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 이야기
열 살 때였다
나와 동갑내기 우리집 암소는 내 친구였다
매일 산기슭 나무 밑에 앉아서
나는 4학년 음악책에 나오는 노랠 불렀고
소는 풀을 뜯곤 했다.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음메~ 음메~
소는 꼬리로 지휘를 하고
파리 떼는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춤을 추었다
노을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개울가에서
꽃무늬 고무신으로 물을 떠서
등을 씻어주기도 했지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 방문을 쳐다보면서
되새김질 했을 우리 소
힘겹게 새끼를 낳은 후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팔려갔다
지금은
어디에선가 작은 북이 되어
둥둥 둥두둥두
메아리로 남아 있겠지
2. 어머니의 노래
어머니에 때한 나의 첫 기억은
사랑방 베틀 위에 다소곳이 앉아
베를 짜시던 모습이다
30대 과부되신 할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아들 다섯 앞세우고
남은 오남매 뒷바라지에 힘겨운
중년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무슨 노래를 하셨을까
평생 동안
새벽마다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어머니만큼의 나이가 들어
이제야 돌아보는 그분의 삶
나보다 더 젊었던 시절의 어머니께
연필 꼭꼭 눌러 쓴 편지를 보내고 싶다
엄마
엄마가 부르던 노래 이젠 뭔지 알 것 같아요
엄마가 드리던 기도를 나도 지금 하고 있어요
장독대 옆에서 쳐다보던 별들을
나도 엄마처럼 바라보고 있어요
살아내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
3. 가을 햇살
가을 아침
따스한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울컥 눈시울 젖는다
어느새 이만큼 달려온 세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한
나에게 위로를 건네본다
창 너머 나뭇가지에서
단풍은 물들어가고
이 계절에 맞는
기도의 말을 배워본다
늘 달라고만 외치던 기도가 아닌
낮고 어두운 곳에서 숨죽여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을 나열하는 기도 되기를
이 나이에 누리는 모든 것들과
따스함으로 온 세상의 결실을 도와주는
가을 햇살은
무조건 감사함이다
..........................................................
4. 걸레
이곳 저곳 구석구석
뒹굴고 다니면서 닦아주다
온통 먼지뿐인 몸뚱이로
세탁기에서 휘이휘이 돌다가
빨랫줄에 걸린
다음에는 어느 곳을 닦아주어야 되나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다
남도 깨끗이
나도 깨끗이
온 세상을 깨끗하게 해주는 이
너 뿐이다
걸레
너는 참으로 위대하다
.......................................................................
5. 먼 훗날
먼 훗날
언젠가 저에게 분명 질문하실거죠?
살아가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더냐고
그렇게 물어봐 주십시오
제 자리를 지키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겠습니다
한 사람
저에게 주신 그 한 사람
아니 내가 선택한 그 한 사람
헤어질 수 없어서
이별하기 어려워서
이 자리 오래 지키는 것이
가장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
.......................
........................
.................................................................
6. 사람꽃
이혼 한 아들이
내게 선물로 준 손녀
아픈 꽃
가을 뜨락에서
한 줌 기쁨을 주는 국화처럼
나날이 새로운 재롱으로
내게는 또 다른
삶의 희망이다
내가 손녀를 기르는 게 아니고
손녀가 나를 기르고 있다
손녀 덕분에
할머니는 날마다 자라고 있다
아파서 예쁜 꽃
예뻐서 더 눈물나는 꽃
사람꽃
............................................................
7. 맨드라미
눈길 닿는 곳마다
어머니가 있었던 내 어린 시절
마당가에 있는 꽃밭에는
늘 맨드라미가 피어있었지
빨간 옷을 입고
까만 씨를 가득 안고 있는
맨드라미는
해마다 그 자리에서 가을을 맞이했어
하얀 *기증 떡 위에
수놓듯이 올려질 때면
추석빔으로 맨드라미 색 옷을 사주시던 어머니
맨드라미야
어머니가 보고싶구나
* 강원도에서는 기정떡을 기증떡이라고 불렀다
........................................................................................
8. 집
홍천 인천 왜관 포천 양주 담양 진해 서울강서구
대전 고양 화천 홍천 장성 서울도봉구
의정부 연천 원주 양주 의정부 포천
숨고를 여유도 없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다
마흔 번 이사 끝에
정년퇴직 후 겨우 마련한
오래된 아파트
십삼층 위에서 바라보면 탁 트인 풍경
먼 산 가까운 산
들 논 밭
내 것 아닌데 내 것인 듯 감상하며 산다
감히 또 꿈을 꾸어본다
다음에 이사할 집은
별빛이 마구 쏟아지는 동네에
마당이 있는 집이었으면
...............................................................................
9 .겨울비
출렁출렁 넘치는 눈물이
쏟아질 듯 하더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어
저녁 시간을 적시고 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거야
남은 시간들도 잘 될거야
땅 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도
이게 나의 최선이기에
빗금이라도 그려보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 같아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을 모르겠지만
비틀거리며 걸어보는 이 길
삶은 언제나 어렵고 알 수 없어
실수투성이어도
멈출 수 없는 걸음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눈물처럼
노래처럼
훌쩍거리는
겨울비
...................................................................................
10. 낙엽
나 잊고 살아주어 고마워요
혹시라도 날 기억하고 손짓했더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외줄타기에서
나 출렁거리며 방황했을거요
꽃같은 시절 한 때
슬그머니 마음 언저리 지나쳐 갔던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나지겠지만
아마도 인연은 아닌가봅니다
이만큼 나이 들어 회상해보니
오래된 책갈피에 바싹 말라버린
낙엽 같은 것
이런 것이 추억일테지요
어쩌다 마주친다 해도 아마 모를거요
그대도 날 알아볼 수 없을게요
단지
주춤거리며 손 내밀지 못하던
순수한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웠을 뿐
나이 든 황혼 언덕에서
문득 떠오르는 한줄기 생각 끝에
안부를 얹어 낙엽에 실어보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살든지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
11. 메리
중학교 들어가 처음으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우리집 강아지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열 세 살
하루 다섯 시간 걸어야 다닐 수 있는 학교
그 멀고 힘겨운 길에
내 친구가 되어 주었지
수업 시간에는 창밖에 앉아 쉬고
점심시간에는 내 도시락 나누어 먹으며
노을 지고 어둑해진 길
두어걸음 앞서서 날 지켜주며 걸었던 메리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배웠어
네가 어디선가 듣고 있다면
이렇게 말 해 주고 싶어
고마워
감사해
사랑해
..........................................................................................
허경운 약력
1997년 월간 순수문학 등단
사)한국여성문학인회 회원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졸업
백석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졸업
국방부 병영생활 전문상담관
신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서정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현재 : 누리요양보호사 교육원 전임교수
시집 : 새벽달무리. 항아리
논문 : 은둔형 외톨이의 사회문제와 분석에 관한 연구 (석사)
동성애자들의 병영생활 적응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