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영웅, 6.25 전쟁 참전 여군
박광일
(여행작가)
전쟁은 가끔 특별한 역사를 만든다. 바로 대한민국 여군(女軍)의 역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여자학도호국단이나 여자항공교육대가 있긴 하지만 군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산성에서 돌을 날랐던 여성들도 있긴 하지만 군인은 아니었다. 물론 일제와 맞서는 독립전쟁 과정에서 광복군의 오광심, 지복영 선생을 비롯해 의용대의 박차정 선생처럼 직접 총을 들고 전쟁에 나선 역사가 있지만 여군은 여전히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숫자에서 열세인 군사력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 개전 직후 급속도로 사상자가 발생하며 단 한 명의 군인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에 나라의 부름이 있자 여성들이 호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속에서 가족, 이웃의 참상을 보며 조금이라도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첫 번째 움직임은 해병대에서 나왔다. 1950년 8월, 제주도에서 모병한 해병대4기, 1300명 중 126명이 여성이었다. 그들 여성 해병대 가운데 교사도, 대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학생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전쟁을 극복하겠다는 열의만큼은 남자에게도, 어른에게도 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뜻이 있다고 모두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해에서 진행된 훈련 과정에서 126명 중 72명만 군번을 받고 54명은 귀가를 해야 했다. 그리고 훈련 과정을 마친 72명 가운데 24명은 부산 해군본부에 배속되고 48명은 진해 해군통제부에 배속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여군의 시작은 1950년 9월 6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육군의 여성의용군이 출범으로 보기도 한다(이날을 ‘여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지원했으니 역시 대단한 열기였다. 이 가운데 491명이 수료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1950년 11월, 대북 선전을 위한 여군 정훈대대가 창설되었으며, 전쟁 개전 직후 귀가 조치를 한 공군 여자항공교육대 중 26명이 복귀하여 행정, 통신, 기상파악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군의 참여가 많았던 영역은 전상자(戰傷者)를 돌보는 간호장교였다. 전쟁 기간 중 대략 1300여 명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6.25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여러 영역에서 여군이 등장했으니 기록의 상실까지 참고하여 대략 2500여 명 정도가 참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군창설 4주년 기념식(1954년) (출처: 국가기록원)
전쟁은 하루하루 죽음을 마주하는 참혹한 공간이다. 그런 전쟁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전쟁의 공간을 찾아 투신한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생존하는 여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전쟁으로 나라가 위험에 빠졌으니 가만두고 볼 수가 없는 일 아닌가.’
‘하루에도 몇 명씩 고아가 발생하니 누군가는 그들을 챙겨야 했어.’
‘사할린에서 귀국한 뒤 나라가 위험에 빠져 전쟁에 참여했지’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해서 국군에 입대했어요’
증언만 놓고 보면 남군인지, 여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국난 앞에서 남녀, 여남이 따로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군이 처음 생긴 시절이니 입대하고 나서도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활동은 불편한 것이 많았다. 속옷부터 군화까지 군대에서 나오는 배급은 모두 남성용이거나 미군용인데 그걸 입고, 신고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옷이 맞지 않아 보기도 흉할 뿐 아니라 불편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차림을 보고 ‘인민군 포로’로 부를 정도였다.
또 총이 부족해 여군들은 돌아가며 사격 연습을 해야 했으며, 야전에서는 민가에서 자거나 텐트 바닥에 거적을 깔고 버텨내야 했다.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여군을 힘들게 했다. 전방 배치는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 전역한 여군은 ‘기가 센 사람’으로 통하기 일쑤였다.
<휴식중인 한국군 6사단 야전 병원의 간호병들(1950년11월29일) (출처: 대한민국 국군)
하지만 병참, 행정, 의무, 그리고 인민군을 회유하는 선전 활동 역시 전쟁에 꼭 필요한 영역이다. 그 공간을 채운 여군이 없었다면 또 전쟁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무엇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걸어간 그들의 용기 덕분에 70여 년이 지난 지금, 1만3천여 명의 여군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군의 중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6.25 전쟁의 영웅으로서 여군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며 기억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6.25 전쟁 참전 여군의 이야기를 통해 호국의 다양한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