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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원문보기 글쓴이: 明治好太王
1. 태왕 칭호가 생긴 배경에 대하여
미천왕은 동천왕 이후 주춤했던 대외팽창정책을 펼침에 따라 화북의 강자였던 전연과 호각을 다툴 정도로 다시 일어나 전연이 고구려를 제어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성장하여 훗날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물론 국강상태왕의 전략적 실수로 후연에게 굴복하지만, 소수림태왕 때 내부를 정비한 후 고국양태왕 대에 다시 공세를 취하고 광개토태왕 대에 이르러 후연 등 주변 열국들을 굴복시켜 고구려를 동방의 그저 그런 강국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대국으로 건설합니다.
미천왕 때부터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하고 광개토태왕 대에 이루어진 대국적 위상을 바탕으로 장수태왕~ 안장태왕대의 고구려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5~6세기의 동아시아 4~5강 국가들 중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물론 안장태왕 사후~양원태왕까지는 내부적 혼란이 와서 왕권이 약해졌던 시절이 있긴 하나, 이는 주변의 북조나 남조 그리고 유목세계도 공통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평원태왕은 이러한 내부적 혼란을 극복하여 다시 왕권을 강화하고 수나라의 통일에 대비하고, 평원태왕대에 이루어진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아들인 영양태왕은 동서 6천리로 영토를 넓히고 주변의 말갈과 거란을 더욱 통제하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돌궐과 외교를 하고 결국 수나라를 4번이나 물리쳐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더 없이 높게 하여 고구려가 건재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줍니다.
평원태왕 때 부터 재강화된 왕권은 영류태왕이 연개소문에게 죽기 전까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황제나 카간 등이 생긴 배경 처럼 고구려도 내부적으로는 강화된 왕권과 대외적으로는 보다 높아진 국제사회에서의 대국적 위상으로 인해 기존의 왕 대신에 군주를 칭할 새로운 칭호가 필요했습니다. 일종의 시대적 요구입니다.
그래서 생긴 칭호가 태왕입니다.
2. 언제부터 칭태왕을 했는지에 대하여
요즘 주몽(종영)이나 바람의 나라에서는 고구려가 국초 부터 칭태왕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칭태왕은 고구려의 국력이 본격적으로 강해지는 시점에서 했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서는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으로 표기하여 태왕으로 표기 하지 않았으며 모두루 묘지명에서도 추모성왕이라 하였습니다. 비사인님의 말씀대로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은 정통성 상에서 파악하거나 태왕이라는 용어의 정립이 되지 않았을 시, 명칭이 정해졌다면,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기에 그렇게 서술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을 봤을 때 대중적으로는 고국원왕으로 알려진 국강상성태왕이 가장 이른 시기이나, 아시다시피 국강상성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만한 배경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으로는 칭태왕 한 시기는 국강상성태왕~장수태왕 때 까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 봤을 때 입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 당할 때 소실 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구려 자체 기록에는 장수태왕 이후에도 꾸준히 칭태왕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유물들이 나오면 더욱 좋겠지요.)
일부에서는 안원~양원태왕 대에는 고구려의 왕권이 미약하여 태왕호를 일시 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주변의 북조나 유목세계를 볼 때 군주의 권한이 약해졌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황제라거나 가한 칭호를 버리는 경우는 없던 걸로 봐서 고구려의 태왕칭호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고,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보다 높아졌을 평원태왕~영양태왕 때에도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영류태왕대의 고구려는 국제적 위상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왕권은 강했으므로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이며, 보장태왕도 안원~양원태왕과 마찬가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안장태왕, 안원태왕, 영류태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았으므로 태왕이란 칭호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이 3명의 군주들은 장지명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시호를 제대로 받았으므로 태왕이라 불러도 무리 없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군주들을 ~왕, ~성왕, ~명왕, ~대왕으로 칭함으로 왕 앞에 붙는 글자들은 단순히 왕을 띄우는 미칭으로 보이나, 모두루 묘지명에서 보여지듯 최소한 국강상태왕 이후 태왕 칭호가 처음 쓰였고 이후 장수태왕대의 금석문인 중원 고구려비나 서봉총에서는 태왕 칭호가 고정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수태왕대에 완전히 고유명사화 되었다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태왕 칭호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고유명사화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SHaw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광개토태왕비에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왕을 그냥 왕(王)이라고 부른 것이 13번 이며 태왕(太王)이라고 부른 것은 3번,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부른 것이 4번입니다.
