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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회고와 새종교에 대한 꿈
직업 성직자도 아닌데 학창 시절부터 노년이 된 지금까지 내가 종교에 바친 시간을 계산해 보면 먹고 살기 위해 일한 시간 다음으로 많을 것이다. 성경공부, 예배, 기도, 찬송, 전도등에 쓴 시간의 양을 합산하면 실로 어마어마 하다. 나는 그런 종교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을 신을 사랑하는 거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알고 다른 취미생활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거나 심지어 나를 위해 공부하는 것도 죄로 여길 정도로 시간과 돈과 열정을 바쳤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사는 것은 기본이고 밤새도록 기도하거나 여러 시간 찬송을 부르거나 성경책을 수없이 읽고 심지어 학교를 빠지고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금은 특정 종교의 교인도 아니고 그런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일도 없지만 은퇴후 강화에 와서도 지난 9년간 나는 많은 시간을 심도학사에서 보내며 다양한 종교의 여러 경전 공부를 했다.
이 글은 이런 나의 지난 삶을 고백하며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오랜 방황 끝에 도달한 지금의 나의 종교관을 밝히려고 쓰는 것이다. 이 글이 종교에 중독되었거나 종교로 인해 갈등하거나 지금도 종교에 열심인 이들에게 또는 종교를 찾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나의 방황에 대한 작은 위로가 될 것이다.
1.미신적인 나의 가정
나는 대전 변두리 식장산 밑에 있는 망태골이라는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농이거나 식장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나물을 뜯어다 파는 것이 주소득이었고 우리 마을에서는 나 말고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미신이 성해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 아버지가 장티프스에 걸렸는데 동티가 나서 그렇다고 푸닥거리를 해 마을 사람들을 전염시킨 일도 있었고 식구 중에 누가 아프면 울타리에 서있는 나무에 악귀가 붙었다고 그 나무들을 잘라내기도 했다. 나는 동네 무당의 수양 아들로 팔려가 해마다 그 무당집에서 굿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 토정비결을 봐 주곤 했는데 여름에 물가를 조심하라는 점괘가 나오면 친구들과 물놀이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챙피했지만 나는 고생만 하시고 사는 어머니를 거슬을 수 없어 그냥 참고 견뎠다. 이런 짓들이 어리석은 미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들거나 반항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유약한 성격 탓인데 후회가 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약해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미신의 폐해는 실로 컸다. 미신은 한마디로 상식과 합리성의 결여이며 터무니없는 맹신이다. 신앙이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상식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고등학교 시절에 다니던 시골 교회
우리집이 미신적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내 주변에는 교회 다니는 이들이 없어 나는 중학생 때까지 교회에 가본 일이 없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하는 날 그 동안 학교에 저금한 돈을 탔는데 그 돈으로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렸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한권 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은혜였는지 재앙의 시작이었는지는 기독교에 대한 나의 애증 때문에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가난하고 주변에 공부하는 이들도 없어 나는 참고서도 거의 없고 교과서 말고는 읽을 책도 없어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성경책을 한번 읽어보자는 결심으로 열심히 읽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성경이라 어렵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참고 읽다가 잠언서를 읽으며 마음에 드는 말들을 발견하여 기뻤다. 이런 취지의 말들이 특히 좋았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지혜를 배우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 등등.
그러던 어느날 새벽 나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교회는 우리 집에서 오백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산 밑에 있었다. 종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종소리에 이끌려 생전 처음 교회로 갔다. 교회는 작고 아담했으며 특히 종탑이 아름다웠다.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몇분과 여학생 하나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여학생의 기도하는 목소리가 천사의 음성처럼 들렸다. 나는 뒷자리에 넋을 잃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몰래 나왔다. 알고보니 이것이 새벽기도였다. 그날 온종일 뒷모습만 본 그 여학생의 기도하던 모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새벽에도 가고 며칠을 그렇게 다녔는데 어느날 내가 혼자 몰래 왔다가 가는 것을 안 목사님이 문을 지키고 있다가 나를 잡았다.
이것이 나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교회 중독자가 되었다. 중독은 실로 황홀한 기쁨이었다. 수십년 후에야 그 비극을 알았지만.
