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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주대학교대학원 동양학과(역리학)과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겸사이시송
최항(崔恒)의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경국대전》은 조선의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 등 9인이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 사자조(寫字條)에, ‘왜학(倭學)은 《이로파(伊路波)》, 《소식(消息)》, 《서격(書格)》, 《노걸대(老乞大)》, 《동자교(童子敎)》, 《잡어(雜語)》, 《본초(本草)》, 《의론(議論)》, 《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정훈왕래(庭訓往來)》, 《응영기(應永記)》, 《잡필(雜筆)》, 《부사(富士)》로 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이로파》, 《소식》 이하는 대부분 국속(國俗)에 관한 비천한 책이고, 호어(胡語)에 관한 책인 《노걸대》가 뒤섞여 있어서 애석하게도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에 관한 여러 책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극증(李克增)의 《대전속록(大典續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대전속록》은 조선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 등 8인이 함께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의 대사객조(待使客條)에 왜인을 접대하는 규례가 있고, 제5권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왜인들이 가지고 오는 잡물(雜物)을 포소(浦所)에서 몰래 무역한 사람 및 그 실상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통사(通事)는 《경국대전》의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의거하여 논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경국대전》은 세조조에 편찬하도록 명하여 성종 2년(1471) 신묘에 이르러서 완성하였고, 《대전속록》은 성종 24년(1493) 계축에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에는 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으며, 정조(正祖) 갑인년(1794, 정조18)에 이르러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어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 크게 갖추어졌다.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이 편찬하였다.” 하였다. 《상동》
신용개(申用漑)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남곤(南袞)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정덕(正德) 9년(1514, 중종9)에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신용개 등이 찬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정덕 9년은 바로 중종 9년 갑술인데, 신용개가 남곤 등과 함께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봉사어록(奉使語錄)》
○ 고려 김부식의 《봉사어록》은 1권이다. 《송사(宋史)》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徵毖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징비록》은 조선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이 지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상은 사류(史類)이다.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 《고려사》를 보면, 권근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입학도설》을 지었다. 《경의고(經義考)》
고려의 《박학기(博學記)》
○ 주(周)나라 세종(世宗) 때 수부랑(水部郞) 한언경(韓彦卿)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한언경이 《박학기》라는 책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3백여 가지의 일을 베꼈는데, 지금 천부(天部) 가운데에서 7가지 일을 초록(抄錄)하였는바, ‘하늘을 가려 걷기에 장애가 되는 것[迷空步障] -안개[霧]를 가리킨다.-, 두려운 가루[威屑] -서리[霜]를 가리킨다.-, 물이 맺힌 것[敎水] -이슬[露]을 가리킨다.-, 얼음의 아들[冰子] -우박[雹]을 가리킨다.-, 공기의 어미[氣母] -무지개[虹]를 가리킨다.-, 금가루를 뿌린 것[屑金] -별[星]을 가리킨다.-, 가을 하늘의 큰 노인[秋明大老] -은하수[天河]를 가리킨다.-’이다. 《청이록(淸異錄)》
김시습(金時習)의 《유금오록(游金鰲錄)》과 《관동일록(關東日錄)》
○ 조선의 《매월당시권(梅月堂詩卷)》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 안에는 《유금오록》과 《관동일록》이 있는데, 대부분 신라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단종조 사람이다.
백제의 천문서(天文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에서 승려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서를 보내자, 대반촌주(大伴村主) 고총(高聰)으로 하여금 천문(天文)을 배우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사(高麗師)의 《성요서(星曜書)》
○ 《성요서》는 고려의 국사(國師)가 찬한 것인데, 국사에게서 얻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고려일력(高麗日曆)》
○ 수술가류(數術家類)에는 《고려일력》 1권이 있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 한계희(韓繼禧)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다.- 가 지은 《중간신응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 6년(1475)에 예조에 명하여 의교(醫敎)를 엄하게 하는 데 관해 신칙하고 침구전문법(鍼灸專門法)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술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자질이 밝고 민첩한 자를 뽑아 제자로 삼아, 권장하고 격려하는 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의 승려 양심(良心)이란 자가 《신응경(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겸하여 일본의 신의(神醫)인 화개씨(和介氏)와 단파씨(丹波氏)의 종기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팔혈법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신응경》은 전수된 것이 멀리 근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논한 절량보사법(折量補瀉法)은 모두 옛날 현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혈(穴)을 취한 것도 대부분 옛사람이 미진하였던 부분을 계발한 것들이며, 혈을 드러낸 것은 모두 요체를 뽑아내어 많은 효험을 얻은 것들입니다. 글은 간략하면서도 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바, 사람들이 책을 펼쳐 보면 잠깐 사이에 증세와 혈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팔혈법을 《신응경》 끝에 붙여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하였으며,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의료(醫療)의 처방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하거나 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약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자못 많은바, 대개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 모두 중국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아닌 탓에 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하더라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모두 진짜와 가짜, 묵은 것과 새것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아랫사람들이나 먼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시 두루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침과 뜸의 처방은 재물을 허비하면서 멀리까지 가서 구하는 수고나 채집하여 말리고 조제하는 어려움이 없이 침 한 방 뜸 한 번에 모든 처방이 다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손바닥 사이에서 운용하고 담소하는 사이에 판별되어 빈부귀천이나 원근 완급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험을 보는 것이 항상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공용(功用)의 신묘함을 다 말할 수조차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용렬한 의원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모욕하면서 쓰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淫祀)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런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전문(專門)을 설치하고 과정(課程)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먼 외방에서 와서 바친 것이 진기하여 완상할 만한 이상한 물품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신묘한 처방이었는바, 이를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 바쳐 백성들을 아끼고 만물을 사랑하는 성상의 성대한 덕에 부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성화(成化) 10년(1474, 성종5) 11월 21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신(臣) 한모(韓某)는 삼가 서합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9년(1473, 성종4)은 일본의 후토어문원(後土御門院) 문명(文明) 5년인데, 이때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통(畠山義統)이 신농국(信濃國) 사람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양심은 중이면서 의원인 자이다. 화개씨(和介氏)는 화기씨(和氣氏)로, 화기시우(和氣時雨)와 단파강뢰(丹波康賴)가 모두 의술로 이름을 드날렸으며,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의술이 더욱더 정밀해졌다. 대개 삼장지방(三藏之方)이나 팔처구법(八處灸法)은 모두 신대(神代) 때부터 전해져 온 법이다.” 하였다. 《상동》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동의보감》은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찬한 책이다.
