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이유
1. 조선은 인의예지의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이고, 숭례문은 그 중 '예'를 상징한다.
2.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숭(崇)과 례(禮)라는 모두 한학에서 불에 해당하는 글자들을
남쪽에 두어, 관악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아, 국가적으로 좋지 않은 일을 막는다.
3. 현판이 세로로 쓰여진 까닭은, 숭과 례라고 하는 불을 상징하는 글자들이 더욱 더 활활
잘 타오르도록 하여, 2번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초기 도읍 터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무학(無學)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관악산을 정남향으로 바라보고 궁궐을 세우면, 관악산의 살기가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먼저 있었다.
화기는 화재와 병란을 암시한다.
그러자 남쪽에 둘리어진 큰 강물인 한강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내니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으로 궁궐을 세워도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대두하였다.
결국, 궁궐은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을 하고 세워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양에정도(定都)한 이후로 도성에는 왕자의 난과 화재가 연이었다.
그래서 풍수설에 따라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를 끊는다는 비보책(裨補策)으로
서울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연못뿐만이 아니다. 남대문의 현판에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씨도 결국 세로로 쓰여지게 되었다.
현액(懸額)의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이다.
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것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화기가 도성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였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리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이는 화(火)에 속한다.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따라서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이 되니, 이는 맞불 작전인 셈이다.
그리고 모양으로 보아,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써야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숭례문의 화기로 불산에서 옮겨오는 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로로 쓴 숭례문의 현판이 정도전의 솜씨라는 점이다.
결국은 정도전이 무학대사에게 지고만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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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세로형
숭례문 현판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검은색 흑칠을 한 바닥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돋을새김하고
백분(白粉)을 칠한 것은 조선시대 궁궐 현판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이다.
하지만 3~4자로 이뤄진 현판이 대부분 가로글씨인 것과 달리 숭례문 현판 글씨는 세로로 쓰여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이나 도성 현판 중 세로형 현판은 창덕궁의 어수문(魚水門)을 비롯해 5건에 불과하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관악산 화기설(火氣說)이다.
한양의 지세를 풍수학적으로 봤을 때 조산(朝山)인 관악산에 비해 궁궐이 있는 한강 북쪽의 지세(地勢)가 너무 약했다.
풍수가들은 예로부터 불의 산(火山)으로 불렸던 관악산의 화기가 왕이 있는 궁성을 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화기를 막아낼 목적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불의 성격을 가진 글자인 례(禮)를 이름에 넣는 것으로 모자라,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의 글자 숭(崇)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섰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기록에는 경복궁의 미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이미 지어진
숭례문을 보다 높게 수리해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 내용이 담겨 있다.
◆양녕대군인가, 신장인가
화재로 파손된 현판(왼쪽)과 새롭게 복원된 모습.
숭례문 현판 글씨는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판 자체에 글 쓴 사람의 낙관이 없고 실록 등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신장·안평대군·정난종·유진동 등이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그 중 주요 인물로 언급되는 이가 양녕대군과 신장, 그리고 유진동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을 썼을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까지 양녕대군이 공식적인 숭례문 현판의 서자(書者)로 인식돼왔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문신 신숙주의 아버지인 암헌(巖軒) 신장(1382∼1433)이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고 주장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다.
그는 『완당전집』(阮堂全集) 제 7권에서 “숭례문 편액(扁額)은 곧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에까지 치고 들어 갔고…”라고 썼다. 지난해 그의 후손들이 펴낸 책 『암헌 신장전기』(태학사)에는
“숭례문 현판이 당시 조선시대 현판글씨의 전형인 설암체를 따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 초기 설암체의 대가였던 신장공의 글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다.
◆현판 교체 가능성도
죽당(竹堂) 유진동(1497~1561) 역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백과사전 『주영편』(晝永編)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펴낸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 그가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원은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 대감이 윤성진 대감과 함께
문루에 올라가 판각을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고 한다”며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 다시 쓴 것인가 싶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양녕대군이 쓴 것이 화재로 손상되면서 유진동이 고쳐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유진동의 전기 『죽당 유진동』(한들출판사)은 이 기록을 토대로
“신장이 먼저 쓴 것을 양녕대군 혹은 안평대군이 고쳐 써 달았고,
세월이 지난 뒤 정난종, 유진동이 새로 고쳐 썼을 수 있다”고 추리하고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숭례문 글씨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현존작품이 별로 없어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누가 썼느냐의 문제를 떠나 숭례문 현판은 조선초기 현판 글씨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