나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꼬셔 함께 교회를 다녔다. 교인들이 오십여명 되는 시골 교회였는데 젊은이들은 기도하던 그 누님 말고는 거의 없고 할머니 할마버지들 뿐이었다. 그 분들은 젊은 우리가 오니 우리들을 너무 좋아해 교회 갈 때마다 옥수수 감자, 과일등 먹을 것을 주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일요일은 물론이고 수요일 금요철야에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고 새벽기도회도 나갔다. 그리고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교회에 들려 몰래 교회 청소를 하곤했다. 수요 예배 시간에는 찬송을 준비해 교인들 앞에서 특송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불렀던 특송 중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찬송은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와 ‘이 세상 끝날까지 주 봉사하리니 내 친구되신 주여 늘 함께 하소서’등이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우리는 심지어 학교도 빠지고 참석했다. 그 무렵에는 성령운동이 한창 때라 성령 받고 방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내 친구는 금방 방언이 터졌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니 부흥사가 죄를 다 고백하라고 해 다섯 살 때부터 생각나는 거짓말등 온갖 죄를 다 고백했다. 그래도 안되니 회개가 부족하다고 부흥사가 내 등을 내리쳐 꼬꾸라지기도 했다. 여전히 방언을 못하자 부흥사가 나를 골방으로 따로 불러 따라 하라며 라셀라셀라셀— 나는 억지 흉내를 내 겨우 방언을 하는척하기도 했다. 친구와 산기도 다닌다며 한밤중에 산에 올라 주여 삼창을 외치고 소나무를 잡고 기도하던 일도 생생하다.
학생회가 없어 우리는 고등부 학생회를 만들어 열심히 전도를 했다. 지도하는 이도 없이 우리끼리 토요일 마다 모여 문학회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연애도 하니 실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는데 사연은 이렇다. 마침 교회에 들렸는데 교회 기도실 어항의 금붕어가 죽어 있었다. 옆에 있던 여학생이 금붕어가 죽으면 해바라기 밑에 묻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낭만적이던 나는 그 말에 취해 문학소년 답게 금붕어를 위한 조사를 쓰고 죽은 금붕어를 들고 그 여학생과 해바라기를 찾아 나섰다. 해가 지고 달빛이 비치던 길을 사랑스런 여학생과 해바라기를 찾아가던 그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시작된 사랑과 이별!
내가 이렇게 교회에 미치자 아버님은 크게 노하셨다. 작은 농사를 지시던 아버님은 공부 안할려면 일요일에 아버지 농사일이라도 도와달라고 하셨는데 나는 일요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라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화나게 하는 일이라며 교회에서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고 거절했다. 교회에 미치니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은 안중에도 없고 기독교를 모르는 불쌍한 아버지가 교회 다니지 않아 지옥 갈 일만 걱정이 됬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너무도 화가 나서 술에 잔뜩 취해 교회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마루에 있던 맷돌을 집어던지며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치셨다. 나는 아버지의 고통은 생각도 않고 이것이 믿는자가 당하는 고난이라 생각하며 고난도 기뻐해야 한다며 찬송을 불렀다. 아, 이 때 일을 생각하면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께 너무도 큰 죄를 지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나 아들 공부 잘하는게 유일한 기쁨이고 자랑이던 부모님은 그렇게 착하고 공부 잘하던 아들이 교회에 미쳐 공부도 안하고 부모 말도 듣지 않는 것에 말 그대로 분노를 넘어 절망하셨다.
