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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여자만 위로 해가 진다.
멀리 고흥만의 능선 뒤로 해가 기울면서 갯벌의 물골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해안도로를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자전거로 달리던 여고생 둘이 황홀한 풍경을 마주하고 섰다.
이렇게 앞으로 열 다섯번만 해가 지면 올 한해도 다 지나갈 것이다.
여수의 서쪽바다로 노을이 진다. 여자만(汝自灣). 얼핏 남자가 아닌 ‘여자(女子)’를 떠올리기 쉽겠지만
한자로 풀자면 ‘너 여(汝)’자에 ‘스스로 자(自)’를 씁니다.
여자만이란 이름은 그 만(灣)의 한복판에 있는 섬 여자도에서 나온 것이란다.
여자도의 ‘너 여(汝)자’는 섬의 생긴 모습이 그러하다 해서, ‘스스로 자(自)’는 뭍에서 멀어 모든 걸 스스로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여자만의 섬달천 마을이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 올해도 남은 날은 보름 남짓.
매양 뜨고 지는 해가 새삼스러운 때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 남은 날들이 하루하루 지워져 가면서
일출이며 일몰 같은 일상에 눈길이 간다. 이즈음 마주하는 노을이 한결 장엄한 것도 이 때문인 듯 싶다.
저렇듯 앞으로 여자만 위로 열 다섯번 해가 지고 나면, 올해도 다 가고 말겠지.
사실 ‘여자만’이라고 하면 지도를 펼쳐놓고도 대번에 짚으실 순 없을 것이다.
서쪽의 고흥반도와 동쪽 여수반도의 사이 깊은 만.
흔히 ‘생태관광 1번지’라는 순천만이 곧 여자만의 다른 이름이다.
짐작처럼 순천에서는 순천만으로, 여수 쪽에서는 여자만으로 부른다.
똑같은 곳을 이르는 이름이지만, 순천만은 일찌감치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
순천 쪽에서 부르는 이름인 순천만이야 나무랄 데 없는 곳이긴 하되 관광지가 되면서
포구의 마을들이 다 밀려나가고 그 자리에 찾아든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이 돼버렸다.
하지만 여수 서쪽에서 부르는 이름인 여자만 쪽은 때묻지 않은 어촌의 일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요한 개펄을 가진 고즈넉한 만이다.
대여자도, 소여자도, 대운두도, 소운두도를 비롯한 섬들과 공진반도와 운두만이 그려내는 해안선이
마치 낙지 발처럼 들고나는 곳. 어쩌면 밋밋하고 평범하다 싶기도 하겠지만, 여자만에는 5t 미만의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작은 포구와 개펄, 그리고 그곳에 기대 사는 작은 어촌마을이 점점이 들어서 있다.
여자만을 끼고 있는 포구를 따라 마을과 마을을 희미하게 잇는 길 위에서 한해를 보내는 낙조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에서 가장 빼어난 낙조 전망을 가진 ‘딱 한 곳’을 찾으려 섬달천에서 감도마을로, 구미마을로,
또 벌구마을로 돌아봤지만, 그 일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됐다. 여자만을 끼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여기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장엄한 낙조가 펼쳐졌던 까닭이다.
여수로의 여정이라면 어디를 먼저 떠올리는지. 동백섬과 향일암, 돌산대교, 돌산갓김치, 서대회….
그러나 여수의 진면목이란 이런 모범답안 같은 여정에서 빠져나와야 비로소 볼 수 있다.
여자만의 낙조야 더 말할 것이 없겠고, 조선시대 수군진이 있었던 만호진성터에서 돌산도를 차고 오르는
일출 또한 감격적인 것이다. 여기에 사랑과 용서로 일관한 삶에 대한 감동으로 그 앞에서는 누구도 옷깃을
여미게 되는 애양원까지 곁들인다면 나무랄 데 없는 여정이 될 것이다.
# 여자만 낙조의 아름다움을 어디에다 비길까
‘해질 무렵의 여자만은 아름답다’고 첫 줄을 썼다가 지운다.
이번에는 ‘여자만의 낙조는 장엄하다’고 썼다가 또 지운다.
여자만의 해넘이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어찌 쓰든 또다시 지워야 할 터.
석양의 여자만은 그만큼 아름답다. 여수쪽 여자만에서 고흥반도 위로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면
넓게 펼쳐진 개펄과 그 위의 하늘이 온통 황금색 고운 빛깔로 칠해진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이 귓전을 스치는데, 노을을 마주한 마음만큼은 황금빛으로 따스하게 달궈진다.
