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후기에는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뿔 등을 이용한 조각품들이 만들어졌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구석기인들의 소박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술품에는 구석기인들의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들인 것으로 보인다.
<주먹도끼.전곡리>
구석기 후기(기원전 1만5천 년~1만 년)에 그려진 이들 동굴벽화에는 사냥하는인물, 동물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현대인이 그린 그림보다도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힘차고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대개 이 시기시대의 미술은 생명력이 응집된 실제 보이는 바의 생생한 모습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
최초에 이 구석기 동굴벽화가 발견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은 그것이 구석기 시대인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3만 5천 년 전의 구석기시대에 현재 알려져 있는 당시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살았던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생존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찾는 일이었다.
구석기시대인의 삶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도전받는 현실에서 야기되는 야생동물과의 싸움에서 생사가 엇갈리는 긴박감과 긴장의 연속 가운데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숨가쁜 호흡과 비명이 뒤섞이고 뜨겁고 선혈이 튀는 그런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삶의 감각은 강렬하고긴장될 수밖에 없던 그들 의식의 눈을 통한 사물은 생생한 생명력에 넘치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의 표현은 선명하고 사실적이며 생명력에 넘치는 미술이었던 것이다.
<적도마 연토기-굴포리>
여기에는 원초적 삶이 있었을 뿐이고, 생명의 본능과 의지가 무엇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정교한 공감주술을 고안해냈는데, 즉 원하는 결과를 모방하면 그 결과가 현실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동굴 벽에 순록의 사냥장면과 동물들을 그렸다. 그들은 우아한 선, 대칭기법과 화려한 색채사용의 높은 안목을 지녔으며 장면을 세밀하게 모방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특히 동작을 표현하는 솜씨는 빼어났다.
그들 그림의 진정한 목적은 미적 감각을 만촉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량이 되는 동물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심미가가 아니라 주술사였고. 예술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고안된 주술의 일종이었다.오늘날에 와서 구석기시대인이 그린 동물과 사냥 그림이 미술적인 기능을 지녔다고 하는 사실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인이 사냥하려고 히는 동물을 동굴 벽에 그렸던 것은 그림 속의동물을 소유한다는 의미, 즉 그 동물을 잡는다는 실용의 세계이며 곧이어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될 실제사냥과 바로 연결되는 실생활의 생존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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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의 커다란 전환의 계기는 인간이 수렵 채취의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농경과 목축의 생활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직접 싸우고 도전하는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유희의 시간을 갖게 되며, 일정한 곳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삶의 형식이 조직화되고 기능적인 주술에 대신하여 종교적인 의식이 싹트게 된다.
<줄무늬토기>
신석기시대 미술에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요소들이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구체적인 모습과 형상 대신에 상징과 추상화 전형화되어 가는 기하학적인 문양, 사유와 해석이 시작됨으로써 정리와 수정, 강조와 과장 등을 발견하게되었다. 미술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 차원을 넘어 사유의 표현이 이루어지게 되며, 기억의 재현뿐만 아니라 상상의 표현을 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마음 속에 있는 감각적인 것 감성적인 것만이 아닌 개념적인 요소와 사유가 압도해 가는 시대이게 된다. 세계 여러 민족들이 서로 일치하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무늬나 장식은 추상적인 기하무늬이다. 각양 각색의곡선이나 직선, 원, 물결무늬, 소용돌이무늬, 톱날무늬 등이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이와같은 기하무늬가 발생하게 된 원인과 기원은 지금까지 불분명하며 인류의 역사에서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표현 대신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표현, 획일적으로 반복되며 고정된 기호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나타나기시작하여 이러한 경향이 주도적이게 되는 시기가 바로 신석기시대이다.
이제 미술은 생명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표현보다 사물에 대한 이념이나 개념적인 파악과 표현이 두드러지게 되고 실제적인 대상의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품으로는 우선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약간 배가 부른 V자 모양의 토기 표면에 평행으로 사선을 그어서 장식을 하였는데, 선의 방향을 줄에 따라서 엇갈리게 하기도 하였다. 가지런한 선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토기의 무늬는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 주술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줄문 토기발>
원시 미술에서 평행한 사선은 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그들의 중요한 식량인 물고기가 사는 물을 상징하며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된 이후 직선적인 무늬는 곡선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선을 꺾어 돌리는 번개무늬도 나타나게 되었다. 번개 무늬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천둥을 상징한 것이다.