또한 太王의 준말로 王이라 썼다면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자국의 지배자를 王이라 불렀을 때 이미 그 안에는 타국의 지배자보다 높은 어떤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기에, 고구려에서 太王이 王의 상위 계서로 설정되었다는 스토리라인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王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또 太王을 만든 것이 아니라 종래에 王으로 불렀던-존재했다면- 국왕 이외의 다른 세력가를 격하시키거나 王자체의 격을 높여서-太王으로- 사용함으로서 기존 계서관과 새로운 상황을 합치시켰다고 하겠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태왕과 왕을 혼용(태왕=왕)하고 있고, 타국 군주 호칭을 격하(대표적인 예로 百殘主) 시켰습니다. 그러나 장수태왕 대에서는 중원 고구려비와 서봉총출토은합호명 그리고 용성왕 풍군에서 보여지듯 태왕 칭호가 고유명사로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왕칭호는 고구려문명권에서의 최고 지도자 명칭으로 그 증거로는 고구려 문명권 안에 있었던 신라의 칭태왕을 들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법흥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다는 것으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의 제후가 다스리는 속국이 아니라 신라 또한 고구려의 태왕과 대등한 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구려의 태왕 칭호는 유목국가의 카간칭호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 듯 그리고 모즉지 매금왕(법흥태왕)에서 보여지 듯이 신라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王을 칭했다고 왕이 한 번에 신라 군주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 아닌 것 처럼 한 번에 고유 명사화 된 것이 아니라 국강상태왕~광개토태왕 까지는 왕에서 태왕으로 고구려의 군주칭호가 바뀌는 과정으로 혼용이 불가피하였으며 장수태왕대에 이르러서야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3. 태왕의 의미 - 인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김용만 선생님 글 인용)
중원인들은 천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였고, 황제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황제란 말은 진시황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인간 영웅들인 3황 5제에서 각기 글자를 따온 것이다.
황제란 말은 흔히 우리가 나폴레옹 황제, 로마 황제란 표현을 쓰듯이 왕중왕의 의미, 즉 제후국이 아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제국이란 것이 어찌 중원을 통치한 자만이겠는가. 북방 유목제국에서는 선우, 가한 등의 최고 통치자가 있었고, 이들의 위상은 황제와 같은 왕중왕임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좌현왕, 우현왕의 보좌를 받는 흉노 선우의 위상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흉노를 비롯한 유목제국들은 그들의 최고 지도자에 대해서 신의 아들이란 생각을 가졌다. 그것은 곧 중원인들이 말하는 천자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를 비롯한 동방지역에서는 이런 생각이 없었을까. 어찌 없었겠는가.
고구려의 왕실은 천자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황천의 아들 추모왕. 이것이 광개토태왕릉비에 보이지 않는가. 일월지자 하백지외손. 이것은 모두루묘지명에 보이는 것이다.
천손사상도 천자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 천자, 천손 사상에 대해서는 고구려연구재단에서 나온 고구려 개설서를 보면, 김일권 선생의 글이 있다. 참고 요망)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는 무엇을 최고 통치자라 불렀는가. 그것은 바로 태왕이다.
사기 봉선서, 회남자 등에 보면 천일, 지일, 태일이란 말이 흔하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세상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로 보았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태일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天一, 地一, 太一
이 가운데 천일은 하늘이다. 하늘의 왕은 곧 천왕이다. 천왕은 곧 신이요, 태일을 낳게 해주는 존재다. 고구려 사람들은 천왕을 바로 해모수라고 생각하였다. 해모수가 곧 천왕랑이다.
그리고 땅은 지왕이 아닌 地神이라고 보았다. 천왕과 지신. 이것이 바로 천왕지신총 벽화무덤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제 천왕의 아들인 인간의 왕은 곧 태왕, 즉 온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의 태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원식의 황제라는 짜집기 말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에서 나온 태일의 왕, 즉 인간 세상에 최고 존귀자라는 태왕이란 말은 쓴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태왕이란 말이 보이고, 모두루묘지명 등에는 聖太王, 好太聖王이란 말이 보인다.