살펴보건대, 조선의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허씨(許氏)는 또 세족(世族)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허봉(許篈)과 허성(許筬), 허균(許筠) 삼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의 누이동생 경번(景樊)은 재주와 명성이 오빠들보다 위로, 중국 북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출한 집안이다.
동의(東醫)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의 의술이란 뜻에서 동의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이동원(李東垣)이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라는 이름으로 강주(江州)와 제주(淛州)에서 행세하였고, 주단계(朱丹溪)가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라는 이름으로 관중(關中)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지금 양평군은 궁벽한 번방에 살면서도 능히 책을 지어 중국에서 행하니, 전하기에 족한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보감(寶鑑)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햇빛이 뚫고 나오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몸 안이 속속들이 다 보이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면 환하게 빛이 비치는 것이 거울과 같게 해서이다. 옛날에 나익지(羅益之)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어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을 삼으면서 과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가만히 논해 보건대, 사람은 오장(五臟)이 있고 병은 칠정(七情)에 그친다. 그 사이에는 품부받은 것에는 치우치고 온전한 차이가 있고, 감염된 정도에는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며, 증세에는 통하고 막힌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짚어 보면 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의 삼부(三部)가 있는바, 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밭이랑을 가르는 것과 같아 뛰어넘을 수가 없으며, 횃불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황(大黃)이 체한 것을 내리게 한다는 것만 알고 속을 차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한 기력을 보한다는 것만 알고 독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면 구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치료하고, 이미 병이 생긴 이후에는 치료하지 않는 법으로, 병이 이미 발생한 뒤에야 비로소 치료한다면 이는 의술에 있어서 하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든 이후에도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니 어찌 치료될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이익을 생각하는 자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처음 의술에 종사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의술을 배우기까지 한다. 그러니 《대역(大易)》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괘와 남쪽 사람들의 항심(恒心)이 없으면 의원도 될 수가 없다는 경계는 일찌감치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가리어진 것을 제거해 준 것이다.
편작(扁鵲)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 병통이고, 의원들의 병통은 병을 치료하는 방도가 부족한 것이 병통이다.” 하였다. 그러나 헌기(軒岐) 이래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나와서 지금까지 저술한 의서(醫書)가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 안에 쌓으면 마룻대까지 닿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의서가 적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술에는 효험이 있는 것과 효험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 어찌 옛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술이 정밀하지 않으면 말이 상세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 빠져 들면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니, 이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뜻을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동의보감》을 보니 앞부분은 내경편(內景篇)으로 병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다음은 외형편(外形篇)으로 몸의 겉에 생기는 병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그다음은 잡병편(雜病篇)으로 증세에 대한 처방을 설명하였고, 끝 부분은 탕구편(湯灸篇)으로 처방을 설명하였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천원옥책(天元玉冊)》에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종인데, 대부분이 우리 중국의 의서이며 동방에서 찬한 의서는 3종에 불과할 뿐이다.
허준은 옛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의술을 따르면서 능히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밝혔는바, 둘 사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천하에 따스한 햇볕을 퍼뜨렸다. 책을 완성하고는 대궐에 바쳤는데, 도리어 책이 비각(祕閣)에 보관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구해 볼 수가 없었다.
전 차사(醝使)인 산좌(山左) 사람 왕공(王公)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월(粵) 지방에 와서는 의원들이 잘못 처방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도성에 가서 초록(抄錄)해 오게 하였는데, 미처 간행하기도 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순덕(順德)의 명경과(明經科) 출신인 좌한문(左翰文)은 내가 총각 때부터 사귄 사람인데, 《동의보감》을 간행해서 널리 퍼뜨릴 생각을 품고서 3백여 민(緡)을 쓰면서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그 마음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고, 그 일은 음(陰)과 양(陽)을 조섭(調燮)하는 일이다. 천하의 보배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니, 좌한문은 대단히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판각을 다 마치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책 끝에다가 쓴다. 원임(原任)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인 반우(番禺)의 능어(凌魚)는 찬한다. 《동의보감 서문》
살펴보건대, 《동의보감》은 선묘조(宣廟朝) 때 허준에게 명해서 찬집(撰輯)한 것으로, 모두 25권인데, 내경(內景) 4편, 외경(外景) 4편, 잡병(雜病) 11편, 탕액(湯液) 3편, 침구(鍼灸) 1편, 목록(目錄) 2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비기(祕記)
○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못 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擧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기는 바로 진(秦)나라의 녹도(錄圖)나 한나라의 부참(符讖)과 같은 것이다.
이상은 자류(子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