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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지구환경변화
우담바라 추천 0 조회 48 15.05.09 17: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야 멸망이 던지는 기후 묵시록
문명의 운명, 가뭄과 혹한 사이
| 글 | 오재호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ㆍjhoh@pknu.ac.kr |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마야 제사장이 피라미드 신전에 산 제물을 바치기 직전 군중을 선동하는 장면. 마야문명 중심지 ‘티칼’(과테말라 페텐)의 피라미드에는 매년 3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가뭄이 들고 땅이 메마른 이유는 태양신이 분노한 탓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높다란 신전 위에서 마야의 제사장은 이렇게 외친 뒤 예리한 칼로 남자 노예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든다. 이어 이 노예의 머리를 잘라 계단으로 굴린다. 광기 어린 군중은 일제히 손을 들고 괴성을 지른다.

산 제물의 심장을 태양신에게 받쳐 분노를 가라앉히고 가뭄에서 벗어나 보려는 이 끔직한 의식은 마야문명의 몰락을 다룬 멜 깁슨 감독의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이다. 마야인들이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은 잔인한 살인행위가 아니라 우주를 구하기 위한 신성한 종교행사였다.

1839년 미국인 변호사 존 스티븐스가 영국인 동료 프레더릭 캐서우드와 함께 중앙아메리카 밀림 속에 버려진 마야유적과 도시 44곳을 발견했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마야문명은 현재의 멕시코 남부에서 과테말라, 유카탄반도, 온두라스 일부까지 퍼져 있었으며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문명이다.

마야민족은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열대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건축술, 천문학, 수학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다. 철제도구도 없이 석회암이나 단단한 나무로 대들보를 만들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했고 1년(365.2420일)과 한달(29.5320일)의 길이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세계 최초로 0을 이해하고 사용했다. 하지만 마야인들은 9세기말 갑자기 연기처럼 증발했다. 전쟁의 흔적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이 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석회암과 화전농업의 재앙

마야문명이 멸망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마야문명이 꽃피던 지역의 환경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의 유카탄지역은 정글이라고는 하나 연중 비가 많은 적도의 열대우림지대가 아니다. 이 지역은 적도에서 다소 떨어진 북위 17°~22°에 위치해 5~10월이 비가 오는 우기이고 나머지 기간은 비가 없는 건기다. 이곳은 ‘계절적 열대우림지역’이나‘계절적 건조지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유카탄반도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연강수량이 40mm에서 250mm로 늘고 토양층도 점차 두꺼워진다. 따라서 남쪽 지역이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더 적합하다. 하지만 남쪽이 가뭄에는 더 취약했다. 구멍이 많은 석회암 지역이라 비가 오면 곧바로 지하로 스며드는데, 북부에 비해 지표고도가 높아 우물을 깊이 파야 지하수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 지하 100m 깊이의 우물 유적이 발견됐다. 또 마야문명의 중심지인 티칼에 1만명이 18개월 동안 먹을 만큼의 물이 있는 호수가 있었지만, 우기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심각한 가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01_웅대한 피라미드를 세우고 신성문자를 사용했던 마야문명이 멸망한 유력한 이유는 극심한 가뭄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02_마야의 전성기에는 ‘아포칼립토’영화 장면의 폭포처럼 풍부한 물이 문명의 젖줄이었을 것이다.
마야인들의 화전농업도 문제였다. 나무를 베고 잡초와 함께 태운 뒤 몇 년에 걸쳐 옥수수를 가꿨다. 화전농업은 유카탄반도처럼 수림이 울창하고 돌이 많으며 그리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서 마야인들이 살아가는데 적절한 농업형태였지만 토양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장기간 옥수수라는 하나의 농작물만 재배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토양층은 그다지 깊지 못해 한번 화전을 하고 나면 양분이 고갈돼 마야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척박해진 토양에는 15~20년이 지나야 다시 야생수목이 돌아왔다. 나무의 증산작용으로 상당한 비구름이 형성되는데, 삼림이 사라진다면 가뭄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결국 마야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이 파탄나면서 마야문명이 종말을 자초했을 수 있다.