또 이 시대의 미술품은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로 만든 치레걸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이 있었다. 이들 조각품 모두 식량의 풍요나 악귀의 축출을 비는 종교적인 필요에서 만든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렇듯 우리 나라 선사시대의 미술은 생활과 직결되는 기능적인 미술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청동기 시대에 와서부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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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철기 시대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였다.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철기 시대는 사회와 경제가 급격히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 그림등에 반영되어 있다.
잔무늬 거울<논산>
이 시기에는 세계와 인간의 불합리성으로 인한 갈등의 내용들이 미술에 나타나게된다. 청동기시대의 미술도 미적(美的) 충동에 의한 것보다는 깊은 심성적 신앙세계와 연관되어 보이는데, 이 시대 인간의 내적 세계가 얽히고 잠재되었거나 표출되었던 심정적인 내용들이 있고 아직 밝혀지지 못한 청동기 시대인의 내적 복잡한 정신세계의 여러 현상들이 들어 있다. 즉 원시적 도덕관념과 신앙형태의 종합적 현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 시대 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문화현상 들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시기이다. 놀라운 예술성과 다산성의 청동기시대 문화 현상 들은 다음 시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찬란한 문화예술의 시대를 예감하게 해주는 여명의시대이다.
실제로 다음 철기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월등하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많은 예술작폼이 쏟아져나왔다. 바로 새로운 문화현상이 속출했던 시대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면에서나 많은 예술활동이 이 무렵에 있었다. 각종의 청동기 미술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는 청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독특한 것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부장품으로서 지금까지 많이 출토되고 있는 청동검은지금도 무당들이 무구메具)로 사용하고 있으며, 청동거울, 방울 역시 무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기의 미술에는 장식에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 많다. 그 모양이나 장식에 당시 사람들의 미 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청동제 말 조각
새나 말의 조각을 붙이거나 혹은 쌍방울을 단 칼자루끝 장식, 말이나 범의 모양을 한 띠고리, 둘이나 다섯 혹은 여덟의 방울을 단 의기(儀器)등 다양한 미술품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인 돌널무덤등에서 출토된 청동제 의기들은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등을 사실적 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土偶)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면을 쪼아 새긴 바위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에 찬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이 시대 미술품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암각화(岩刻畵)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물고기 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의 표현으로 보인다.
고령의 바위 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등의 기하학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른 농업 사회에서의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서지는 예나 지금이나 개방된 성풍속도.'
밤나무골 유원지는 전국 어디를 가나 성풍속이 문란.
그 진한 꽃향기는 여성의 얼굴을 붉힐 만큼 강렬하다.
밤나무꽃 향기는 사정 직후 남성의 정액 체취와도 같다.
고려의 대표적인 가요, 쌍화점(雙花店) 4연중 첫 대목
고려 여인들의 자유분방한 남녀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
어염집 여인에게 수작을 거는 만두가계 아라비아 상인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몽고인)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1)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2)
두레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3)
술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4)
'삼장사'는 본디 나라의 법사가 속한 사찰.
'내원사'는 본디 왕실에 속하는 비구니 사찰.
쌍화점은 고려 왕실 연회에서 불리우던 노래.
이조시대에는 고려의 성풍습을 비난하는 가요.
역시, 이조왕실 연회 석상에서 흥을 돋구던 노래.
나라의 정권이 바뀌면 옛 왕조의 역사는 각색되듯.
쌍화점은 유교 정권 이조에서 불교를 비난하는 노래.
쌍화점 가사 속의 삼장사(三藏寺)란 국사가 속한 사찰
국사란 일명 삼장(三藏)이라 하며 그 나라를 대표하는 고승
삼장면 삼장사와 쌍화점 가사에 나오는 삼장사는 같은 이름.
삼장면 삼장사(三壯寺)와 쌍화점 삼장사(三藏寺)는 다른 한자.
