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도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다. 만약 굶주림에 빠진다면 군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고, 전쟁에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군인들을 위해 개발된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 바로 전투식량이다. 전투식량은 전투 때 간편하게 지니고 다니거나 먹을 수 있게 한 식량을 말하는 것으로, 전투식량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만큼 길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또한 전투식량의 발전은 인류의 식생활 습관까지 바꾸어 놓았다.
전투식량의 원조가 된 병조림
오늘날과 같은 전투식량이 없던 고대의 병사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거의 대부분의 전쟁에서 병사들은 육포 혹은 생쌀을 씹으며 굶주림과 싸우거나 약탈을 통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해 조리해 먹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당시 신라가 말린 명태인 북어와 각종 잡곡을 모아 가루형태로 간을 해서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잡곡 가루는 오늘날 미숫가루의 원조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음식물의 밀폐 보존법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투식량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804년 나폴레옹은 긴 전쟁으로 식품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고, 공모를 통해 신기술을 채용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인 의사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에 의해 개발된 병조림이 그것이다. 병조림은 유리병에 조리한 음식물을 담고, 살균 밀폐시켜 비교적 장기간 음식물을 보관 할 수 있었다. 병조림의 파급효과는 상당했다. 보관기관이 길었던 병조림 덕분에 프랑스군은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했고, 이는 각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는 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라이벌 관계였던 영국은 병조림을 참고해 보다 뛰어난 전투식량을 개발한다. 영국인 피터 듀런트(피터 듀란, Peter Durand)는 주석을 이용한 통조림 발명 특허를 낸다. 통조림은 병조림보다 훨씬 오래 음식물 보관이 가능했고, 병조림 보다 튼튼해 파손의 위험성이 적었다. 이후 통조림은 병조림을 대체해 각국의 전투식량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야전을 떠나 가정의 식탁에까지 당당히 오르게 된다. 이와 함께 곡물을 굽고 말려서 급식하는 형태인 건빵이 전투식량에 포함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빵을 빵 종류의 하나로 분류하지만, 외국의 경우 크래커나 비스켓과 같은 마른 과자류로 분류한다. 중동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빵은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고, 수분이 매우 적어 보존성이 좋아 선원들과 각국 해군의 환영을 받았다. 1801년 미국으로 건너간 건빵은 남북전쟁 당시 규격화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고, 북군에 배급되면서 전투식량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세트메뉴 전투식량의 등장
통조림의 탄생 이후 전투식량은 패키지화된 형태로 발전되게 된다. 이러한 전투식량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투식량이었던 C 레이션(C Ration)이다. C 레이션은 야전에서 개인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전투식량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개의 통조림 깡통과 하나의 액세서리 팩으로 구성된 C 레이션은 통조림 하나는 조리된 육류 혹은 육류와 야채가 뒤섞인 주식이 들어 있었고, 다른 통조림에는 건빵과 인스턴트 커피가 들어 있었다. 액세서리 팩에는 숟가락과 휴지, 성냥, 깡통따개 그리고 사탕과 껌, 담배 같은 기호식품들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C 레이션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세트메뉴화 된 전투식량이었다. 규격화된 C 레이션의 보급으로 전선의 병사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양가 높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 또한 C 레이션은 대량으로 보급되어 구호물자로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C 레이션은 전쟁의 폐허 속에 굶주려 있던 민간인들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C 레이션은 세계 각국의 전투식량 개발에 표준 모델로 자리잡게 되고, 이후 미군 전투식량은 명칭이나 메뉴 구성품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C 레이션의 기본 구성 자체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깡통을 대체한 레토르트 전투식량
통조림을 기반으로 한 전투식량은 튼튼하기는 했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 병사들이 휴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특히 통조림은 제작 단가가 비쌌다. 미군은 1960년대부터 통조림을 대체하면서 음식을 장기간 보관 할 수 있는 신형 용기 개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레토르트 식품이 개발된다. 레토르트 식품은 플라스틱 필름 등의 주머니에 조리가 완료된 음식을 넣고, 공기나 수분이 통하지 않도록 밀봉하고 가열 살균한 식품이다. 흔히 3분 요리 시리즈들이 대표적인 레토르트 식품이다. 레토르트 식품은 통조림에 비해 포장이 얇고 무게도 가벼우며 부피마저 작아, 전투식량으로 사용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결국 1981년 미군은 레토르트 식품을 응용한 새로운 형태의 전투식량 MRE(Meal, Ready to Eat)를 선보인다. 1992년에는 물만 부으면 발열이 되는 발열 팩이 추가되면서, 불 없이도 따뜻하게 MRE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MRE는 다양한 메뉴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첫 등장 당시에 12가지 메뉴가 있었으며, 그 종류는 갈수록 늘어 2000년대 들어서는 24종류까지 늘어났다. 심지어 채식주의자용 메뉴나 회교도용 메뉴 등 병사 개개인의 개성을 고려한 메뉴까지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투식량
우리군이 전투식량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베트남에 육군과 해병대가 파병을 하면서부터이다.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주먹밥이 대표적인 전투식량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군에게도 미군에게 지급되는 통조림 형식의 전투식량 MCI가 지급됐지만, 미국식 먹거리로 구성되어 우리군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결국 1967년 2월부터 밥과 김치 등으로 구성된 통조림인 K 레이션이 우리군에게 보급되었다. 이후 우리 군도 자체적으로 개발한 고추장 볶음, 통조림, 건빵 등을 생산해, 점차 우리나라 특유의 전투식량을 만들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한국형 전투식량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국방과학연구소 주도하에 현재 전투용Ⅰ형의 형태인 전투식량이 개발되었다. 특히 1996년 강릉 대 간첩 작전 이후에는 물과 불이 없어도 급식이 가능한 전투식량 개발이 요구되었고, 이로 인해 MRE와 유사한 발열 팩을 포함한 즉각 취사형 전투식량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즉각 취사형 전투식량은 볶음밥과 양념소시지, 쇠고기 콩, 볶음김치, 초코볼, 파운드케이크 등으로 구성돼 있고 물과 불이 없어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등 한국 특유의 조리법과 영양과 맛의 발전이 거듭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