마야와 당나라의 공통점[소제끝]

수년 전스위스와 미국의 공동연구팀은 마야문명이 융성했던 멕시코 유카탄반도 근처 바다의 퇴적물을 조사했다. 이 지역에는 육지에 티타늄(Ti) 성분이 많은데,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에는 육지에서 온 퇴적물이 줄어 바다 퇴적물 속의 티타늄 양도 줄어든다. 연구팀은 이를 이용해 760년, 810년, 860년 그리고 910년에 극심한 가뭄이 3~6년 계속됐음을 밝혀 2003년 3월 14일자‘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 시기의 가뭄은 인구가 집중된 유카탄 반도의 남쪽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났다. 땅이 메말라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해 도시는 황폐화됐고 결국 마야문명은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암석의 부식 현상이 잇달아 일어나 건축물이 붕괴됐을 가능성도 높다.

지난 1월 독일 포츠담에 위치한 ‘국립지구과학연구센터’의 게랄트 하우크 박사팀은 ‘네이처’에 중국 당나라와 멕시코 마야문명의 몰락 원인이 가뭄이라는 학설을 제기했다. 수천km 떨어진 곳에서 최고를 자랑했던 두 문명이 10세기경 사라진 원인은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뜻이다. 중국당나라와 멕시코 마야문명의 소멸이 서로 관계가 있을까.
기후변동에 몰락한 문명과 국가 : 마야, 티와나쿠, 이스터는 가뭄 때문에 멸망한 대표적 문명이다. 10세기경 아시아가 건조해짐에 따라 당나라가 망했고 중앙아시아 비단길이 사라졌다. 소빙하기(16~19세기)에는 몽블랑 빙하가 확대됐고 바이킹이 그린란드에서 철수했으며 조선과 일본에 기근이 빈발했다.
하우크 박사팀은 중국 최대 담수호인 후광평야 둥팅호와 베네수엘라 연안 캐리아코우 섬에서 침전물을 채취해 연구한 결과 양측 모두 8세기와 9세기에 강수량이 줄어들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두 문명의 멸망이 비가 남부로 치중되면서 북부 지방 전체에 여름 장마가 사라지고 가물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중앙아시아에서도 10세기경에 습윤하던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가뭄이 심해지고 이 가뭄은 점차 아시아 서쪽으로 확장됐다. 건조했던 기후 때문에 당시 건설된 마을이나 도로가 깊이 3~3.6m의 카스피해 바닥에서 발견되고 있다. 결국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비단길 연안의 많은 도시가 사라졌다.

과연 당나라와 마야문명의 몰락이 가뭄때문일까. 일부학자는 인위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한다. 당나라는 751년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기 때문에 쇠락했으며, 마야문명은 인구과잉과 무분별한 환경개발로 인해 몰락했다는 주장이다.


기후 최적기 vs 소빙하기

중세시대 가운데 900년에서 1300년까지 전 유럽은 상당히 따뜻했는데, 이 기간을 ‘기후 최적기’라 부른다. 이 시기에 바이킹 세력이 커져 노르만인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했고 노르웨이는 그린란드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세웠다. 당시 그린란드는 사람이 곡물을 생산하며 정착해 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16세기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피터 브뢰겔 1세가 그린 ‘눈속의 사냥꾼’(Hunters in the Snow, 1565). 당시 한랭한 소빙하기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기후 최적기’가 끝나는 13세기 마지막 10년간 유럽은 추워졌다. 그린란드의 정착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후변화를 알아차렸다. 얼음이 전혀 없던 뱃길에 바닷물이 언 얼음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부둣가가 얼어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4세기 중엽에는 더 가혹하게 추워졌으며, 그린란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갔다. 1500년에 이르자 노르웨이인들은 그린란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300여년은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릴 정도로 한랭한 날씨가 북반구 대부분을 덮쳤다. 프랑스 알프스지역의 몽블랑 북쪽에 있는 샤모니 계곡의 아르장티에르 빙하를 비롯해 알프스 빙하는 16세기 중엽부터 차차 확대돼 소빙하기 동안 고도 1400m까지 내려왔다. 당시 이상기후는 결국 흉작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은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됐다.

