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종착역 03 (2019 사토 아이코)
03 세 번째 남편을 구합니다.(47세 1971년 부인공론 7월호)
03-1 첫 번째 남편은 마약 중독이 돼서.
나의 유년기는 부끄럼을 잘 타는 내성적인 겁쟁이였다. 나에게는 네 살 위인 언니가 있었는데, 늘 그 언니 뒤를 졸졸 따라 걷다가 남이 말을 걸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언니가 나 대신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며 자랐다. 잠시라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난리가 났고, 가위를 들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크게 다친다고 아버지는 소리쳤다.
나에게는 언제나 유모나 어린 하녀가 붙어 있었고, 어린 하녀는 내가 집에서만 큰소리 치고 밖에 나오면 위축되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집밖으로 나가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다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겁을 먹고 있었다. 내가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부모님이 죽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때를 생각하니 정말 앞날이 캄캄해졌다. 그래서 나는 신사 앞을 지날 때는 멈춰 서서 절을 하고 부모님의 장수를 빌었던 것이다.
나의 첫 결혼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겨울이었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고 처음에는 승전이 계속 되다가 점차 이상한 먹구름이 몰려와 패전의 불안과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시작되어 가던 무렵이다.
내가 그렇게 빨리 결혼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라는 것이 된다. 여자는 시집가서 남편에게 부양받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살아나갈 길을 열려고 해도 주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는 전혀 무력한 상태에 놓임으로써 (남자의 비호를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불편함도 불만스러움도 느끼지 않고 나는 중매결혼을 했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여자의 걸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취업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큰 회사일 수록 좋았다." 나는 고생이나 가난이나 파란을 싫어했다.
가능한 한 내가 자란 환경과 비슷한 모든 것에 풍요로운 환경이기를 부모님은 나를 위해 바랐다. 왜냐하면 나는 정갈하지 못하고 제멋대로이며 소심하고 행동력이 없는 응석받이였기 때문이다.
패전의 시기였지만 나의 생활은 비교적 축복받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은 항공기지시설운영대 근무로 각지를 전전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따라 가기도 했고, 아니면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도 했으며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에 가 있기도 했다.
나는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의 보살핌를 받으며 소중히 여겨졌다.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의 어려움도 당시로서는 그리 부족한 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편은 내지에 있었음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겨우 돌아왔을 때 그는 마약 중독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나는 그저 무심코 살고 있는 것 같은 삶이었다. 남편의 마약 중독에 나는 약 5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의 마악중독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나는 남자에게 의지하며 사는 삶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두 아이를 노시부모에게 맡기고 남편의 집을 나와 소설 쓰기를 내 평생의 삶의 터전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겁이 많고 행동력이 없는 나로서는 무모한 일을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특별히 문학적 소양도 없고 문학을 좋아했던 과거도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
어쩌다 친정 아버지가 대중작가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길을 갔다. 그때 나를 밀고 나간 힘은 '이 상태로 가다가는 망한다' 라는 절박한 위기감이었던 것 같다.
화재나 홍수 등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에게는 평소에는 나오지 않는 큰힘이 나게 되어, 위기속에서 여자 혼자 옷장을 짊어지고 나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가끔 듣는데, 그때 나를 밀고 나간 힘은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평화로울 때는 먼저 가능성을 생각한 후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서는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등 생각할 여유가 없다. 불가능하더라도 해야 한다. 힘은 그때 나오는 것이다.
03-2 제2의 남편은 파산해서...
다시는 재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나는 그로부터 약 5년 후에 두 번째 남편과 결혼했다. 나는 병원에 다니면서 팔리지 않는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결혼을 한 것은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 문학활동에 있어서라면 그 남자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팔리지 않는 소설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에 나는 결혼이라는 귀찮은 절차는 취하지 않고 애정과 신뢰만으로 맺어진 관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은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결혼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5여 년의 결혼생활은 부부간의 다툼으로 시작해서 다툼으로 끝나는 세월이었다. 다툼을 거듭함으로써 나는 상당히 많은 것을 습득했다고 할 수 있다.
일을 가지고 있는 남녀의 경우 별거결혼이라는 형태가 합리적이라는 말을 들기도 하는데, 나는 (내 기질은) 인간에게 결혼생활 속의 참기 힘든 번거로움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어처구니없는 싸움과 번거로움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은 단련되고 이해력을 깊게 하며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나는 조금 특이한 남다른 남자, 인생의 척도가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남편의 불가해함을 풀려고 밤낮으로 그와 씨름했다.
