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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패러다임의 열 가지 원리 - 4
9. 우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경험하면 변화는 우리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리학은 시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의식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불사의 생리학-을 보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불변성의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불변성은 변화의 결과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용하여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시간의 압박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온갖 미묘한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생리학자라면, 우리가 수백만의 얽히고설킨 심신 상관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의 연쇄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에 얽매인 과정들을 재 정돈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신체를 뇌와 모든 세포 사이를 왕복하는 신호들의 출력물로 생각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정하는 신경계는 신체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입력물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일 틀림없다. 심신상관 체계 속에서는 매초마다 수천 개의 결정이 내려지고 생명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사건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근육의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가 보낸 화학적 신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뇌하수체에서 보내진 특별한 화학물질(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반응하여 부신피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촉발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반응과 관련된 분자 차원의 작용을 생화학자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자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적 반응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몸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가능한 반응-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할(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모든 기초 생리기능들-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 작용-은 코브라가 나에게 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의 다음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당신은 이 의미란 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대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체 기관은 다른 모든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순간마다 뇌 속의 수 십 억의 원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대뇌는 일평생 단 한번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전기파로 회오리친다. 뇌의 기본적인 화학작용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변화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그 기억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선택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변화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음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얽매이는, 일상적 인과의 세계에서 생기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두려움을 학습했다. 나의 모든 반응은 시간에 얽매인 자아와 그것이 지닌 성향의 요체이다.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프로그램되어 있던 공포가 일련의 신체적 신호의 연쇄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결정자(decision maker)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온갖 규정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의 순수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경험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수초 내로 나는 자신을 상기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은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를 초월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변함없는 '나'는 경험에 있어서 나의 진정한 기준점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기준점은 변화와 쇠퇴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상대적 세계가 부과하는 모든 시간에 얽매인 조건, 예컨대 고통 아니면 기쁨, 빈곤 아니면 부요, 행복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동일화되어 있다. 일체의식 속에서는 이 세계는 영혼(Spirit)- 곧 의식-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지상의 목적은 영혼으로서의 진아와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도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경험이 실현될 것이다.
10. 우리는 노화와 질병과 사망의 제물이 아니다. 이들은 풍경의 일부일 뿐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는 자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은 창조이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지능과 접하게 되면 당신은 생명의 창조적인 핵심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분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의식에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은 대부분의 기초 신체기능들이 우리의 정신상태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가지의 변화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명의 광경일 뿐이다. 이 막 뒤에는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곧 흐르는 의식의 근원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모든 목표와 기대치는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의 성현들이 진아라고 한 그것은 현대 심리학 용어로 의식의 연속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이다. 즉, 가면과 환상과 벌어진 틈바구니와 파편이 없는 자신의 연속체 전체를 간파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종류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물질적 존재의 영역들이 우리의 지배를 벗어나 질병과 노화와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의식이 파편화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인도의 저명한 영성가인 스와미 라마는 의지로써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70회에서 정상치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
.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심장이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의식의 직접적인 명령 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박동수가 정상이다가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불과 수 분만에 죽는 사람들 -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 실제로는 의식의 손상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손상의 원인을 심장근육의 탓으로 돌린다. 즉,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주관하는 전기화학 신호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 개의 세포들이 전체의 유연하고 통일된 운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혼란스럽게 수축하여 심장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심장전문의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은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심장세포 가운데서의 의식 손상이 1차적인 원인이다. 이 의식의 손상은 국부적인 손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손상이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모든 몸 세포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지능의 심층차원과의 통신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상, 모든 세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층의 패턴으로 조직된 지능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와 같은 도인은 우리의 의식이 그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지능의 흐름의 근원이며 경로이며 목표임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이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즉 의식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굽어보고 있는 의식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과 노화와 사망의 제물이 되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지능을 잃는 것이고 지능을 잃는 것은 지능의 최종산물인 인체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이것이다. 즉,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의 자아관(自我觀)의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전함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것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전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베테랑 선원들은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선원들은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임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단서를 잡아,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노화시키거나 병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포기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에 단계적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것을 견뎌 내어, 세포가 스트레스에 의해 파괴되는 증세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노화는 대부분 절망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상상이 노인들의 높은 발병률과 노인성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자기충족적인 기대를 가져다주었다. 노년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허약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전체는 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노인들이 40, 50대의 원기 왕성한 건강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정-인간은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의식의 전환이 새로운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우주관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주관이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어떤 논리적인 틀 속에 정돈하는 하나의 방식론일 뿐이다.
노화는 모든 것이 변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자연계의 틀 속에서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지능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는 그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다. 어느 쪽의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보기로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끝없는 생명의 물결로 보기로 할 수도 있다. 다음 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물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순간이다. 우리 자신과 우주를 유물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유폐된 측면이 과도한 중요성을 지니게 만든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러분들의 우주관이 바뀔 때 존재란 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고형적인 물리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강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신성한 강 말이다. 이 책 속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자신의 평화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생명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과도 같이, 나의 몸은 순간의 바뀜과 함께 변화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어떤 공백도, 새삼스러운 고통을 일으킬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두려움을 가져올 미래의 상처에 대한 예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생명의 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인식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있는 어떤 지능이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인 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 속에 짜여 들어 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에 버금가는 그런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은 그처럼 웅대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강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원했다. 이 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낡은 관점이 간과해 왔던 지식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들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당신의 몸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화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신체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입력시킨 것을 수행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당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과 가정에 지배받는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물질세계를 가져다 준 사념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적 자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대해서 편안해지면, 질서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공포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세계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식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강에게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물질주의가 조장해 온 망상은 우리가 강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유일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큰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 속에 집약되는 에너지, 정보, 그리고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무한의 창조성은 그 육적인 형태로서 당신의 세포 속에 육화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의미, 가능한 모든 진리, 가능한 모든 창조로 충만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침묵 속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원자의 핵심 속에 존재하는 공은 우주의 자궁이다. 두 개의 뉴런이 상호 작용할 때 명멸하는 사념 사이에 새로운 세계 탄생의 기회가 존재한다. 이 책은 시간의 호흡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침묵의 탐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