태왕 가운데에도 가장 성스러운 왕. 그것이 고구려 사람 모두루 눈에 비춘 광개토태경평안호태성왕이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고구려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태왕이란 의미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왜 우리는 황제를 칭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자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바보인 셈이다. 우리 카페에 가끔 글을 남기는 김태식 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도교신학을 모르기 때문에, 태일이 뭔지 모르니까 자꾸 딴 소리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도교신학이란 말은 아직 쓰지는 않지만, 고대 동아시아 종교사상의 흐름을 한번 둘러보면, 왜 고구려인들이 태왕이란 말을 사용하였는지를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고구려의 발견]에서 광개토대왕이란 말보다는 태왕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나, 서길수 교수님이 계속해서 광개토태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우리식 관점을 제대로 갖추려는 첫 걸음인 것이다.
고구려가 황제국이냐, 제후국이냐는 문제에 집착하는 자들이 거듭 고구려왕을 황제라고 자꾸 주장하고 있고, 또는 열제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자. 고구려는 중원문명을 잘 알고 있고, 그 영향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문명이 본바탕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축적된 자기 사고방식에 의해서 천자사상, 태왕 개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에 나오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부디 아무리 익숙한 말이라도, 중원인들이 짜집기 해놓은 황제란 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태왕이란 말을 더 즐겨사용하기 바란다.
4. 고구려의 제후
1) 금석문
① 유주자사진 무덤명: (전략)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기를(후략)
② 고자묘지명: (전략)19대조는 고밀이니 후한 말에 연군을 격파해 본국을 보존하는 데 공로가 있어 왕(王)에 봉해졌으나 세 번이나 거듭 사양하면서 받지 않고 고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후략)
2) 삼국사기
① 다물국왕(혹은 다물후) 송양: 동명성왕조 2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왕은 그 곳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그 곳의 주로 삼았다.
② 낙씨왕: 대무신왕조 5년 7월 (전략) 이에 만여 명과 더불어 내투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낙문이 있으므로 낙씨란 성을 내렸다.
③ 양국군 추안: 신대왕조 2년 (전략) 왕은 곧 그에게 구산뢰, 누도곡의 두 곳을 주고 이내 그를 봉하여 양국군이라 하였다.
④ 안국군 달가: 서천왕조 11년 10월 (전략)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달가로 안국군을 삼고 중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겸하여 양먁의 여러 부족을 통솔케 하였다.
⑤ 용성왕 풍군 풍홍: 장수왕조 26년 3월 (전략) "용성왕 풍군이 이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사마가 얼마나 피로하겠느냐?"(후략)
3) 일본서기
① 대흥왕(大興王)?: 추고천황 13년 4월 (전략) 고구려의 대흥왕은 일본의 천황이 불상을 만든나는 것을 듣고, 황금 300냥을 바쳤다.
- 종례에는 일본서기의 대흥왕을 영양태왕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영양태왕이 아니라 영양태왕의 동모제일 수도 있다는 추정도 조심스레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름 근거를 제시하자면 영양태왕의 이름은 大興이 아니라 大元으로 元과 興의 생김새가 비슷하지도 그렇다고 한자의 뜻도 혼용될 정도로 비슷하지도 않기 때문에 大興이 단순히 大元의 오기라 보기 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와 왜국은 외교관계가 어느 정도 친밀해진 상태였기에 상대국 군주의 이름을 아주 틀리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적다고 생각하기에 일본서기의 대흥왕은 보장태왕의 아버지인 대양태왕(고대양)과 더불어 영양태왕의 동모제로 추정됩니다.
