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한복음 12:9-11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알고 나사렛에서 목수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정직하고 착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와 나병 환자도 고치고,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도 말씀 한 마디로 눈을 뜨게 해 주는 이적을 보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말했습니다(10:20).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10:30,31). 돌로 치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고 하시니까 무리가 ‘신성모독 하므로 돌로 치려고 한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라’고 말했습니다(10: 33). 이렇게 예수님을 신성모독하는 자로 돌로 쳐 죽이려고 하기까지 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한 가지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이 사랑하는 나사로를 병들어 죽어 무덤에 장사된 것을 살리는 일이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11).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 말씀을 부활절 설교로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였다면 신령한 몸으로 더 이상 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후에 죽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 해 주는 이적이였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희생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예수님이 나사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즉시 달려와 고쳐주지 않으신 예수님을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나사로를 병들어 죽게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11:3)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함이라”(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틀이 지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오셨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11:21,32).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시며 일어나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경위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병들어 죽도록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나사로가 병들어 죽고 무덤 속에 묻혀야 했던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병들어 죽기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하기 위하는 일에 희생된 것입니다.
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쥐를 통해서 연구를 한답니다. 쥐가 사람의 인체와 가장 닮았기 때문에 암 세포를 쥐에게 주입해서 암의 성장 과정과 고통을 당하고 죽는 과정을 통해서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쥐를 희생 시키는 것입니다. 쥐들이 왜 이렇게 희생을 당합니까? 그것은 사람과 체질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를 병들어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뿐만 아니라 가장 신뢰할 만한 믿음이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까지도 고통과 슬픔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어쩌면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도록 하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병들게도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제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던 것처럼 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 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사로를 비롯한 마르다와 마리아가 당하는 희생적 고통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까지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기까지의 아픔과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최고의 고통일 것입니다. 사나로가 그동안 체질이 약하고 자주 병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나사로가 자주 병들고 허약한 체질이였다면 나사로를 병들어 죽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건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들어 죽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를 본 누이들은 당황하여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니 이럴 때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병든 오라버니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곳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셔서 오라버니를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베다니 온 마을 사람들까지도 슬퍼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해가 지기 전에 장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는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의 온 가족들의 슬픔이요 친구와 친척들까지의 슬픔이였습니다.
이렇게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지 나흘이 지나서 예수님은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예수님께서도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슬픔이였습니다. ‘비통히 여기시고’라는 말은 ‘통분히 여기시고’라는 말로 ‘분노로 인해 말처럼 콧김으로 내뿜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분노하시고 비통히 여기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죽음은 누구의 죽음과 닮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 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지금 죽음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미리 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주변에 둘러선 유대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11:37). 이런 저런 비난의 소리를 들었을 때 십자가 밑에 많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저주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을 미리 듣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돌문을 열었을 때 마르다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다가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것은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했습니다(11:40).
썩어 냄새가 나는 비참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회복될 수 없는 현실에서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썩어 냄새가 나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회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모두가 다 안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썩어 냄새 나는 무덤 앞에서까지 낙심적인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합니다. “내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은 것은 누구를 위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러선 믿지 않은 무리를 위해서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불쌍해서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선 무리들을 위해서 나사로를 살라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나사로의 병들고 죽은 것은 누구를 위함이였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옴으로 인해 그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므로 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죽은 자를 고치는 예수님만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사로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사로에 대한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는 일에 죽어 장사되기까지 희생된 사람이였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므로 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작은 나사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많은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실패와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둘러선 불신자들을 위해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불신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나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기도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나를 회복 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에서 회복하므로 주변에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