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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는 표제어는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입니다. 본시는 ① “다윗의 믹담 시”입니다. 황금 같은 시입니다. 신앙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궁극적 결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라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로운 시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 열매인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는 맛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 등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본시에 그렇게 놀라운 비밀을 자신의 황금상자 속에 넣고 쉽게 열리지 않도록 꼭꼭 봉해두었습니다. 평상시는 물론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 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열어볼 수 있습니다. ② “영장의 노래”입니다. 음악에 관한한 가장 탁월한 경지에 도달한 지휘자의 인도에 따라서 공개적으로 부를 때 가장 빛을 발하는 노래입니다. ③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입니다. “알다스헷”은 “멸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취지를 간명하되 충분히 전달해 주는 금언적인 노래입니다.
동시에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알다스헷”에 맞춘 시편들은 모두 네 편(57, 58, 59, 75)입니다. 모두 다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파멸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자손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정통 유대인들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불신자들과 생명의 복음을 육신의 정욕을 채워주는 수단 정도로 왜곡해서 증거 하는 무늬뿐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④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대적하는 것을 넘어서서 죽이기로 결단한 사울을 피해서 동굴 깊숙한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곧 동굴 입구로 달려 나왔습니다. 감미롭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던 구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장은 도망자 신세에 불과하지만 곧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대적들의 손으로부터 건져 주실 하나님을 기억해 냈습니다. 기대 이상의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했습니다. 마치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기쁘고 즐겁게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을 구하는 자신을 속히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9월 십일조 기도회 셋째 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혹독한 환난과 시험이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누구를 떠올립니까? 하나님입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니까? 구원의 확신 속에서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녹아 있는 찬양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57:1a)라고 시작됩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56편과 같은 시작입니다. 시인이 고난을 받던 시절에 지어졌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56편에 비해서 “간구”라는 측면이 조금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당시 시인은 사울의 낮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장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급한 대로 당장 눈에 띈 동굴로 숨어들어갔습니다. 혹 시인을 잡기 위해서 도처에 깔려 있었던 세작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사울에게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57:1b)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깊이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심연深淵같은 고난과 위협이 다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해 들어가 있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도움을 구하는 백성들을 책임지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시57:2-3a)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십니다.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통치하십니다. 우리의 소원이 당신의 뜻과 맞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내십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이루어 내십니다. 한 번 맺은 약속에 관한한 절대로 변치 않으십니다.
신실하십니다. 반드시 이루어 내십니다. 약속의 대상인 우리는 물론 상황이 아무리 급변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한 분만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베풀어 주십니다. 희한한 기적들을 베풀어 주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랑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삼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원수들은 엄하고 꾸짖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깨뜨리십니다.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들의 악한 손으로부터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 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내주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사43:3-4)라는 선지자의 외침대로, 제아무리 많은 대가라 할지라도 기꺼이 치루십니다.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 모진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난과 시험의 때에 바로 이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셀라”가 등장합니다. 이는 악보의 쉼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회상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에서 혼자 양을 치고 있던 그를 항상 지켜주셨습니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흉악한 짐승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난공불락의 성 같았던 골리앗과 일대일로 맞서서 벌였던 전투 때에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과 용기가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3b-5)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울은...‘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여라. 그들은 다윗의 편이다...그가 도망친다는 것을 알고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신하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에게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도엑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그 날, 도엑은 세마포 에봇을 입은 제사장 팔십오 명을 죽였다...또 제사장들의 성인 놉의 백성들도 죽였다. 도엑은 칼로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갓난아기들을 죽였고 소와 나귀와 양도 죽였다.”(삼상22:17-19)라는 말씀에 따르면, 사울은 거의 미쳐 있었습니다. 시인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제사장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사장들의 모든 가족들은 물론 그들이 치고 있던 짐승들까지도 몰살시켰습니다.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까지 지워버렸습니다. 잔인함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에게 충성을 다짐한 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인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는 시인에 대한 증오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숨어 있던 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은 위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가 질린 상태에서 쓰러질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킵니다. “진리”는 공의의 기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선악을 심판하십니다. 그렇다고 전제적專制的이시지 않습니다. 독선적이시지도 않습니다. 편협하시지도 않습니다. 선악에 대하여 공평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로 판단하십니다. 심판하십니다. 이미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회상한 시인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확신이 넘쳤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든든함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인자 곧 사랑과 유일한 판단 기준인 진리를 근거로 심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시57:6)라고 이어집니다. “빠졌도다.”는 완료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에 벌어지게 될 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언적 과거입니다.
시인이 아무런 허물과 죄도 없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던 사울이, 결국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발목이 잡혀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치 국면에 놓여 있었던 나라와 민족의 안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사로운 명예회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시인을 잡기 위해서 정예 부대를 동원했습니다. 블레셋이 선전포고도 없이 군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돌아서기는 했지만, 때로는 자신이 직접 사천 명이 넘는 군사들을 이끌고 시인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은신해 있다는 제보를 받을 때마다 주변지역을 이를 잡듯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비참한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해 버린 시인을 더욱 긴장시켰습니다.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정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시인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또 다시 “셀라”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기도를 멈췄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일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혔습니다.
더욱 담대해졌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 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7-8)라고 외쳤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해졌습니다. 위선자들처럼 입술로만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올라오는 진실한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이제는 깨어나라고 외쳤습니다.
손에서 내려놓았던 비파와 수금을 다시 들었습니다. 만물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실로 엄청난 기쁨, 감사, 감격,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발적으로 결단한 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계속해서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9-11)라고 외쳤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이라도 맛본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더욱더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방을 향해서 자신 안에 충만하게 부어진 감사와 감격과 감동은 물론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만백성과 우주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소리 높여서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하늘에 닿을 만큼 크고 위대하며, 하나님의 진리는 구름까지 미칠 만큼 우주에 충만하다고 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인자와 진리의 높이와 길이와 넓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하다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추구해왔던 지극히 육신적인 영광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직 인자와 진리로 충만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인자와 진리로 무장하신 하나님을 기억해 내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원수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시인에게 부어졌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웠었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주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피조 세계를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한 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대적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 인자와 진리로 무장하신 하나님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삶, 입술만 울리는 위선자들의 찬양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삶,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역사에 대한 벅찬 기대 때문에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치는 것은 물론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 그 은혜들이 부어질 수 있도록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방에 증거 하는 삶,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 만끽하는 9월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