4) 신찬성씨록(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발췌)
① 호태왕(好台王): 손연전왕과 고려조신의 선조
② 손연전왕(孫延典王): 호태왕(好台王)의 7세손으로, 고려조신의 선조
③ 원나군(元羅郡)의 저왕(杵王): 연나왕(延拏王)과 저왕의 선조
④ 연나왕(延拏王): 고구려 원나군(元羅郡)의 저왕(杵王)의 9세 손으로 고사의 선조
⑤ 안유왕(安劉王): 하내민수의 선조
⑥ 능기왕(能祁王): 도기사의 선조
⑦ 안강상왕(安岡上王): 박수의 선조
- 안원태왕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원태왕과 관계가 있다면 김용만 선생님께서 일본서기에 나온 대흥왕은 영양태왕일 가능성 크다라고 하신 것 처럼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있어야 할 텐데 없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물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⑧구사기왕(久斯祁王)- 산성국제번 황문연의 선조
⑩부련왕(夫連王)- 박조의 선조
⑪여안기왕(汝安祁王)- 추모왕의 20세손으로 고정조의 선조
⑫일토복귀왕(溢土福貴王)- 대박련의 선조
⑬보륜왕(寶輪王)- 대화국 원사공의 선조
⑭수모기왕(須牟祁王)- 대박련의 하내국 박염부, 박인의 선조
이렇듯 고구려에도 금석문과 사서에 나오듯이 분명 제후가 있습니다. 사료들에 나오는 제후들 말고도 분명 다른 제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다양한 명칭을 한 제후들이 확인 되는데, 특히 다물국왕 송양이나 용성왕 풍홍은 양국군이나 안국군 등과는 다르게 지명(혹은 국명)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중원의 국가들(진, 제, 연등등)과 백제(면중, 도한, 팔중, 아착, 매로, 매라등등)에서도 확인 됩니다.
어쩌면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은 고구려의 지명에서 유래 한 제후들 중에는 부여, 옥저, 낙랑, 행인, 개마등등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예를 들어 행인왕, 옥저후등등...)
4세기 말 부터 국제적 위상이 커진 고구려에서 王의 상위개념의 고정 된 칭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5. 일부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와 새로운 제도에 관하여
고국천왕(故國川王): 국양왕(國襄王) 혹은 국양왕(國壤王)
동천왕(東川王): 동양왕(東襄王)
중천왕(中川王): 중양왕(中壤王)
서천왕(西川王): 서양왕(西壤王)
미천왕(美川王): 호양왕(好壤王)
고국원태왕(故國原太王):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고국양태왕(故國壤太王): 국양왕(國壤王)
광개토태왕: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안원태왕(安原太王):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향강상왕(香岡上王) 또는 안강상왕(安岡上王)
양원태왕(陽原太王):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
평원태왕(平原太王):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평강왕(平岡王), 평국왕(平國王)
영양태왕(嬰陽太王): 평양왕(平陽王), 양강왕(陽岡王)
1) 고국천왕~미천왕 때의 시호 즉 장지명을 보면 川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군주들을 일명 XX양(壤, 襄)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내 川을 뜻 하는 순수 고구려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광개토태왕의 아버지인 고국양태왕도 고국천태왕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정리하자면
壤, 襄(고구려 어)=川(한자)
- 미천왕(美川王) 경우는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는데, 美자와 好에는 공통적으로 좋다, 아름답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2) 고국원태왕, 안원태왕~평원태왕 때의 시호 즉 장지명을 보면 原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군주들을 일명 XX강상(岡上)태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근원 原을 뜻하는 순수 고구려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정리하자면
岡, 崗, 岡上, 崗上(고구려 어)=原(한자)
- 온달열전에서는 영양태왕을 양강태왕이라고도 합니다. 흔히들 이것을 오기로 보지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국강상태왕이나 광개토태왕처럼 같은 곳에 묻힌 것 처럼 영양태왕도 양원태왕과 같은 양강상이라는 곳에 묻혔기 때문에 그리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3) 故國某王
고구려에는 고국천왕, 고국양태왕, 고국원태왕으로 시호에 故國이 붙은 군주가 세 명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루 묘지명에 고국원태왕을 국강상성태왕이라 했듯이 처음부터 國자 앞에 故자가 붙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 시호에 들어간 國자에는 수도라는 뜻도 내포되어있기 국내성을 의미합니다. 모두루 묘지명이나 광개토태왕비의 국강상(국원: 국내성 언덕)앞에 없던 故자가 붙은 이유는 장수태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내성은 옛 수도가 되므로 國 앞에 故자가 붙은 것입니다. 따라서 고국천왕, 고국양태왕도 평양성 천도 전에는 고국원태왕이 국강상성태왕이는 시호로 불렸듯이 국천왕, 국양태왕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4) 고구려는 고국양태왕~장수태왕 중 어느 시기에
장지명+업적+치세+(미칭)+태왕
이라는 새로운 시호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고국양태왕 9년에 국사를 건설하고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새로운 시호제도는 고국양태왕 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소수림태왕의 율령반포 때 새로운 시호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고국원태왕의 정식 시호가 국강상태왕인 것으로 보아 소수림태왕 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호 제도의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태왕의 정식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혹은 광개토지, 대개토지)+평안 +호(혹은 성)+태왕입니다. 고구려의 이러한 시호제도는 영류태왕(영류산이 장지명) 때 까지 쓰였을 것이나, 기록의 부재로 광개토태왕 이후 군주들의 완전한 시호는 알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21대 군주를 문자왕 혹은 명치호왕(삼국유사에서는 명리호왕)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새로운 시호제도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서 나온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고구려 21대 군주의 정식 칭호는
미상(장지명)+문자(업적 혹은 외치)+명치 혹은 명리(치세 혹은 내치)+호(미칭)+태왕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문자명치호태왕으로 불 수도 있습니다.