결국 부모님은 내가 서울대에 가면 교회를 다니겠다고 약속하고 어머니가 먼저 교회에 나오시고 아버지는 합격하면 나오겠다고 했다. 나만 예수 믿어 천국 가고 부모님은 예수 믿지 않아 지옥에 갈 것이 걱정이던 나는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 합격을 했고 아버지도 교회에 나오셨다. 고3 때 나는 새벽마다 일어나 교회에 가서 부모님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며 기도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돌아보니 내가 다닌 시골 장로교회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종말론을 강조하고 방언등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였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교회에 몰두하게 됬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며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헌신감으로 충만했다. 나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한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겠다고 기도했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나는 출세하는 것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 시절 시골교회를 지금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곧 종말이 오겠다던 말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 안되고 방언 치유등을 강조하던 성령운동도 지금은 시들해졌고, 성서문자주의, 기복신앙등도 지금의 나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시골교회를 돌아보면 교리나 신학과는 상관없이 인정 많던 장로님, 권사님들이 그립고 하느님을 위해 불타던 헌신의 마음이 그립다. 크리스마쓰 이브에 떡국 먹고 선물교환하고 눈내리는 새벽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다니던 일들 또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름성경학교 선생으로 아이들에게 성경동화도 들려주고 성경학교 끝나면 선생님들 수고했다고 권사님들이 집으로 초대해 시골음식을 나누어 먹던 그 인정도 마냥 그립다.
내가 다닌 산 속의 작은 교회, 빨갛게 울타리를 두르고 있던 장미넝쿨, 밤 늦은 시간 기대어 찬란한 밤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었던 낡은 종탑. 은밀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작은 기도실,이것은 분명 지상의 작은 천국, 사랑의 공동체였고 내 젊은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한 교회였다.
3. 대학교 때 다니던 네비게이터 선교회
가난한 청년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시골에서 올라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서울에서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 대학생활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으로 날마다 찬송을 부르며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았다. 촌스럽지만 뭔가에 홀린 듯 항상 묘한 미소를 짓고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살던 그 때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사랑스런 느낌이 든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을 권할 때 예수를 믿어 술을 안마신다고 끝까지 거절해 분위기를 서먹하게 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대체로 과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외톨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청량대라는 대학의 정원에서 혼자 앉아 있는데 허름한 차림의 어떤 분이 다가와 나에게 진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나는 예수를 믿어 성경이 진리라고 믿는다고 대답하니 그는 나에게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읽어주며 죄에서 자유로와졌느냐고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니 그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자라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하느님께 내가 죄인임을 매일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고 하니 그는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냐고 물으니 그는 자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계속 얘기하자고 했다.
그분의 집은 대학 근처에 있는 허름한 단칸방이었는데 그날 따라 비가와 아궁이에 물이 차서 밥을 할 수 없어 우리는 밥도 굶은체 다락방 같은 좁은 곳으로 올라가 밤새 애기를 나누었다. 그 날 나는 그에게 대속의 교리와 구원의 확신에 대한 말씀을 듣고 너무도 감격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 분이 바로 네비케이터 대학 간사 홍응표 선생이었다.
그 날부터 나는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네비게이터라는 보수 선교단체의 골수분자가 되었다. 선생님은 나를 어찌나 챙기는지 새벽 다섯시면 우리집에 와 나를 깨워 함께 조깅을 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했다. 외롭던 나는 사랑의 성자를 만난 것처럼 행복 했다. 그후 나는 서울사대의 다른 네비게이터 형제들 다섯과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네시나 다섯시에 일어나 예수 천국을 외치며 조깅을 하고 돌아가며 하는 식사 당번일 때를 제외하고는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음과 실천 사항을 기록하는 소위 콰이어트 타임이라는 것을 한시간씩 하고 서로 깨달은 것을 나누고 함께 기도를 했다. 성서에 대한 주석이나 참고서도 없이 무조건 성서를 읽고 성령으로 감동받은 것을 기록하고 실천하자는 것이 우리 성경공부의 전부였다.
우리방 벽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고 매일 성경을 몇장 읽었는지 성경 구절을 몇절 외웠는지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전도를 몇명에게 했는지를 적는 표가 붙어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성경은 수도 없이 읽었고 성경구절들도 줄줄 외워 감리교신학 대학원 시험 볼 때 성경 시험 만점을 받기도 했다. 학교에 가서도 우리는 점심 시간에 청량대라는 동산에서 같이 만나 찬송을 부르고 점심을 함께 먹고 전도를 했다. 나는 어찌나 열심이고 끈질겼는지 학생들이 나를 보면 슬슬 피할 정도였다.