그러나, 삼장사(三壯寺)도 국사를 배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사 배출 사찰이면 본 이름이 있어도 일명 삼장사(三藏寺)
국사를 배출했다면 신라 시대에서부터 고려 시대 초기일듯.
특히, 쌍화점이 만들어진 고려 말기일 가능성이 높다.
불교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가 창건한 유교국., 조선.
단군의 홍익인간 통치이념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
하여, 단군 조선은 옛 조선이라 하여., 古조선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는 '조선'이라고 불리운다.
'지리산 이야기'에서는 편의 상 <이조>라고 표기.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조선과 구분할 목적.
유교 정권인 이조 조정에서는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편다.
이조 후반 유교 정착 후 지리산의 사찰들을 탄압하고 폐쇄한다.
쌍화점은 이조 정권 하에서는 불교 탄압을 위한 노래로 사용한듯
이조 궁궐 연회에서 고려 퇴폐 성풍속을 비방했던 가요.
이조의 통치이념 유교관이 불교보다 깨끗함을 노래한듯.
그러나, 이조는 기생문화로 유교관과 달리 퇴폐풍조 만연.
쌍화점은 이조 말까지 궁궐 내에서 성행했던 퇴폐 가요.
연산군 무렵에는 궁궐의 퇴폐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된다.
연산군이 삼각산 사냥 후 비구니 사찰에 들러 겁간을 자행.
당시 궁궐 사찰의 비구니는 후궁 또는 궁녀 출신.
왕이 승하하면 후사 없는 후궁 또는 궁녀는 비구니.
그러므로, 젊고 어여쁜 궁녀 출신의 비구니도 많았다.
궁녀는 처녀의 몸이라도., 왕과 혼인한 부부 사이.
그러므로 새 왕이 등국하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전임 왕과 혼인한 몸이라 후임 왕을 섬길 수 없는 몸.
의지할 곳이 없는 궁녀가 몸을 맡겼던 비구니 사찰.
이조시대 승복을 입었어도 그 자태는 곱기만 했던듯.
지금도 꽃 다운 비구니 거처는 외부인 출입 금지구역.
......................양천제..................................
양인에게는 조(租)·용(庸)·조(調)의 세를 부담시키고
그 대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준 양천제.
천인은 국역의무를 면제하는 대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양천제는 중국 진한대(秦漢代) 및 당나라 제도.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후반 삼국시대에 나타났다.
신라 골품제도에서 보듯 양인은 다양한 신분 구성
고려시대 양천제는 혈통적으로 엄격히 구별되었고
천민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양반만 관직이 허용.
이조시대 후반에 들어와 신분제도는 크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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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은 지주 또는 노비 주인으로서 조정 고위관료.
국가로부터 녹봉과 과전을 받고 특별 예우를 받는다.
양반이란 관제상 문무 관직자의 가족. 친족까지 포함.
양인층도 관료가 되기 위한 과거시험 기회가 제공
그러나, 배타적인 양반층에 의해 말단 관료가 한계.
하여, 양반은 지배층, 중인은 향리와 서얼 기술직 잡인
양인은 국가 기간 구성원으로 국가 권력에 예속되었고
신분으로는 양반층 지배를 받던 농민들과 상인.공장 등
토지소유 여부, 빈부 격차에 따라 사회적 예우가 달랐다.
이조 말기로 갈수록 양인 계급끼리도 신분격차.
천민은 이조 신분제도 하에서 최하위 계층에 위치.
그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천민계층 주류가 노비였다.
멸시와 천대 대상이지만 소속에 따라 대우는 천차만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운영했던 양천제.'
법적 제도 상 원칙보다 현실적인 사회 구조를 인정.
전공을 세운 양인과 관노 사노에 대한 신분 상승조치
이조 후기 양인과 노비에 대해 신분상승 기회를 부여.
18 ~ 19세기 사회 경제적인 발전으로 신분 변화 가속화
농업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과 경영형 대지주 부농
양인 지주 출현으로 농민층 분열 및 신분제도 급속히 붕괴.