해가 더 낮게 기울면 여기에 붉은 색 기운이 더해진다. 물골이 길게 이어진 개펄도 붉게 반짝이며 물들어간다.
개펄 위로 끌려나온 폐선이며, 개흙이 묻은 펄배, 갯일을 위해 펄로 걸어 들어가는 아낙네들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다. ‘장엄한 노을’이란 표현은 이런 때 써야 마땅하리라.
여수 쪽의 여자만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되 남해안에서 최고의 낙조의 명소라 이름할 만하다.
여자만에는 시뻘겋게 달궈진 해가 바다로 풍덩 빠지는 극적인 장면은 없다.
대신 그곳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시야’가 있다.
여자만의 낙조를 완성하는 것은 하늘이 반이고, 나머지 반이 개펄이다.
고흥반도 위로 펼쳐진 하늘과 도무지 끝간 데 없는 개펄.
해가 기울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이 하늘과 개펄에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려낸다.
빛의 각도에 따라 하늘은 푸르렀다가 황금빛이 됐다가 붉은 기운으로 순식간에 변해간다.
여자만에서는 낙조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따로 없다.
만을 따라 이어지는 작은 포구마을을 잇는 도로 위에 서면 어디든 낙조 명소인 까닭이다.
한 곳에서 오래도록 서서 봐도 좋겠고, 타박타박 해안도로를 걸으면서 봐도 좋겠다.
차를 타고 그 길을 달린들 그 아름다움이 덜해질 까닭도 없다.
#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달천 마을
여수시 소라면에 여자만을 바라보는 마을 섬달천이 있다.
육달천(육지달천)에서 달천교를 건너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섬달천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섬이었던 곳. 어찌나 작고 소박한지 그것이 섬을 뭍으로 만드는 것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다리인 달천교가 육달천과 섬달천을 잇는다.
섬달천 마을은 여자만의 갯벌을 앞마당으로 삼는다.
앞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은 지 이미 오래. 배를 타고 나간다 해도 간간이 잡혀 올라오는 문어가 고작.
마을 포구에 묶인 배가 1t 남짓의 작은 배들뿐인 것도 그 때문일 터다.
아쉬운 대로 마을 주민들은 여자만이 길러낸 자연산 석화를 캐서 살아간다.
마침 마을 주민들은 이틀 전에 바다에 나가 공동작업으로 캐내온 굴을 꺼내놓고 껍데기를 까고 있다.
공동 생산의 평화로운 일상. 욕심없이 바다에 주어진 것들만 받아드는 소박한 삶이다.
섬달천에서 꼭 찾아가봐야 할 곳이 바로 마을 위쪽에 폐교된 초등학교다. 소라초등학교 달천분교장.
1968년도에 개교했다가 근래 들어 문을 닫았다. 비록 문을 닫긴 했지만 달천분교는 아마도 건물이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작은 학교이자, 가장 낭만적인 학교 중의 하나이리라. 학교는 작다.
울창한 상록림의 진입로를 지나면 교실 하나에 교무실 하나를 들인 건물과 작은 관사 하나가 딸려 있는 게
고작이다. 폐교된 후 마을 주민이 매입했다는 분교 교정은 베어낸 나무들로 어수선하긴 하지만, 마당 같은
운동장 한구석에 새초롬히 서있는 책 읽는 소녀상과 낡은 시소가 옛 학교의 정취를 보여준다.
# 일몰의 바다를 자전거로 달리는 맛, 그리고 일출
섬달천에서 육달천을 지나 가사, 수문동을 지나 운두도로 향하는 길은 여자만의 바다와 딱 붙어서 달린다.
저만치 밀려간 바다와 반짝이는 개펄을 따라가는 길이다. 그리고 말목을 박고 바다에 넣어둔 정치망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멀리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여자도와 그 너머 고흥반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다.
차로 달리기는 차마 아쉬운 길. 그 길 위를 화양면소재지에서 왔다는 여고생 두 명이 자전거로 달린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자전거와 함께 해안도로를 굴러간다. 아쉽게도 화양면에서는 자전거를 빌릴 곳이 없었다.
자전거를 이곳까지 싣고 올 수만 있다면, 운두도와 여자도 뒤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여자만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매혹적인 경험을 해볼 수 있으리라.
반도인 여수에 일출의 풍경 또한 없을 리 없다.
여수에서 낙조 풍경으로 여자만을 꼽는다면 일출 풍경은 단연 돌산도의 향일암이 첫손으로 꼽힌다.
향일암은 화재사고 이후 정취가 예전 같진 않지만, 해돋이 풍경이야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이렇듯 알려진 일출명소 외에도 곳곳에 일출풍경을 만날 수 있는 명소들이 있다.
