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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트힐 원문보기 글쓴이: 꽃별
우리에게 친숙하고 한국의 밀레라 불리우는 박수근님의 작품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박수근님은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출생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화단에 등장하였습니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고, 19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1959년 제8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을 지냈습니다.
작품경향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나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겠죠. 햇살정원 미슬관에 자료가 다운 되어 부족하나마 정리해 봅니다.
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
노상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이라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노상의 사람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골목안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음에도 아니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번이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春日"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 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져 버렸습니다. 나무와 여인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아기업은 소녀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소녀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일하는 여인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굴비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복숭아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귀로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낙담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 . .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상처 귀로박수근의 그림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부친은 광산사업을 실패하고 잇따라 전답마저 잃어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큼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인정을 받아 일본인 교장 선생은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마을풍경 그의 16세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은 격려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볼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고, 그는 1932년 11회 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그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몸져눕게 되고 결국 그의 나이 21세 때(1935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물캐는여인 박수근은 이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지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위아랫집으로 살던 김복순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초에 직장 생활을 위해 본의아니게 별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맷돌질 하는 여인 이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우체부가 투덜댈 정도였다. 남편 박수근은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편지에 그곳이 몹시 춥다고 쓰자 아내는 자신의 털실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텔 스웨터를 짜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짜보냈고 남편은 그에 감격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모란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득문득 이 분의 살아온 행적들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그도 아니면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선한 이웃 어른의 모습들과 중첩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구김살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주는 자상한 아버지. 안으로는 세상의 모든 풍상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바깥 세상의 온갖 풍상들을 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의 모습.풍경 박수근 세대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어려서는 식민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궁핍을, 해방 이후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들의 자식이 베트남 전쟁이란 외국의 전쟁에 파병되는 경험을 했다. 초가마을 실제로 박수근의 자식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연배 세대가 경험한 세 차례의 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겪어내야 했을 무수한 상처들 중 가장 두드러진 체험이였을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박수근은 동생 동근을 병으로 잃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 이르자 1944년엔 자신을 제외한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의 본가로 내려보낸다. 그들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맞이하는 첫 번째 이산이었다. 해방된 후인 1948년엔 맏아들인 '성소'를 '뇌염'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던 중 다시 가족과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그의 셋째 아들 '성인'이 죽는다. 박수근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은 일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서 남성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 . 독특한 기법 강변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에 대하여~ 화가는 화강암의 질감과 색조를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아마도 그가 강원도 출신으로 타지역보다 유난히 돌이 많은 산간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돌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것을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귀가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이끼낀 듯한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마티에르를 창안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상의 평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박수근」열화당)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가의 아호는 미석(美石)으로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조선미전 도록에 한 번 실린 적이 있을 뿐 별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소녀들 박수근의 화강암 질감표현 과정 이러한 화강석의 질감을 내기 위해 화가는 여러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윤범모 씨가 이러한 과정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을 기초로 분석하였다.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이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제작과정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화 첫째, 캔버스의 바닥 면에 기름을 섞지 않고 뻑뻑한 체로 물감을 칠한다. 둘째, 캔버스의 결을 따라 가로 세로를 번갈아 가며 제소를 바르지 않은 마대로된 캔버스에 올의 우둘투둘한 요철에 의해 질감이 나타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칠한다. 이 때 어두운 색깔로 10~15회 바탕칠을 반복한다. 셋째, 반복적으로 칠해진 물감은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마티에르(질감)을 형성하는데 마른 후에 나이프로 크게 뭉쳐진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본래의 고유색이 마모된 상태로 남는다. 들길 넷째, 화강암의 깊이 있고 묵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암갈색으로 반복적으로 붓질을 하여 바탕 처리를 한다. 다섯째, 그렇게 된 바탕 위에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색을 칠한다. 여섯째, 마티엘 간의 부조화 부분은 十자 모양의 붓질을 다시 하면서 마무리한다. 시장 그는 실제로 화강석을 옆에다 두고 그 질감을 관찰해 가며 작품 속에 이를 재현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처럼 화강암에 애정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돌이며 수많은 조각이나 암각화의 재료로써 민족적정서 를 담고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귀한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이라는 흔한 돌멩이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박한 보습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이상 부분적으로 박수님의 기록과 작품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는 많은 고생을 하였지요. 전쟁 통에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고 부두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지금, 그의 작품들은 한국 화단에서 최고가에 거래 되고 있다는군요. ( 정병윤 하늘. 땅.고향 수채화 갤러리 http://cafe.daum.net/jby./Ja0i/95리)
국민화가 박수근(1914∼65) 아들 성남(1947년생)씨.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읜 성남씨는 대를 이어 화가로 활동 중이다.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2010년 5월 7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작품들>
제2회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해 특선한 '우물가'(1953년작), 제3회 국전에서 입선한 '
절구질하는 여인'(1954년작), 작고 후 1965년 제14회 대한민국 미술전에 전시됐던
'유동'(1963년작)을 비롯'골목안' '나무와 두 여인' 등 50년대와 60년대 작품 활동의
절정을 보여주는 총 40여점이 전시, '목'련(1960년작), '아기업은 소녀'(1960년대 작,
1964년작) 등
아기업은 소녀
감자
아버지의 작품은 가난했던 시절,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따뜻한시선으로
붓질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요강을 비운 다음 식사를 하시고는종일 작업하다 해질녘에 나가셨다 막걸리 한 잔을 하시고 돌아오는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다고..