추신: 예전에 제가 썼던 글들 붙여넣기 해서 살짝 보강, 수정, 짜깁기하였고, 더불어 김용만 선생님, 비사인님, SHaw님 글 인용하였습니다. 컴퓨터 상태(어떻게 된 게 학교 컴퓨터나 여친 컴퓨터에서도 읽히지 않네요.ㅠ 연이 닿질 않는 건가...;;)가 많이 안 좋아서 시노하라 히로카다의 박사님 논문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포멧할 때도 됐으니, 조만간 포멧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첫댓글 태왕이란 뜻은 "정계에서 은퇴한 왕"이란 뜻입니다. 사서가 입증합니다.
중원 고구려비나 울진 봉평비, 진흥태왕순수비 등 당대 고구려, 신라 금석문에서는 현역으로 나와 있습니다.^^;
근거 사서를 알고 싶군요~
저도 궁금합니다. 정계에서 은퇴한 왕이 태왕이라. 이른바 조선시대 上王과 같은 개념이겠군요. 이건 또 처음 듣는 거라서 흥미롭습니다. 어쨌든, 당대 1차 사료인 금석문의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인데 관련 사서의 내용을 좀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太王= 왕위에서 물러나, 정치에서 은퇴한 왕, 살아 있을 때 부르는 호칭. 뒤에 '살아 있는' 이란 표현을 붙이는건 좀 어패가 있습니다. 이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의미전달을 위해 붙인 것 뿐입니다.
太王= 왕위에서 물러나, 정치에서 은퇴한 왕을 부르는 호칭.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先王= 앞서 죽은 왕. 이란 개념인데, 서로 의미가 다르죠. 麗輝님 얘기하신 上王이 비슷한 의미같으나, 上王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습니다.
太王 [태왕] 태상왕(太上王) ,한자사전에서는 太上王이라 해 놨으니, 제대로 해 놨군요. 太王와 太上王의 구분은 더 연구해 봐야 할겁니다.
太王= 大王. 글쎄요. 太가 大의 의미는 포함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뉘앙스에서 약간 다르죠.
太王에 대해 너무 집착하는건 ..뭐하러 저런데 많은 신경을 쓰는지.. 그거 아니라도 연구할 대상은 쌓였으니까요.
그것은 조선시대 개념이지, 삼국의 개념은 아닙니다. 앞서 거론한 당대 금석문들은 모두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은 한창 활동할 때 만든 것들입니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태왕과 태자의 존재가 구분되었고, 삼국사기에도 장수태왕, 법흥태왕이 양위했다는 내용이 없을 뿐더러 진흥태왕이 불법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것도 말년입니다. 제 생각에는 칭호문제도 중요한 연구대상이라고 보기에 나름 공부한 것인데, 마지막 말씀은 좀 씁쓸하군요.^^;;
글쎄요.새로운 사서가 나타남에 따라, 기존의 설은 흔들릴 수 있죠. 사서의 위력을 제가 보여 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점이 고대사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통설에 반하는 획기적인 사료가 나오면 기존의 통설은 뿌리 채 흔들릴 여지가 있다는...^^; 박규호님의 입장은 중원 고구려비, 진흥태왕순수비, 울진 봉평비의 나온 태왕 관련 내용을 부정하시는 입장이신 듯 한데, 저 당대 금석문들의 내용을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사료가 나온다면 저는 학자 분들처럼 잃을 게 없는지라 주저없이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있습니다.^^ 최근에도 고조선 수도 관련해서 입장 크게 바꿨죠.^^;;
흠. 태왕의 의미가 정치에서 은퇴한 왕이라는 것은 박규호님 개인적인 견해이신지 궁금합니다. 실제 태왕이 그런 의미로 쓰인 용례가 있는지...아신다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太上王= 태상왕[太上王] [명사] [역사] 1 ‘상왕’을 높여 이르는 말.2 상왕의 앞선 왕.