해안에 반질반질한 수박만한 돌이 뒹굴고 있는 무슬목도 각별하고, 방죽포에서 향일암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밤섬 뒤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는 맛도 좋다.
그러나 여수에서 해돋이를 보러 굳이 이렇듯 해안도로를 고집해야 할 까닭은 없다.
여수시청 인근의 호두마을의 돌산포 만호진터에서도 빼어난 일출을 만날 수 있다.
여수 시청에서 가자면 20분 안쪽이다. 조선초 수군기지이던 고돌산진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자취도 없지만
옛 성이 서있던 언덕 위에 오르면 가막만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를 만날 수 있다. 소경도와 조도,
암목도, 초도 같은 작은 섬들이 그 뒤편의 무슬목과 돌산도를 배경으로 겹쳐지고 그 위로 해가 떠오른다.
▲ 여수의 돌산포 만호진터에서 마주한 가막만 일출.
여수는 향일암이 아니라도 동쪽으로 열린 바다라면 어디에건 붉게 물들이며 돋는 해를 마주할 수 있다.
해야 매양 돋는 것이지만 세밑에 마주하는 일출이나 일몰은 평소와는 다른 감상을 안겨준다.
# 사랑과 화해가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이야기들
여수에는 세밑에 찾아가볼 만한 명소가 있다. 여수공항 뒤편의 애양원.
관광지도에 나와 있지만, 행락객이라면 으레 지나치고 마는 곳.
소외된 이들을 향한 베풂과 종교적인 신념이 이른바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낸 곳이다.
그곳에서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느낄 수 있다.
이곳은 휭하니 들렀다가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감동을 받지 못한다.
애양예배당과 애양원기념관, 순교자기념관 등을 찬찬히 돌아볼수록 감동은 깊어지게 되고
절로 옷깃이 여며지게 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그 감동의 깊이는 매한가지다.
역사의 시작은 1909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인 이방인 의사 포사이트에서 시작됐다.
전남 목포에서 근무하던 그는 길가에 쓰러져 있던 여자 한센병 환자를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광주 근교의 가마터에 거처를 마련해줬다. 이방인 의사가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은 너도나도 가마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한센병원이었던 애양원의 시작은 이랬다.
애양원에는 한센병환자들이 예배를 보던 돌로 지은 예배당이 있고, 맞은편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는 당시 의료기구들이 전시돼 있고, 한센인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한장 한장에서는 누추한 환자들을 의료로 치유하고, 마음의 벽을 허문 이들의 진심이 묻어나온다.
애양원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손양원 목사의 순교기념관이 있다. 1939년 애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던
손 목사는 여순사건때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도 겪었지만 두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후 손 목사는 6·25때 애양원을 지키다 총을 맞아 순교한다. 순교기념관 곁에는 손 목사와 두 아들의 묘가 있다.
묘지 앞에 서면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랑과 용서가 비극적인 개인사와 맞물려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순천 나들목에서 내려서 17번 국도로
여수까지 내려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부고속도로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타 진주 나들목에서
나와서 남해고속도로로 순천 나들목을 거쳐 17번 국도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덕양삼거리까지 가서 863번 지방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죽림사거리다.
죽림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0분 정도 가면 육달천을 지나고 달천교를 건너서 섬달천 마을에 닿는다.
묵을 곳·먹을거리
달천 마을에 종점민박(061-686-1659), 김영국민박(061-686-1657) 등 민박집이 있다.
여수시내는 물론 돌산에도 호텔과 모텔들이 즐비하다.
여수시청에서 소호요트장에 이르는 해안에는 모텔과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한여름 성수기가 아니라면 주말에도 쉽게 방을 얻을 수 있다.
여수시청 인근의 선소 부근에 새로 들어선 나르샤관광호텔(061-686-2000)이 방도 넓은 편이고
객실 관리도 쾌적하다. 1박 12만원.
이즈음 여수의 먹을거리로는 서대회가 첫손으로 꼽힌다.
막걸리 식초로 새콤달콤하게 무쳐낸 서대회를 내는 삼학집(061-662-0261)이 가장 유명한 맛집이다.
구백식당(061-662-0900)은 생선구이를 전문으로 내놓는 집. 금풍생이 구이가 유명하다.
30년 넘게 아귀찜을 내놓는 복춘식당(061-662-5260)도 빼놓을 수 없다.
자료협조 ㅣ 문화일보!
첫댓글 사진 정말 잘 찍은듯 햇빛아래 사진 예술인데여 사진찍기엔 그만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