부를 축적한 노비와 양인은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지배층은 날로 늘고 반대로 피지배층은 격감하는 사태
인진왜란 이후 이조시대 신분 제도는 사실 상 유명무실
특히, 노비층 숫자가 줄어 노비제도 유명무실.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천민이면 그 자식도 천민
그 종래의 법제가 폐지되고 어머니 신분만을 기준
그후 고종 1886년에 노비 신분 세습법 제도는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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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사노비 제도까지도 법적으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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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황제 현종을 미치게 한 여인.
하여, 아편 원료인 꽃 이름이 <양귀비>.
남심 사로잡으려는 여성들의 예쁜이 수술.
보이지 않는 곳의 매력도 빼어난 양귀비.
중국 남성들은 여성의 가는 발목과 작은 발을 좋아한다.
키가 작고 통통했던 양귀비는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
‘한번 웃으면 백가지 교태가 쏟아지고
살결이 희고 몸매가 풍만하고 요염하다.'
신구당서(新舊唐書) 정사(正史)의 기록.
양귀비 외모에 관한 특징을 서술한 내용.
735년 17세에 현종 황제의 황자 수왕의 비.
740년 양옥환이 22세때 현종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고
현종은 그녀를 절에 보내 여승으로 만들고 태진으로 개명
훗날 태진궁(太眞宮)을 지어 태진을 그곳으로 불러 들였다.
이때 현종은 60세였고 양옥환은 22세였다.
5년이 지나 745년에 후궁 중 가장 높은 귀비.
현종이 그녀를 여승으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며느리를 빼앗아 자신의 후궁으로 삼으려는 계략.
아버지가 아들의 부인을 탐낼 만큼 예뻤다는 양귀비.
현종은 상처의 슬픔에서 벗어나 양귀비에게 빠져든다.
그후 현종은 그녀의 매력에 10년간 사로잡힌 채
온천궁으로 세워진 화청궁에서 정사를 망각한다.
그러나, 그동안 어양의 절도사 안록산이 양귀비의 양자가 되고,
양귀비 친척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자 두사람 간에 갈등이 생긴다.
755년 11월 안록산이 20만 대군을 앞세워 장안을 향해 반란(反亂).
9년간 내란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756년 안록산이 낙양을 점령
양국충 일족은 몰살 당하고 양귀비는 38세에 비단 폭에 목메어 자살.
안록산을 추종하는 반란군이 양귀비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중국 서안 화청지의 양귀비 동상.'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화청지.
오늘날 미인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듯..
각종 문헌을 보면 통통한 동양적인 미인.
양귀비 동상과 초상화 속에는 6등신 몸매.
삼백(三白)과 삼홍(三紅)의 미인, 양귀비
작은 키에 10센티도 채 안 된다는 작은 발.
양귀비 미모의 최대 비밀은 피부에 있단다.
하얀 이마, 코, 턱을 지칭하는 삼백(三白)
붉은 입술, 뺨, 손톱의 삼홍(三紅)의 미인.
희고 깨끗한 피부에 어린 소녀 같은 이미지
양귀비는 피부를 가꾸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배꽃, 복숭아꽃, 모과꽃, 사과꽃, 배견화, 홍련화, 살구꽃
7가지 꽃잎을 소주에 담근 후 맑게 여과시킨 화장수를 사용
복숭아꽃이나 살구꽃의 탄닌 성분은 소염, 지혈작용으로 얼굴 잡티 방지
여기에 진정작용을 하는 사과와 피지조절을 해주는 살구꽃까지 사용한 듯.
양귀비와 현종의 온천욕 데이트 역시 그녀의 피부미용에 한몫 단단히 한듯.
화청지는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온천.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 온천물
목욕하면 기분이 상쾌해지며, 관절염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단다.
양귀비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國)·진국부인.
현종은 양귀비의 3 자매도 부인으로 거느렸다.
양귀비는 남방 특산의 여지 과일을 좋아했단다.
현종은 웅대한 지략가이며 음악에 조예 깊은 당대 최고의 풍류객
양귀비는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비파의 명수라 현종을 사로잡았다.
양귀비는 풍만하면서도 잘록한 허리로 유명했다는 서구형의 미인형.