우리가 전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방학 때는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며칠씩 보내며 해수욕 하러 온 사람들을 붙잡고 전도를 했고 서울역에 가서 노방전도를 하기도 했고 벤허를 상영중인 대한극장 앞에서 영화 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전도를 하기도 했다. 나는 심지어 최소 하루에 한명씩은 전도하기로 약속하고 그 날 전도를 못한 것이 생각나면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포장마차에 가서 전도하기도 했다. 이게 어디 사람이 할짓인가? 해수욕하러 온 이들이 얼마나 불쾌했을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큰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진상들이 바로 나의 예전 모습이었다.
네비게이터라는 선교 단체는 도슨 트로트만이라는 항해사 출신이 만든 것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사명으로 알고 활동하는 보수적인 신앙단체였다. 우리 벽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고 우리는 아침마다 우리의 마음이 가는 나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 나라로 선교사로 파송받아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 단체에서 강조한 것 중에 하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장 강조한 성경구절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그들은 다른 말로 가지치기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은 학교공부든 연애든 취미생활이든 다 끊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여자 친구를 끊은 사람도 있고 나는 아에 학교공부를 안해 학점이 우리 과에서 꼴찌였다. 이 모임에서는 이런 가지치기를 잘한 사람들이 간증이라는 형태로 장려되고 존경받았다. 당연히 학교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네비게이터에 헌신하는 나도 훌륭한 형제로 칭송을 받았다.
우리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도 정확히 십일조로 내야 했고 사실은 십에 오까지도 바치는 것이 장려되었다. 각종 명목으로 감사 헌금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착취인지도 모르고 너무도 감사한 마음으로 했고 많이 할수록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교련반대 유신반대로 매일 시위, 단식투쟁등이 있었으나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일군으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며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며 주님의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며 일체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온나라가 독재로 인해 자유가 말살되고 억압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도대체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말로는 주님을 위한 것이라며 사실은 이 단체의 확장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 단체에 속해 있으면 같은 형제들간에는 서로 목슴이라도 내어줄 듯 사랑이 충만하다. 말 그대로 유무상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진다. 그러나 누가 이 단체를 비판하면 그는 즉시 이 단체에서 쫒겨나고 언제 보았냐는 듯이 완전히 남이 될 뿐만아니라 심지어 배교자로 낙인 찍힌다.
나는 대학 이학년부터 사학년까지 이렇게 3년을 네비게이터 공동체에서 생활을 하다가 4학년 때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쳐 관절염을 앓게 되어 거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부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은 공동체 생활에 부담이 된다고 쫒겨났다. 하느님은 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이렇게 다리를 다치게 함으로 악의 소굴(?)에서 나를 빼내 주셨다. 이 단체에 속해 있는 동안 나는 이성도 상실하고 오직 이 단체의 구성원으로 앵무새처럼 그들의 주장을 따라하며 로봇처럼 살았다. 그것이 주님에게 충성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신앙은 이렇게 지독한 것이다. 한번 빠지면 집단체면에 걸린 듯 이성이 마비되고 세뇌된다. 한번은 대학강의 시간에 총장도 하신 유명한 교수님이 실존주의를 가르치며 죽음 앞에서의 실존의 불안을 얘기했을 때 나는 그 교수님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시고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까?. 저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어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후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4. 고향에서의 교편 생활과 학생들 독서모임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으려니 학점성적이 과에서 꼴지라 대부분의 친구들이 서울로 발령이 났는데 나는 완전 시골로 가게 되 있어 내심 싫지는 않았지만 마침 고향의 미션계 사립 학교에서 오라 하여 선생을 시작했다. 내 나이 스물 셋이었다. 영어를 부전공으로 했기 때문에 중학교 영어 선생을 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 퇴근 시간이 되도 아이들과 놀고 공부 가르치느라 집에 가기가 싫었다. 다른 선생들에게는 미안 했지만 거의 전과목을 가르쳤다.
공부 보다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다고 시험이나 성적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으로 시험 보기 전날 반 체육대회를 어두어 질 때까지 해서 학부형의 항의를 받고 교장에게 불려간 적도 있다. 다행히 내가 평소에 아이들 열심히 가르쳐 우리반 성적이 제일 좋았다.
