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 정시 논술문제
준수사항】
1. 서론·본론·결론을 갖춘 한 편의 글을 완성할 것.
2. 1,300자 내외(±100자)로 쓸 것(600자 이하의 답안은 채점에서 제외함).
3. 어문 규정과 원고지 사용법에 따를 것.
4. 연필을 제외한 흑색이나 청색 가운데 한 색의 필기구만 사용할 것.
5. 원고지에는 제목과 이름을 쓰지 말 것.
6. 답안 내용 중에는 수험생의 신원을 나타낼 수 있는 어떠한 표시도 하지 말 것.
7. 문제나 제시문을 그대로 옮겨 적지 말 것.
【 문제 】다음 글 (가)와 (나)에 비유적으로 표현된 내용을 해석하여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의 '윤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논리적으로 서술하시오. <50점>
(가) 삶의 의미와 세계의 원리 등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도달하기가 어려울 경우, 앞선 스승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글과 깨달음의 관계는 종종 손가락과 달의 관계로 비유된다. 손가락을 들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킬 때, 만약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쳐다본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손가락이 달이 아니듯이 글의 내용도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달이 있듯이 글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
(나) 금강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금강산 그림을 널리 수집하고 자세히 살펴본 뒤에 손뼉을 치면서 말하는 내금강·외금강의 봉우리, 골짜기들은 생생하여 들을 만하다. 그러나 그가 한 번도 한양 밖을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본 것이라곤 종이 위의 풍경이므로 기껏해야 산을 보지 못한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그가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 주지를 만난다면 곧바로 뒤로 물러서고 말리라. 범부(凡夫)들이 대개 그러하다.
그런데 그림으로만 금강산을 본 데 불과하면서도 타고난 슬기로움으로 그 속의 울긋불긋한 산길과 물길을 잘 알아보고, 지난날의 묵은 자취에 얽매이거나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않은 채 산 속의 경치를 진짜 본 것처럼 상상해 내는 사람도 있다. 비록 단발령 고개 위에서 금강산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를 선지식*으로 추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장유(張維)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 선지식(善知識): 지혜와 덕망이 있고 사람들을 교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
(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어느 날 당(堂)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 위를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내용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하였다.
"신(臣)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름에 정확한 치수가 있을 것입니다만,신이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가 짜 본 개요>
(가)의 요지: 손가락은 ‘글’, 달은 ‘진리’
글은 진리를 깨닫는 방편(손가락만 보지 말고 그 방향을 보아야 한다.)
(나)의 요지: 금강산의 그림은 ‘글’, 금강산은 ‘진리’
범부는 금강산의 그림으로 금강산의 본모습을 알지 못한다.
(범부는 글을 통해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
장유는 금강산의 그림을 보고 금강산의 본모습을 알았다.
선지식(장유)은 글을 통해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
(다)의 요지: 진리란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이라고 남겨진 책은 모두 성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윤편)
글의 개요
서론: 동도서기, 탈아입구 - 지식과 기술의 전승에서 동양이 뒤떨어진.....
본론1 손가락과 금강산 그림-‘글’ 달과 금강산의 본모습- ‘깨달음’에 비유
(나)의 범부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이고,
(나)의 선지식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는 사람이다.
본론2 제시문 (다)의 윤편은 진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윤편- ‘달은 하늘에 있으니 네가 알아서 찾으라.’
범부- 손가락, 선지식-그 방향 윤편- 손을 내려버림
근대 동양의 쓸쓸한 자화상
결론 지식 기술의 체계적인 습득의 중요성-반성
<써 본 글>
동도서기(東道西技), 탈아입구(脫亞入歐). 열강들의 각축이 벌어지던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서슬퍼런 말들이다. ‘동양은 도에 심취했고 서양은 기술이 앞섰다’, ‘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처럼 되자’하는 이 말들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침략을 정당화했고, 동북아시아 각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했다. 서양과 더불어 문명의 양대 축을 이루던 동양권의 여러 나라들은 일거에 식민지로 전락했고 짧게는 2,30년 길게는 100년 이상 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근현대 세계의 정세가 이런 판도로 짜인 데에는 지식과 기술의 계발과 전승에 대한 동·서양의 현격한 가치 판단의 차이가 원인이 된 측면이 크다.
글 (가)와 (나)는 각각 손가락과 금강산 그림을 ‘글’에 달과 금강산의 본모습을 ‘깨달음’에 비유하고 있다. (가)의 화자는 손가락만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 달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나)에서 같은 금강산 그림을 보고 범부는 생각하지 못하는 금강산의 진면목을 선지식은 생각해 낸다. 따라서 (나)의 범부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이고, (나)의 선지식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범부는 글의 내용에 함몰된 독서를 하는 사람이고, 선지식은 글쓴이의 목적의식을 생각하면서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모든 깨달음은 말과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윤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윤편에게는 글로 남겨진 모든 지식이나 기술이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윤편의 생각이야말로 허황되기 짝이 없다. 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려면 밤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윤편은 달이 무엇인지를 간절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달은 하늘에 있으니 네가 알아서 찾으라.’고만 말할 뿐이다. 범부가 손가락을 보고, 선지식이 그 방향을 본다면 윤편은 그 손을 내려버리는 사람이다. 그나마 책 내용에 함몰된 독서를 하는 범부보다도 못하게, 책 자체를 던져버리는 것이 윤편이다. 그에게는 장유와 같은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도 일개 필부로 살다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뿐이다. 역사와 문명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윤편의 논리에서, 실용에서 일탈하여 우주의 도리와 인간 삶의 근본 원리에만 매달리다가 역사를 망친 근대 동양의 쓸쓸한 자화상을 읽는다.
인류는 장구한 세월동안 문자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지식과 기술, 사상과 종교를 후대에게 이어주며 풍성하게 가꾸어 왔다. 오늘날처럼 발달된 인간 문명은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지적 산물이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과 유리된 초월적인 그 무엇은 아닐 것이다. 근대의 동양은 윤편과 같이 지식 기술의 체계적인 습득의 중요성을 방기하거나 무시해 버렸다. 그것이 서양 세계와 너무나 다른, 그리고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결과로 동양 전체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다시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