38 나이로 숨질 무렵에는 통통한 몸매였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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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나당연합군 즈음에, 신라의 미녀를 조공 받았던 인물.
한반도 역사상 최초 미인선발 대회는 통일신라에서 이뤄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뒷 배경에는 미스 신라도 한몫 한 듯.
그 뒷배경이 없었다면, 과연 당나라가 신라에 군사를 파견했을까?
그 신라의 미인들보다 현종의 이성을 마비시킨 양귀비의 매력.
60 노인 현종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 했다는 양귀비.
'과연, 현종은 양귀비의 어떤 매력에 빠진걸까?'
양귀비의 두 발이 한손에 잡힐 만큼 작고 예뻤다는 기록.
양귀비는 어린 소녀처럼 몸매가 작고 허리가 잘록한 미인.
현종은 소녀 같은 외모의 양귀비 매력에 흠뻑 빠져든 듯.
하여, 힘없는 노인이라도 그 매력에 취해 힘이 솟았던 모양.
현종은 8세기 인물이고 중국에 아편이 도입된 시기는 11세기.
아편의 원료를 양귀비 꽃에 비유한 것은 무려 300년 후 이야기.
아편의 독성이 그녀 같다고 하여 그 원료를 양귀비꽃이라 명명.
아편에 취하면 양귀비를 품에 안은 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아편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씌여왔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편 (阿片, opium).........................
모르핀 등을 포함한 대표적인 마약의 한 종류이다.
양귀비 꽃이 지고 10일 후 삭과가 채 익지 않았을 때,
특수한 칼로 세로로 얕게 상처를 내어 배어 나온 유액.
그것이 굳으면 주걱으로 긁어모아 약하게 가열,·말린 것.
이것이 생 아편, 모르핀 함유량을 10% 전후로 조절하면 <아편분말>.
황갈색(암갈색) 특이한 냄새에 강한 쓴 맛을 지닌 것이, <의약용 아편>.
생아편을 물에 녹여 증발시킨 다음에 ·농축시킨 엑기스가 <흡연용 아편>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담뱃대를 사용하여
작은 램프의 불로 발연시켜 흡연을 즐겼다.
아편은 진정,·진경,·진통,·진해,·지사,·최면, 마취 목적으로 사용
惡心·구토·두통·현기증·변비·피부병·혼수 만성중독 등등 부작용.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성때문에 오래 사용하면 폐인이 된다.
아편은 습관성 만성중독을 일으키므로<마약법>에 의해 사용금지.
양귀비는 지중해 연안 지방이 원산지로 알려졌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보채면 양귀비즙을 먹여 달랬다.
그리스에서는 기원 전부터 마약제로 사용되었고,
1세기에서 12세기까지..소아시아에서 수입했단다.
아편은 아라비아인에 의해 페르시아·인도, 그리고 중국으로 전파.
중국에 양귀비 첫 도입 시기는 당(唐)나라 때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양귀비의 말린 열매 껍질' 앵속각이 약재로 쓰이긴 11세기 북송시대
원나라 때엔 아편이 설사, 만성 기침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아편 흡연풍습은 17세기 청나라 때. 1729년에 아편 흡연 금지령.
아편은 루손섬에서 중국으로 반입(연간 200상자 :1상자= 60㎏)
1757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인도아편 전매권 장악후 중국수출.
1780년에는 1000상자,
1816년에는 5000상자,
1820년대에는 매년 1만 6877상자
1840∼42년 아편 반입을 금지한 아편전쟁(청나라& 영국).
1850년 난징조약 체결후 5만 6839상자,
1880년 9만 6839상자로 늘어났다.
1906년 10 개년 계획으로 양귀비 재배금지 및 아편흡연을 단속,
1909년 상하이에서 영국과 국제회의를 열어 아편수입을 중단 노력.
한편, 한국에서 앵속자·앵속각 등이 약용으로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
아편흡연이 주목된 것은 <오주연문장전산고>중<아편연변증설>부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에 청군이 주둔하며 아편 해독이 널리 퍼졌다.
1905년 아편흡연 수입·제조·판매 금지규정.