젊은 청년의 정의감이 너무 넘쳐 당시만 해도 부정과 비리가 많았던 학교에서 나는 교장에게 골칫거리 였다. 항상 사표를 품에 넣고 다녔던 나는 불의를 참지 못했다. 원해서 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기독교 예배를 강요하는 것도 문제였고 성경 시간에 교리 공부를 시키는게 못마땅했다. 한번은 추수감사절이라고 반당 일정액을 제시하며 감사헌금을 걷어 오라 했다. 나는 종례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거의 한시간 동안이나 말하고(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지만 그 때는 열정이 넘쳤다) 대신에 헌금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억지로 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라고 했다.
며칠 후 교무회의를 하는데 책상 위에 무슨 선물이 있었다. 감사헌금 걷느라고 애썼다고 학교에서 주는 선물이란다. 나는 그것을 교장에게 집어 던지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가는 놈들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런 더러운 학교에서는 근무할 수 없다고 사표를 냈다. 그냥 좋은 학교만 되도 하느님이 좋아하실텐데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나쁜 짓을 하니 학생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모든 미션 스클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근무한 학교는 위선의 극치였다. 하느님 들먹이며 좋은 말 하면서 나쁜짓 하는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다. 내가 존경하는 김교신 선생님은 훌륭한 기독교인이셨는데도 남이 보지 못하도록 성경을 보자기로 싸서 들고 다녔다고 한다.
학교에서 방과후 독서회를 하는데 학생들이 너무 많이 와 침례회센터를 빌려 주말마다 독서회를 했다. 이 때는 나도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때를 조금 벗어 성경만 가르치지 않고 폭넓게 좋은 책을 읽게했다. 내가 그렇게 변한 것은 노평구 선생님등 무교회주의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함석헌, 김교신 선생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편협한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상식이 풍부하고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이 낫다고 했다. 함선생님은 기독교는 위대하지만 진리는 더 위대하다며 하느님이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하셨다.
나는 김교신 선생이 하셨던 ‘물에 산에’ 모임을 흉내내어 학생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그곳의 역사적 인물들이나 명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다만 가난하게 산 우리 부모님은 아들이 서울대에 갔다고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내가 아무 대학이나 나와도 할 수 있는 시골 학교 선생질하는 것이 몹시 불만이셨다.
5. 대학생들과의 공동체 생활-뻐구기둥지에서의 삶
그렇게 4년을 보내니 학생들 모임이 점점 커지고 대전에 내려와 주일마다 가정 모임을 하던 홍응표 선생님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나는 점차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며’(사도행전 2-44-45).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다 형제 자매이기에 우리 끼리 모여 살며 지상에서의 작은 천국을 이루고 이웃과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자는 생각은 나에게는 아름다운 꿈이었다. 가정은 너무 작고 혈연 중심적이고 교회는 너무 종교의식 중심적이다.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신앙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충남대 앞에 집을 얻어 학교, 병원, 농장, 교회를 함께 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모으기 위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교사, 의사, 농부, 목사등 필요한 일꾼들을 얻기 위해 나는 사대, 농대, 의대, 신학대에 다니는 이들을 모아 공동생활을 하며 성경공부도 하고 공동체에 대한 연구도 했다. 학교 선생하며 이 공동체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사는 일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3년간의 네비게이터 공동체 생활의 경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나는 학생들에게 전공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배, 찬양, 기도등 종교에 쏟는 시간 보다 사회적으로 봉사를 잘할 수 있는 유능한 인간이 되기 위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뻐꾸기 둥지에는 다섯명 정도의 대학생이 살았고 내가 하던 독서 모임 학생들도 수시로 와서 학생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토요집회 뿐만 아니라 방학 때마다 며칠씩 모여 하계 동계 집회를 하며 성경공부, 독서 토론, 공동체에 대한 공부를 했다. 우리는 공동체 연구를 위해 원경선 선생님이 막 시작한 풀무원에 가서 일주일을 보내며 공동체에 대한 토론을 했다. 원선생의 풀무원은 진짜 기독교인은 무소유로 살아야 한다며 풀무원에 들어오는 이들은 다 무소유를 선언하도록 하고 자녀들도 학교에 보내면 저만 잘살겠다는 욕심이 충만한 아이들이 된다며 나더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테니 여기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욕심뽑기 운동을 하라고 제안하셨다.
