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一利川) 전투 (일천년 전의 역사 재조명)
邦 久(본명: 김상환): 선주 문학회원
서기936년 음력 9월 일선군(경북 구미시)에서 벌어진 일리천 전투는 고려 태조왕건과 후백제 신검간의 나라의 명운을 건 한판 진검승부사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패망하고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민족사상 두 번째로 후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함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했다.
일리천이라면 구미시(일선군)를 남북으로 흐르는 낙동강 상류이다. 태조산 도리사 서대(西臺)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김천에서 내려오는 감천(甘川)의 합수머리이다. 33번국도 동쪽 낙동강연안을 따라 폭 5~6km 넓이 약 60 여만 평에 달하는 점갱이들(고아읍 괴평리)과 어갱이들(구미시 지산동)이 펼쳐져 있다. 이 넓은 들녘이 고려 백제 양군 십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대회전을 벌린 일리천 전투의 현장이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력에서 열세를 만회할 길이 없는 견훤은 수륙 양동작전에 강한 왕건의 군사에게 909년 영암의 덕진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뒤 견훤과 왕건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태조 3년(920)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 지역을 공격하자, 신라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왕건이 구원병을 신라에 보내어 도와주었기 때문에 양자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925)의 조물군(구미의 금오산성 부근) 전투에서다. 견훤 쪽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투에서 왕건 쪽의 장군 애선이 전사하자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었다.
견훤이 인질로 고려에 간 진호가 병으로 죽자, 왕건 쪽의 인질 왕상을 죽이고 고려의 영역인 공주를 공격했기 때문에 이 대립관계는 태조 10년(927)에 팔공산의 오동나무 숲 전투에서 폭발하고 만다.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범해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이 이에 개입하려들어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왕건은 기병 5,000을 거느리고 친히 출전했으나 왕건은 팔공산 동수(桐樹)전투에서 견훤의 군대에 밀려 사면초가에 빠진다. 이때 신숭겸이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음으로써 왕건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견훤은 909년 해전에서의 패배를 멋지게 복수한 셈이다.
왕건은 몇 년 동안 명주(강릉) 왕순식의 군사적 도움을 받으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태조 12년(929)부터 시작돼 이듬해까지 이어진 고창군(안동) 전투에서는 토착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도움으로 크게 이겼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0여 개 성이 왕건에게 복속돼 결국 신라 경순왕이 귀순하게 되었다.
여기에 후백제 내부의 분열은 견훤 쪽의 패배를 부추겼다. 견훤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이 배다른 형제인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 위를 물려주려 하자, 그 형인 신검,·양검,·용검 등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죽였다. 그러자 견훤은 나주로 도주해 왕건에게 귀순했다.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왔다.
묵호자 아도화상의 신라불교 초전법륜지(初傳法輪地) 해평 도리사(桃李寺)를 오른쪽 가슴팍에 둥지를 틀고 있는 태조산(太祖山)(691m)은 후백제가 진을 친 금오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一利川 전투당시 태조 왕건의 고려군 전선 사령부가 설치된 본진이다. 태조산의 서대에 오르면 일리천 전투의 현장과 일망무제 황학산 직지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가 있다.
태조산을 등지고 있는 성안마을에서 국도로 내려오다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도로변에 보면 칠창(七倉)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태조 왕건이 장기적인 일리천 전투를 앞두고 일곱 개 군량창고를 설치한 곳이라 하여 칠창리라 명명된 곳이다. 또한 낙동 강변에 위치한 원촌(여지마을)은 일리천 전투당시 고려군이 적전도하작전을 감행했던 여지나루(餘次尼津)였다.
견훤은 자신을 유폐시킨 신검을 응징해 줄 것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마침내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해 9월 왕건은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병력을 합세시켜 일선군으로 나아갔고, 후백제의 신검도 고려군을 맞아 대항하였다.
일리천은 지금의 선산을 관통하여 흐르는 낙동강 지류이다. 왕건으로서는 이곳은 신라와 가까워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해 쉽게 병력과 물자를 이동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곳이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은 태조산을 등에 업고 서남쪽으로 포진했고 후백제군은 금오산을 배후기지로 삼아 동북방향으로 진을 쳤다. 고려군이 먼저 전단을 열었다. 음력 9월이 갈수기였던 만큼 강물은 깊지 않아 여지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넜다. 김천에서 흘러내린 감천(甘川)은 선산읍과 고아읍사이를 흘러내려 낙동강본류에 합수된다. 이제 양군은 감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대치하게 된다.
태조가 거느린 고려군의 병력은 10만 명에 육박했다.
좌강(左綱)
견훤, 견권(堅權)ㆍ박술희(朴述熙)ㆍ황보금산(皇甫金山), 강유영(康柔英) -마군 1만
능달(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 영직(英直),광세(廣世) -보군 1만
우강(右綱)
김철(金鐵), 홍유(洪儒), 박수경(朴守卿), 연주(連珠), 훤량(萱良) -마군 1만
삼순(三順), 준량(俊良), 영유(英儒), 길강충(吉康忠), 흔계(昕繼) -보군 1만
중군(中軍)
왕순식(王順式), 긍준(兢俊), 왕렴(王廉), 왕예(王乂), 인일(仁一) -마군 2만
유금필(庾黔弼), 관무(官茂), 관헌(官憲) 말갈기병 9천 5백
정순(貞順), 애진(哀珍) -보군1천
종희(宗熙), 견훤(見萱) -보군 1천
김극종(金克宗), 조간(助杆) -보군 1천
원군(援軍)
공훤(公萱), 능필(能弼), 왕함윤(王含允) 마군 3백+기타 여러성의 군사 14700명
총 8만7천5백여명
서기 935년에 후백제의 왕위에서 쫓겨난 견훤도 왕건을 따라 종군하고 있었다. 견훤은 935년 3월 장남 신겸의 쿠데타로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3개월 후인 6월에 고려에 투항했다.
고려의 대군이 북을 울리며 전진하자 후백제의 효봉· 덕술·경술·명길 등이 고려의 군세가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 투구를 벗고 창을 던져 버린 다음 왕건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왕건이 효봉 장수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묻자,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中軍)에 있으나 좌우로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즉시 대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후백제의 중군을 들이치게 한 뒤 고려군이 일제히 나아가 맹렬하게 공격하니 후백제군은 크게 무너졌다. 고려군은 계속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논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후백제의 신검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아우 양검·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이끌고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신검이 항복한 마성 인근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웠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운명을 건 일대격전이 후백제의 참패로 끝나게 되고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4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일리천(一利川) 전투 (일천년 전의 역사 재조명)
邦 久(본명: 김상환): 선주 문학회원
첫댓글 당시의 전투 상황과 인명이 잘 드러난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유익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는 수고하셨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괜찮은게 나와서 올려 보았습니다.어제 총회도 참 좋은 자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