1912년에 조선형사령>이 제정되었다.
1919년 <아편취체령>과 시행규칙을 제정
아편제조 허가자 外 양귀비 재배 엄금,
1957년 아편제조 양귀비 재배 엄금, 마약법 제정
오늘날,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지는 아프가니스탄
마약 생산이 전쟁과 탈레반 정권의 붕괴로 중단됨
따라서 태국. 미얀마. 라오스 국경, 황금의 삼각지대.
그곳의 양귀비 재배가 점점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
히말라야 산맥 남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메콩강 유역.
미얀마 태국 라오스 3국의 국경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이곳 황금의 삼각지대는 전통적으로 양귀비 재배 지역.
최근까지 전세계 헤로인의 약 60%을 공급하던 곳이다.
태국 군에 따르면 황금 삼각지의 마약 거래 두목들
고산지대의 소수민족들 통해 본격적인 양귀비 재배
그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고 방콕 포스트가 9일 보도.
현재 마약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을 해야만,
의료용 원료는 국제연합기구에서 할당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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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살펴보면, 중국의 아편 역사는 11세기 이후.
아편은 기원 전에 그리스에서 사용, 소아시아에서 수입.
아편을 그리스에 수출했던 소아시아는 어느 나라 였을까?
그당시 항해술과 무역이 발달했던 해상왕국은 불과 몇몇 나라이다.
그중 삼한과 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무역국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조때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 장군의 선조 백제도 유력한 해상왕국
아메리카 대륙은 신천지 역사 이전부터 원주민 인디안은 몽골리안.
인디안은 원래 아시아 민족이며 백제와 무역 교류가 있었다는 학설.
인디안 식생활, 아이 업는 풍습, 물동이 이는 풍습이 우리와 비슷하다.
금을 좋아하는 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아메리카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한반도의 고대국가가 무역상품으로 아편을 취급한 것은 분명한 듯.
그렇다면, 세석평전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마약 원료를 생산한 곳.
세석평전이 영토였던 <가락국 신라 백제 삼한>시대 어느 한 시점일 듯.
우리나라 고대국가에서 금 가공 기술이 일찌기 발달했던 나라는 가락국.
지보등은 현재 명선봉을 말하고 오공능선 입구의
1426봉은 꽃대봉을 가르킴을 이태의 남부군에 나옵니다.
또한,풍수학적으로는 12방위의 4번째 봉우리해서 묘봉입니다.
마고할미는 노고단을 성모여신은 천왕봉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혼동하여 사용하는 책도 보았습니다.
그리고,선인들의 지리산 유람을 번역한 어떤 책에는
김종직 선생이 천왕봉으로 올랐던 경로를
함양-화림-방곡리-쑥밭재-하봉-천왕봉으로 설명한 것이 보입니다.
함양-휴천면 운서리-함양독바위-청이당 터-
-영랑대(말봉)-소년대(하봉)-천왕봉이 바른 경로입니다.
지리산 인문지리 연구는 1988년에 나온 김경렬님의
<다큐멘타리 지리산 1,2>가 최초 입니다.
지리산 소개 책자의 원조로 나중에 편찬된
책에서는 이책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 국립지리원에서 나온 지리산 지역 1:25,000 이나 1:50,000 지도와
산전문 잡지에서 나온 지도와 다른 책자에서 나온 지도도 오기가 보입니다.
이것은 국립지리원 지도를 기준으로 제작했으므로 생기는 것이지만,
원본인 국립지리원 지리산 지도부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되겠습니다.
♥ 이상은 제가 마을 주민에게 고증한 것이 아니라,
지난 80년대부터 널리 사용되던 제가 알고 있는 지명으로,
지난 60,70년,80년대 지도와 책자에 표기된 지명을 참고했습니다.
산행기나 후기를 쓸때는 지리산에 대한 지명에 대해서 철저한
고증을 거친후에 신중하게 새로운 지명을 사용해야 하고,
잘못된 지명이 되지 않도록 지도,책자를 보는 습관이 필요할듯 합니다.