아시아에서도 소빙하기는 있었다. 중국에서는17세기 후반에 특히 한랭해 감귤 밭이 피해를 입고 운하가 결빙하는 날짜가 늘었다. 일본에서도 여름이 서늘해 흉작으로 천명기근(1782~1787년), 천보기근(1833~1839년), 경응·명치 초의 기근(1866~1869년)이 찾아왔다. 이들은 일본역사상 3대 기근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도1770~1870년에 걸쳐 여름마다 때 아닌 서리, 눈, 바람, 우박, 안개의 이상기후현상이 나타났다. 1600년대 초, 1700년대 말, 1800년대 초 인구가 감소한 이유는 다분히 이상기후의 영향을 받아 흉작이 이어진 탓이다.
기후 최적기(900~1300년)가 지나 소빙하기(16~19세기)가 찾아오자 샤모니 계곡의 아르장티에르 빙하를 비롯한 알프스 빙하는 고도 1400m까지 내려왔다. 배경 사진은 몽블랑 북쪽의 샤모니 계곡.
특히 소빙하기 중 최저 기온을 기록했던 17세기는 전세계적 혼돈시기였다. 유럽에서는 기근과 함께 30년 전쟁(1618~1648년)이 이어졌고 중국에서는 1628년 최악의 ‘산시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 명나라가 멸망했다. 병자호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장길산의 봉기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다.


잃어버린 식민지를 찾아

“가뭄 때문에 사라진 문명의 전형적인 예는 잉카문명 이전에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던 티와나쿠다. 안데스의 높은 고원에서부터 오늘날의 볼리비아, 칠레, 그리고 페루가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700여년간 지배했던 티와나쿠는 대략 1000년 전 가장 융성했다.

티와나쿠 경제의 핵심은 집약농업의 정교한 수리시스템이었다. 티와나쿠에는 높이 솟은 언덕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티와나쿠인들은 이 언덕에서 씻겨 내려온 흙으로 평평한 경작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운하를 만들어 가뭄을 극복하고 밭의 테두리에 돌을 쌓아 열을 가둠으로써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에서 생기는 서리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수세기 동안 수십억 평방미터의 넓은 경작지에 활용됐고 중남미대륙의 농업경제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작지는 1000년~1100년부터 방치됐고 티와나쿠 도시도 폐허가 됐다.

과학자들은 안데스산맥 근처 켈콰야 빙하에서 뽑아낸 얼음시추물을 이용해 950년~1000년부터 1410년까지 끔찍한 가뭄이 강약을 반복하면서 계속됐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가뭄은 천천히 티와나쿠제국의 농업기반을 무너트리기 시작했으며 티와나쿠의 통치자는 변방으로부터 가뭄의 영향이 뻗어오자 서서히 그 위험을 깨닫고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며 재앙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이 제국의 농업기술자들도 오랫동안 이어진 극심한 가뭄을 극복하지 못했다.

볼리비아와 페루 국경지대에 걸쳐 있는 티티카카 호수. 이 주변에서 700년간 융성했던 티와나쿠 문명은 11세기경 극심한 가뭄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지금은 티와나쿠인들이 세웠던 커다란 석상을 비롯한 건축물만 남아있다.
기후변동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는 영국이 북미대륙에서 첫번째로 개척한 ‘로스트 콜로니’(Lost Colony, 잃어버린 식민지)의 운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연안 로어노크 섬의 ‘로스트 콜로니’가 사라진 일은 미국 역사에서 오래된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1990년 후반에야 그 미스터리의 원인이 밝혀졌다.

미국 아칸소대 데이비드 스탈 교수팀은 나무나이테를 분석해 ‘로스트 콜로니’이주자들이 1587년~1589년에 그 지역에서 당시 가장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결과는 1998년 4월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 역사에는 1587년 8월 22일 존 화이트라는 정착촌 촌장이 이 지역에서 식량을 얻기 힘들게 되자 구호물자를 구하러 영국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문에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올 배를 구하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구한 작은 배 2척으로 항해하던 중 프랑스해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3년이나 지난 1590년 8월에야 겨우 로아노크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극심한 가뭄 탓에 정착지가 몰락했던 탓이다.


