, 최고 행복의 전언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닌 구세주의 길을 준비할 하느님의 특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민족 전체가 고대하던 아기였음을 알았을 것이다. 즈가리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사제였기 때문에 천사의 실망 은 더욱 컸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러나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된 것은 당연한 일로써 벌이 아닐지도 모른 다. 그렇게 오랜 세월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살았건만 정작 하 느님의 전능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의 참회 의 기간은 아니었을까?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동안 내내 정말로 입이 있 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즈가리야를 비웃기는 쉽지만 나 역시 간구하는 내용이 정작 이루어질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때가 얼마나 되는지... 그 시기와 방법 은 주님께서 선택하신다는 생각은 물론 가져야 하지만(내가 하느님이 아 니므로...) 어느 때는 하느님이 들어 주실 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습관 적으로 기도문을 중얼거릴 때가 더 많다. 그 긴 침묵의 기간의 참회는 아기가 태어나고도(하느님의 약속의 실현 을 눈으로 보고도) 다시 팔일 동안이나 지속된다. 그리고 터져 나온 찬 미가, "즈가리야의 노래"는 ’아가야’(1,76)에서 목이 메어 눈물바다 가 되었을 것 같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도 가슴 벅차게 불러야 할 ’아가 야’다.오늘 즈가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아기 예수를 기다리 고 있는지...’ ’아기 예수는 정말 오시리라고 믿고 있는 것인 지...’ ’건성으로 전례에 참례하는 것은 아닌지’ 새롭게 점검을 해봐 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