상왕을 높여 태상왕(太上王)이라고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진성여왕(眞聖女王)과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정종(定宗)·경종(景宗)·성종(成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인종(仁宗)·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忠肅王) 등이 있었고, 조선시대는 태조(太祖)·정종(定宗)·태종(太宗)·단종(端宗) 등이 있었다.
위의 인용글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글입니다.
太上王= [태상왕] 선위(禪位)하여 생존(生存)한 왕을 높이 이르는 말
한자사전에 제대로 나와 있군요. 백제왕기 및 파사이사금기에 예가 나옵니다. 초고왕은 구수왕의 재위기간을 지나서, 고이왕때 죽었습니다. 구수왕에게 禪位를 한 뒤에, 사서에서 초고왕을 太王이라 부릅니다. 파사이사금기같은데서는 太君이라 했습니다.
백제왕기 仇首王(구수왕) 11년(A.D.264) 갑신 6월 왕이 죽었다. 태자 沙伴(사반)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맡을 수 없었다. 태왕(초고왕)이 명하여, 왕의 동생 古爾(고이)가 대신하여 집정하고 보좌하도록 하였다. 태자는 이내 素嬭(소내) 왕후를 취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죽으니, 마침내 大位(대위)를 결정하였다.
제가 언제 거짓말치는 것 봤나요? 인터넷에서 때론 사학과 교수도 제가 가르칩니다.
박규호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깐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의 한자사전이 어떤 책인지 모르겠지만, 태상왕이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쓰였던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개념의 군주가 그 이전 시대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 '태상왕'과 직결시켜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개념만 비슷했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겠죠. 알다시피 박규호님이 나열하신 고려시대 군주들도 태상왕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문헌 기록이『고려사』나『고려사절요』에 있나요?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역사 공부를 할때 어떤 참고문헌을 인용할 시 한자사전에서 역사적 내용을 인용하지는 않
다음사전을 통해 퍼 온 글이라서, 고려사같은 사서에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지요. 단어의 의미만 차용한다면 모를까요. 그 한자사전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인용할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정확하게 그 책의 정보(제목, 저자, 발행년도, 출판사 등)를 전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위의 글을 주욱 봤을때 태상왕이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의 개념이며, 그와 비슷한 개념의 군주가 그 이전시대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태왕 혹은 태상왕이라고 불렸을지 여부는 더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태왕의 의미를 태상왕의 의미와 동일시한 박규호님의 견해는 아직 근거가 충분치 못 하다고 하겠죠. 또 하나! 박규호님이 인터넷에서 어떤 사학과
저건 다음한자사전에서 퍼 왓습니다. 쉽게 검색됩니다.
다음한자사전이었군요. 흐음. 그럼 시중에 나와있는 권위있는 사전에서 인용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암튼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을 가르치셨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이 박규호님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만한 자랑할만한 근거일지는 모르지만 제게는 그 사학과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박규호님도 공부하는 한 사람의 학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학자들의 견해에 있어서 100% 진실만 있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경우 역시도 제게는 박규호님이 내놓으신 하나의 의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두고 저희는 박규호님이 거짓말했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단정짓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 근거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점을 참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한게 있습니다. 박규호님이 매번 인용하시는 그런 문헌에서 혹시 고고학적 자료와 일치하는 기록들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삼국사기』도 예전에는 초기 기록(3세기 이전)을 불신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여러 고고자료들이 계속적으로 발굴되면서 그 기록의 신빙성이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박규호님이 매번 언급하시는 문헌 역시 이런 고고자료에 의한 검증과정을 거치면 학계에서 보다 빨리 인정받지 않을까 싶습니다.『화랑세기』는 이런 검증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용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고고학적 자료와 일치하는 부분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인이 쉽게 고고보고서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화랑세기는 연구한 게 없어서 의견을 개진할 바가 못 됩니다. 미안합니다.