골목안
서울 창신동 집 마루에는 아버지 작품으로 가득했는데 한 점 팔면 쌀을 사다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과묵하면서도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성격으로 늘 즐겁게
작업하셨다. 어머니와 금실이 좋았다. 부모님이 처음 만난 곳이 빨래터이기 때문에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특히 아꼈다.
귀로
사람들이 그림값 얘기를 많이 하는데 예술이 투기의 대상은 될 수 없고 한국작가 중
최고가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피카소 작품이 수천억원을 호가하듯이 아버지 박수근
작품도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값어치로 보면 한참 더 올라야 한다. 하지만 투기로 값이올라서는 안된다.
나무와 여인
아버지는 총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일제시대에도 우리것을 꿋꿋이 지킨 애국자다.
안중근 의사 못지않게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색에 흰색을 섞으면 사랑을 상징하는
분홍색이 되고 청색애 흰색을 섞으면 평화를 상징하는 하늘색이 되듯이 아버지는 세상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림을 그렸다.농악
아버지는 나에개 동화를 많이 그려주었다. 이순신 을지문덕 등 신문에 게재되는 역사인물
소설도 많이 읽었다. 가난을 즐겼다. 태백산맥을 좋아했고 결혼도 태백 금성에서 했다. 장욱진화백과도 자주 만났는데 인사동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주신 적도 있다.
독서
박성남=아버지는 순경이 오면 방안에 숨을 정도로 법을 어기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다.
외삼촌은 주먹 이정재의 부하였는데 그림이 팔려 쌀을 사면 와서 지고 가버렸다.한번은 외삼촌이 주먹으로 쪽문을 부수자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와서 '주먹으로그것이 부서지겠느냐. 이걸로 하시게'하니깐 그 뒤로 외삼촌이 다시는 집에 와서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착하시지만 그만큼 또 우직한 성품의 아버지였다.
두 나무와 두 여인
내 초상화를 그려주셨는데 6시간 정도 그렸다. 6.25때 동생이 죽고
위 형은 뇌염으로 죽고 나서 아버지가 혹시 이산가족이 될지도 모르니
초상화 하나쯤은 그려 두어야 겠다고 해서 그린 것이다..
모란
세 여인
시장의 사람들
시장이 나오는 작품들에서 인물들의 배치는 매우 재미있다. 시선의 방향이나 배치로 인한
구도의 변화가 동감을 유도한다. 시장의 여인들은 시장 작품보다 인물의 밀도가 더 두드러진
작품으로 인물의 설정이나 구도가 나열식인데 비해 이 작품에선 인물들이 겹쳐 상황의
긴박감이 훨씬 고조되어 있다. 장터의 열기가 전달되어 온다.
우물가
박수근은 독학으로 시작, 18살인 3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기 시작해53년에는 국전에 참가하기 시작해 59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50년 6.25 전쟁 발발하자,남하한 박수근은 51년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노동으로 생활하면서 다시 그림을그리기 시작한다.52년 미8군 PX(현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그리기 시작했고 39세인 1953년,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를제작공간으로 삼아 창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중단됐다가53년 가을에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 미술전(국전) 서양화부에 <우물가>를 출품해 특선하고,<노상>은 입선하였다. 이때부터 소박한 주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흰색,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인 색채에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특징적인표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동
1965년 51세의 박수근은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다.
회복이 어렵게 되자 5월 5일 퇴원하여 전농동 자택에서 6일 새벽 1시에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
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작고한다. 이후 열린 제14회 국전에 부인 김복순 여사가 본 작품<유동>을 전시하였다. 이후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유작전을 개최하였고 이때 79점의작품을 전시했다.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만들지 못한 도록을 44년만인 2009년 10월 정식 출간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갤러리현대 두가헌 갤러리에서 유작전이 다시 열렸다.그의 국전 마지막 작품이 된 <유동>은 골목길에 나와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소녀들에서
한 시대의 풍정과 그가 마지막까지 애착을 보였던 서민생활의 단면이 정감깊게 떠오르고 있다.
절구질하는 여인
1954년 제3회 국전에서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이다. 박수근 화백 40세때의 일이다.
당시 작가는 미군 PX에서 초상화 제작을 그만두고 자신의 작품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청소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