노력함으로써 나는 그때까지 나에게 없었던 것들을 조금씩 취득하고 축적해 나간 것 같다. 그 축적이 의외로 큰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결혼 12년 만에 찾아온 남편의 파산이었다.
아무래도 인생 척도의 치수가 다른 남자의 파산이니, 세상의 파산 속에서도 상식을 넘어선 막무가내 파산이다. 그 결과 나는 수천만 엔의 빚을 지고 그와 이혼했다.
이혼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왜 빚을 졌느냐고 다른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그것에 대해 상대방을 납득시킬 만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뭐랄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힘이 작용해서...." 라고 귀신에 홀린 듯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다가오는 화마를 보고 무심코 옷장을 짊어졌다는 그 힘에서 비롯한 결과인 것이다. 첫 결혼을 깨뜨릴 때 솟아오른 힘의 몇 배의 힘이 나를 밀고 나갔다.
그렇다고 나는 평소에 재력이 있는 쪽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겁쟁이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게으름뱅이였다. 남편의 재산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일변했고,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어 빚을 지고 내팽개쳐졌다. 친척 친구, 아무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아니,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 폐를 끼치고 있다. 내가 빚을 지지 않으면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강한 여자라고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나를 아는 오랜 친구 중 몇몇은 내가 약한 여자였다는 것, 지금도 아직 그 나약함의 꼬리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강한 여자"가 아니고 "강해진 여자"인 것이다.
나는 화마가 닥쳐 옷장을 메고 있는 사이 팔에 힘이 세져서 장사가 되었다. 두 번의 불행한 결혼이 나를 단련시키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끌어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두 번의 결혼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03-3 불요불굴(不撓不屈)의 남편을 갖고 싶다.
남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엔도 슈사쿠 (*작가 1923~1996 사토와 동연배 친구사이)씨와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토상 당신도 남편 운이 나쁜 여자야, 다시는 결혼하지 마." "아니, 할 거야." 라고 나는 말했다. "한다고? 그만해, 그만해, 변변한 거 없으니까 그만해."
"아니, 한다. 세번째 좀 찾아줘. 35에서 40살 정도까지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빚투성이 혹을 단 마흔여덟 여자, 누가 받지? 받는 자 있으면 상판을 보고 싶다." "무슨 말을 하냐고?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라고 외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는 결혼에 실패하면 질려서 더 이상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한 번, 두 번 경험하면서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아니다. 실패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자신감이다. 사람은 많은 가능성을 내재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기회를 얻으면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어 잎을 무성하게 하지만,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 끝나고 만다. 나는 두 번의 결혼으로 인해 묻혀 있던 것을 몇 가지 발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제멋대로이고 행동력이 없는 겁쟁이였다고. 만약 내가 평온무사한 결혼생활을 하였다면 나는 제멋대로이고 행동력이 없는 소심한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파란을 경험함으로써 여자의 인생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분노와 탄식과 괴로움이 내 안에 묻혀 있던 것들을 파냈다. 내 안에는 아직 매장되어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더 알고 싶고 더 파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세 번째 결혼을 굳이 원하는 것이다.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좋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이라는 것은 재미가 없는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을 바라고 이 나이에 이제 와서 또 결혼해서 남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부양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삶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다. 나의 여자로서의 폭을 세 번째 남편과의 생활을 통해 더 넓히기 위해 결혼하고 싶다. 가능하면 셋째 남편의 아이를 낳아 더 분투하고 싶다.
당신도 부지런히 노력하다 지쳤을 터인데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해서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일이 말대꾸를 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나는 결혼을 안식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세 번째 결혼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결혼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유연성을 잃고 굳어져 가는 것이다. 마흔여덟이 된 나는 그 굳어진 덩어리를 풀기 위해 결혼하고 싶다. 마음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은 역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새로운 힘으로 부부싸움에 나설 것이다. 설령 분노에 지쳐 울부짖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서 자신의 힘을 마음껏 파내어 있는대로 다 써고 죽고 싶다. 그 전에 세 번째 남편과 헤어지는 일이 있다면 네 번째 남편을 더 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과연 그렇게 용감한 남자가 있는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다.
(47세 1971년 부인공론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