음...딱히『화랑세기』는 아니더라도...지금 공부하시는 문헌들 중에서 고고자료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자료들이『삼국사기』와는 일치하지 않는데, 거기서만 일치한다면! 더할나위 없겠죠. 나중에라도 그런 부분들이 확인되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재밌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고고학 관련된 보고서를 일반인이 보기는 어렵지만 아예 볼 수 없는 것도 아니지요. 게다가 논문같은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으니깐 이런 부분들도 공부하다보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앞으로의 공부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
명치호태왕님은 역사문 회원중에서 제가 제일 높이 평가하는 사람중에 한 사람입니다. 추모왕의 아명을 '상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건만 봐도 대단한겁니다. 그런데, 아쉬운 건 박창화유고집에 알레르기가 있는지..부정론자이더군요.
몇몇 분들이 자꾸 저를 남당유고 부정론자는 아닙니다.^^;; 저는 남당유고들이 소설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분명 후대에 손을 탔을 지언정 기본 골격은 삼국시대 고유 기록일 것이라는 심증은 있으나,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의 근거로 인용할 단계는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얼른 연구가 진척되서 검증되기를 바라는 중이긴 한데, 적어도 지금은 솔직히 화랑세기만큼의 연구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안타깝지만, 화랑세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당유고는 저자가 명확치 않아서 화랑세기 보다 검증이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화랑세기도 아직 진위논쟁이 뜨거운데, 나머지 남당유고들 불 보듯 뻔합니다.
역사문의 글들은 오늘도 꼼꼼히 모니터링를 하고 있으며, 새벽 2시,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들어가 모니터링할 예정입니다. 제가 보는 견지에선 명치호태왕님은 부정론자로 보입니다만..
남당유고집은 한두개가 아니고, 추모경 한 편만하더라도, 내용이 많습니다. 님의 얘기대로라면.. 검증은 저희가 할아버지가 될 시점에 가서 해야 정상인가요? 벌써 저도 이미 40대인걸요.
만의 하나 남당유고가 환단고기와 동급 취급되는 경우를 나름 막기 위해 역사문 토론방에 올리는 것 반대하고 남당유고 토론방을 따로 개설했음 하는 바람을 내비친 것입니다. 환단고기처럼 다른 역사 토론방에 올렸다가 이리저리 채이고 무시 받느니, 정식으로 남당유고 토론방 만들면 적어도 환단고기와는 다른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하찮은 잔머리 좀 굴린 것입니다. 된통 실패했지만요.^^;; 그리고 저 역사문에서 그렇게까지 내공있는 편은 아닙니다.^^; 겸손이 아니고 한 예로 김기흥 교수님이나 한 소설가 분께서는 저 보다 빨리 수년 전에 추모왕의 아명을 추정을 하셨었습니다. 저도 글 쓰는 도중에 알아서 허탈했지요
상해 관련은 제가 최초인 줄 알았거든요.^^;; 에... 그리고 저는 금석문에 신빙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태왕에 대한 견해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을 듯 합니다. 이쯤에서 논의는 접는 게 나을 듯 합니다.^^
그렇군요. 추모왕중에서 제일 관심잇는 시기는 언제인가요? 동명 초기 부분이신지? 말년부분인지 궁금하군요.
님의 노파심중에 환단고기와 동급 취급이 되어서, 환단고기처럼 박해를 받을거라는 예상은 안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환단고기류와 차원이 다릅니다. 삼국사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서입니다. 자꾸 연구할수록 삼국사기의 문제가 많은 부분이 더 들어납니다.
저도 사람이고 제가 생각했던 것과 남당유고가 어느 정도 일치한 만큼 저는 남당유고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저에 대한 박규호님 개인의 관점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저도 환단고기와는 감히 비교도 안 될 차원이 다른 사료라 여겨집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남당유고를 환단고기 같은 극단적으로 쓰레기 취급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요즘 그나마 나아진 편이지만, 화랑세기도 여전히 일부 부류에게 그런 취급 받고 있지요.;;; 제가 제일 관심 있는 사료는 추모경으로 모수제기와 추모왕의 성장기 입니다.^^;
남당유고집은 님이 여태까지 연구한 공력의 3배 이상을 투입해야 연구를 좀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쌓엿던 내공에다 다시 공부와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