그 때 나는 대전 모임에 집중하고 있어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학교를 거부하고 그렇게까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주저했다. 그러나 원선생님이 말하는 무소유 인간이 되는 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는 생각에 큰 자극을 받았다. 마침 풀무원에서 하는 성만찬에 참여했는데 원선생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며 예수님이 ‘이는 내 살이요 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도 이웃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우리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아무튼 당시 60대 후반인 원선생님이 직접 쟁기질도 하고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풀무원을 보고 나는 공동체를 하겠다는 생각이 더욱더 불타올라 국내외의 여러 공동체들과 공동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을 함께 연구했다. 이스라엘의 기브츠, 간디의 아쉬람, 퀘이커 공동체들, 구원파 공동체, 문동환 교수를 중심으로 한 새벽의 집등의 공동체 연구를 함께 했고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 생시몽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등을 공부하고 토론했다.
하계집회의 발제자 중 한 사람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우리 모임은 반국가단체로 몰려 유죄판결을 받고 나를 포함해 우리 여섯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 일로 우리는 공동체를 해보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신앙공동체를 하겠다고 모인 우리 한울회 모임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 분위기에 편승한 공안검찰의 말도 안되는 조작으로 인해 폭력으로 자유대한민국을 전복시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반국가단체가 되었던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그후 나는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아 홍성의 풀무학교에 가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고 강화에 와서도 대안학교인 산마을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년은 자기탐색을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세운 꿈틀리 학교, 그리고 학교폭력피해자를 위한 어울림학교등에서 가르쳤다.
나를 비롯해 우리 모임 사람들이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 눈을 뜨고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신대를 졸업한 내 친구 박재순이 우리 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우리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개인의 변화 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과 그후의 더 나쁜 독재자 전두환의 출현을 보면서 양심 있는 기독교인으로 이런데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시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의 생생한 증언과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살생하는 악마의 군대가 되었다며 전두환 퇴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복음을 통한 개인 영혼의 구원이나 교육을 통한 개인의 인격변화에만 관심이 있던 나도 큰 자극을 받았고 충남대에 다니던 우리 대학생들은 소위 운동권의 선봉이 되었다.
우리는 함석헌 선생의 ‘씨알‘ 잡지도 공동구입해 읽었고 소위 의식화 서적들도 읽었으며 해방신학과 민중신학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인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개인의 변화와 인격 교육에 관심이 컸다. 그 때 내가 알게 된 것이 성서공부를 통한 인격의 변화를 강조한 무교회였다.
6. 무교회와의 만남.
내가 무교회를 알게 된 것은 대전에 내려와 선생을 막 시작했을 때 한국무교회의 대표격인 노평구 선생이 한달에 한두번(?) 대전에 내려와 하는 성서강의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노선생님은 다른 직업도 없이 일본에서 십여년간 무교회주의자 쓰가모토 집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성서연구’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성서를 원어 중심으로 연구하고 독일등의 성서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들을 세밀히 공부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방식으로 성서공부를 해 그 동안 아무 성서주석도 보지 않고 그냥 성서를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 실생활에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그 동안의 나의 성경공부는 초등학생들의 독서감상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비로서 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 헬라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성서학자들의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동경대학생들 중심으로 한 무교회의 창시자 우찌무라의 성서집회에 참여하려면 그날 성서본문을 헬라어로 암기해 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감정적이라 신앙도 감정의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가며 믿어야 한다는 김교신 선생의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 동안의 나의 감정 중심적인 신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노선생은 성서를 통해 도덕과 사상의 뼈대를 세우고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한국 사회에 가장 긴요하고 중요한 일이라며 성서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에게도 쓸데없이 민주화운동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성서연구에만 전념하라며 자신의 책을 다 주겠다고 하셨다. 선생은 내 결혼 주례사에서도 홍군은 하느님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으로 성서연구에 몰두할 사람이니 신부는 경제 문제나 생활 문제로 절대 남편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행상을 해서라도 생활을 책임지라 해 장인을 화나게 했다.