♥ 얼마전에 늘 지리산을 꿈꾸는 분들이 지리산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지리산을 제대로 공부하여 지리산학을 정립하고
올바른 등산문화를 알리는 취지를 보고 많이 공감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지리산을 소개하는 책자,동호회,사이트에서는
진정 공부하는 자세로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지리산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길상봉 주능선상의 삼신봉은 허우천씨가 연하반 우종수님께(지리산등반지도를 만들당시) 삼신봉으로 명명하자고 하셔서 그렇게 했답니다, 원래 이름이 삼신봉이었다는 말씀은 어디에 근거한 말씀인지 궁굼합니다, 2004/05/13 x
중봉 전 로타리 산장 관리인이신 조재영님의 증언에 의하면,
연하봉,연하천,산희샘,총각샘등의 명칭이 구례의 연하반(지리산악회)에서
60년대에 지도 제작을 할때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때 삼신봉(어떤 책에 나오는지는 찾을수 없었고,
60,70년대 지도에는 연하봉 하나만,80년대 이후에는
삼신봉,연하봉이 따로 표기됨)을 연하봉이라 표기함...
현재 공단에서는 일출봉 다음의 봉우리에 연하봉 이라는 표지판을 세웠지만,
70년대 이전 지도에는 지금의 속칭 꽁초바위를 연하봉이라고 나옵니다. 2004/05/13
길상봉 연하봉은 속칭 꽁초바이를 지나면 -천왕봉쪽- 왼손편으로삼각형 암석을 연하봉이라 명명했답니다, 우종수 회장님이 연하봉을 배경으로 서 계시는 옛사진이 있습니다, 삼신봉은 꽁초바위 못미쳐 있는봉을 말하며 허우천님께서 삼신봉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우회장님께 하셔서 그렇게 명명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우회장님께 여쭈어 확실한 명명 유래를 올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연하천, 연하봉, 날라리봉-낫날봉이 아님, 현재 삼도봉- 덕평봉등은 당시로서는 이름이 없는 봉우리를 이름을 지은것입니다, 총각샘은 의신에 사시는 총각(?)-약초꾼이며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 였다고함- 에게 물어 찾은 샘으로 그분을 기려 명명했었답니다, 연하반은 1957년 빨치산 부역자 2명을 고용하여 천신만고 끝에 지리산 종주를 했었습니다, 당시 구례에서는 구례읍 유지분들이 모두 나와 천왕봉 등정에 나선분들을 성대히 배웅해주어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몇일씩 산에서 자며 등산을 한다는 사실이정말 어려운 실정이었답니다, 어려운 종주등반을 마친 연하반은 이정표를 만들어 등산로에 부착하는 활동을 시작했으며 등산지도를 만드는일에 착수했습니다, 등산로를 걸음으로 재고-한걸음 60cm- 샘을 찾아 정비하고 무명봉우리에 이름을 부치고, 등산로를 개척하고....그러다보니 산희샘이라는 이름도 생겼구요....연하반은 지리산을 최초로 개척한분들입니다, 아마 유명한분들이 그런일을 했었다면 더 존경을 받았을겁니다, 조그마한 마을 구례분들이 한일이라 잘못한일만 들추어 내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연하반이 지리산을 개척한일은 마땅히 존경 받아야합니다, 당시 연하반회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지리산에 조건없이 바쳤습니다, 중봉님께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신다면 연하반이 한일중 비록 잘못된 부분이 있을 지라도 비난은 안하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종수회장님은 산행을 하시진 못하지만 현재 건강하십니다 중봉님께선 지리산의 역사를 정확히 밝히시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시면 우종수회장님을 한번 방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언젠가 중봉님을 뵙게되기를 기대합니다, 2004/05/13 x
중봉 혹시 길상봉님이 우두성님이 아니신지...
맞다면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부친이신 우종수님을 지난 80년대에 지리산에서 몇번 뵌적이 있습니다.
6.25 후에 지리산을 개척한 구례의 연하반의 업적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연하반에서 만든 지리산 지도를 잊지 못합니다.
우종수님과 우두성님의 2대에 걸친
지리산 사랑은 책으로,기사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화산농원을 찾아가서 지리산 개척기 역사를 들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