나는 무교회의 진지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예배, 찬양, 기도, 성레전등 일체의 종교의식을 배격하고 우리는 누구라도 하느님과 나를 중재하는 종교부로커들인 소위 성직자의 중재나 매개 없이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고 교회나 성직자 제도등 조직 속에 있으면 개인의 진정한 영적 자유와 인격의 책임성이 사라지고 조직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된다며 일인 일교회를 주장하는 그들의 자유 선언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때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고 우리끼리 신앙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김교신, 함석헌 선생이 동경에서 우찌무라에게 무교회를 배우고 돌아와 만든 무교회잡지 ‘성서조선’을 구입해 다 읽으면서 나는 김교신, 함석헌 선생에게 매료되었다. 일곱권으로 된 김교신 전집을 다 읽고, 무엇보다 날마다의 자기 삶을 공개한 김교신의 일기를 읽고 나는 김교신을 내 교육의 스승으로 삼기로 하고 어찌하든 그분을 본받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내가 강화로 이사와 몇 년간 이웃사촌이라는 카페에 ‘어느 귀촌인의 하루’라는 일기를 올리게 된 것도 순전히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정릉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냉수마찰하고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학교 박물학(지리)선생을 하며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거의 혼자 발행하며 자전거로 배달까지 하셨다. 주말마다 자기 집에서 성서연구 집회를 가졌고 성서공부를 수준 높게 하려고 방학 때 함석헌 선생과 독일어 공부도 함께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런던타임즈도 구독해 읽으셨다. 함석헌 선생의 ‘성서로 본 조선역사’가 실리며 성서조선이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고 한 겨울에 다 죽은 줄 알았던 개구리가 이른 봄에 다시 살아나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 민족이 아직 말살되지 않고 살아 있음을 노래한 김교신의 ‘조와’라는 글이 문제되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등 여러분들이 일년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때 이 사건을 담당한 일본검사는 직접 무쟁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 보다 조선의 오백년후를 내다 보며 성서로 조선민족을 개조하려는 이 놈들이 더 무서운 독립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성서를 통한 인격의 변화를 추구하는 무교회가 마음에 들었으나 두가지 점에서 갈등이 있었다. 하나는 당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에게 있어서 무교회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었다. 둘째. 당시 나라 전체가 독재에 의해 신음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현실 문제에 눈을 감고 오로지 성서연구만 하라는 것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우리 모임인 한울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아내가 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니 노선생이 내 걱정을 하기 보다 더러운 정치 같은 일에 참여하지 말고 성서연구에 몰두하라 했는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감옥에서 고생좀 해야한다는 취지로 아내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그게 선생의 평소의 지론이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자를 대하는 그 냉혹한 태도가 서운하기도 했다. 무교회와 결별하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영장도 없이 안기부에 끌려가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느낀 비민주적 독재정권의 폭력적 억압을 보고 사회변화 없이는 개인의 구원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교회 주 구성원들이 노인들이고 성서연구 내용이나 분위기가 고루하고 답답한 것도 무교회를 떠난 이유였다.
특히 함석헌 선생이 ‘흰손’이라는 시를 통해 예수의 대속을 부인하는 말을 하자 무교회 사람들이 함석헌 선생을 배교자처럼 비난하며 내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함선생은 남을 위해 자기 손에 피 한방울 안흘리고 예수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며 흰손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향해 주님이 나는 너희 같은 자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내치실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굳이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돌아서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함선생님의 말씀은 나에게 너무도 당연했다. 그리고 함선생이 기독교보다 진리는 더 위대하다며 기독교가 진리를 외면할 때 그런 기독교는 버리거나 개조해야 한다고 하시며 하느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한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교회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신실하고 성실한지 그들이 성서를 깊이 연구하며 자기 분야에서 진실되게 사는 것을 보고 수백만명의 교회중독자들 보다 그들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7. 함석헌 선생님과의 만남
친구 박재순과의 만남은 개인구원을 중시하던 나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그를 통해 그의 스승 함석헌을 알게 되고 함선생이 내는 ‘씨알의 소리’를 정기 구독하면서 나와 우리 모임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 특히 박정희의 독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고 민주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본래 사회 정치적 참여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 교육과를 선택한 이유도 교육과 소개란에 인간의 바람직한 변화에 대해 연구하고 인간변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을 기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말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을 할 때도 인격의 변화를 중시해 어찌하든 좋은 책을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학생들 독서모임을 만들어 지도했다. 물론 그 때 우리가 주로 읽은 책은 인류의 고전들이었지 현대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소위 의식화 서적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함선생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그의 ‘성서적 입장에서(뜻으로) 본 조선역사’도 읽고 “씨알의 소리‘에 실린 사회비판적인 글들을 읽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함선생이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접하고 쓴 비통한 글들을 보면서 우리는 억압 받고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충남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야학에도 참여하였다. 그 때 그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 때 나의 사회적 의식은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도록 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단지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와 그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그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검정고시를 보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사용자들은 우리가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노조를 만들게 하려는 줄 알고 밤늦도록 일을 시켜 야학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아무튼 나는 그 때나 그후에도 소위 운동권도 아니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본래 마음이 여려 학생들이 유신에 반대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질 때도 친구들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보거나 잠시 시위 현장에 있기는 했어도 돌맹이 하나 들지 못했다. 우수운 얘기지만 학생들이 독재에 항거해 여러날 단식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단식 현장에 갔다가 그들 중 일부가 몰래 빵을 먹는 것을 보고 나는 그들에게 나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걸 수도 있다며 사람이 진실해야지 어떻게 단식을 한다며 음식을 섭취할 수 있냐고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민주화 운동에 전혀 참여도 하지도 않고 전도한다며 선교활동만 하던 내가 난데없이 나타나 그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었던지 나는 그들에게 뿌락지라는 소리를 듣고 쫒겨났다.
그러나 나의 제자들은 훨씬 더 양심에 민감해 나 보다 더 의식화가 되어 충남대에서 운동권이 되었다.
함선생을 만나 나의 기독교관도 크게 변했다. 무엇보다 대학 사년간의 네비게이터적 종교관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있었다. 특히 함선생의 ‘흰손’등의 시를 읽고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믿기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종교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때까지 절대시하던 기독교를 진리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보면서 기독교의 잘못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당연히 나는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하느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기복신앙이나 성경은 한글자도 틀림없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는 성경 문자주의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함선생이 무교회를 떠나 참여한 퀘이커를 공부하면서 특히 함선생이 번역한 ‘퀘이커 삼백년사’를 읽고 나는 내면의 빛을 강조하고 일체의 교리에 얽메이지 않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지체없이 실천하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그들의 새로운 신앙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후로도 함선생님의 전집(30권)을 읽으며 함선생이 쓴 힌두교의 바가받기타 해설이나 동양 고전들 특히 씨알의 옛글풀이등을 통해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벗어나 종교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함선생이 스승으로 여기는 류영모 선생을 알게 되어 불교 유교, 노장사상등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려고 서성거리기도 했다.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수십번 읽기도 하고 여러 주석들을 참조해 직접 간단한 해설을 써보기도 했다. 나의 기독교 신앙은 노자적 기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노자를 동양의 예수라고 보았다.
이렇게 젊어서부터 무교회의 김교신, 퀘이커의 함석헌 그리고 동양적 한국적 기독교의 류영모를 스승으로 알게 된 것이 나의 신앙의 뼈대가 되었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함석헌 선생님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후 씨알 재단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첫댓글 이 글은 앞으로도 게속 될 것이며 뼈대만 쓴 초안이고 여기에 살을 더붙여 다시 쓸 생각입니다.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 올리기를 주저했지만 나의 경험이 종교를 찾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파란만장한 스토리네요^^ 소설의 재료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변의 대한민국 근대역사 속에서 삶의 희망을 종교와 영성에서 찾으려한 주인공!
홍성환홧팅!!!
홍선생님같은 경험과 실천을 하신분을 알게된것에 감사드립니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