거대 석상의 진실

칠레에서 서쪽으로 3600km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에는 이스터란 이름의 세모꼴 화산섬이 있다. 이스터 섬의 남쪽 해안에는 사람 얼굴을 한 200여개의 거대한 석상(石像)이 애수에 젖은 표정으로 바다를 향해 서있다. ‘모아이’라는 이 석상은 13~16세기 이 섬에 찾아온 환경재앙의 상징물이다.

섬의 원주민들은 거대한 석상을 만들기 위해 산에 있던 암석을 해안가로 옮기는 동안 상당히 많은 나무를 잘라냈다. 벌거숭이가 된 산에는 동식물이 사라져 생태계가 파괴됐다. 망망대해에 고립된 섬에서 파괴된 환경은 되돌릴 수 없었고 결국 수만명에 이르던 원주민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재앙은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됐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십대에 걸쳐 번창했으나 환경이 파괴되는 가운데 인구는 계속 늘어 섬의 수용한계를 넘어서자 서로 죽이고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인간 활동은 기후를 자연적으로 변동시키는 지각 활동이나 지구 궤도 변화와 맞먹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구 환경 전체를 급속하게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고립된 지역에서 환경을 파괴시키다가 인구가 과도하게 증가해 문명이 파멸한 이스터섬의 사례를 보면서 태양계에서 고립된 지구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구온난화라는 위기를 앞둔 현재 인류는 얼마나 현명하게 기후변화에 대처하고 있는가를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있다. 마야인이 숭배했던 태양신보다 인류를 품고 있는‘지구신’이 더 노할지 모를 일이니까.

P r o f i l e

오재호 교수는 서울대 대기과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오리건주립대에서 대기과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에서 환경과학자로 일했으며 기상연구소에서 예보연구실장을 지냈다. ‘인간이 기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슈퍼스톰’ ‘엘니뇨와 라니냐’등의 책을 옮겼다. 많은 학생이 기후변화에 대처해 지구를 살리는 ‘독수리 5형제’가 되길 바란다.

 

 

 

#17세기,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  (출처 : 모든 것은.. 너에게!! 블로그)

 

프랑스 : 농민반란 "프롱도의 난" (1648년 ~ 1653년)

 영국 : '청교도혁명' (1640년 ~ 1660년)

 러시아 : 농민반란 '스텐카 라진의 난' (1670년 ~ 1671년)

 독일 :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

 중국 : 농민반란 '이자성의 난' (1630년)

 

 이는 모두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났던 폭동과 반란 그리고 전쟁이다.

 이렇게 17세기 전세계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으며,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위기의 17세기'라고 부른다. 그럼 이 시기에 전세계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에 대해 연구했으며, 대부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세계적인 위기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건 각기 다른 문화권에 있는 나라들이 아주 비슷한 시기에, 그것도 나라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의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하나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학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면 실제 17세기 전세계를 휩쓸었던 기상이변은 무엇이었을까?

 

 17세기 전세계를 휩쓴 이상기후 - 소빙하기

 

 -유럽의 알프스 지역에서는 빙하가 산 아래 있는 마을까지 내려왔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이러다가 들과 마을까지도 사라지겠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영국의 템스 강이 얼었다. 템스 강은 서안해양성 기후에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는 비교적 따뜻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시기 영국엔 한파가 몰아치면서 템스 강이 얼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여러 산들이 1년 내내 눈에 덮여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바다엔 북극의 얼음이 떠내려와 어민들의 피해가 컸다.

 -이상한파로 인해 유럽 지역의 포도 수확시기가 늦어졌다.

 -중국에서는 복숭아와 살구의 개화시기가 늦어졌고, 중국 강서성에 있는 감귤농장에선 추위 때문에 감귤농사가 흉작이었다. 매년 흉작이 거듭되면서 아예 문을 닫는 농장들이 늘어갓다.

 

 이는 세계의기상학자들이 자신의 나라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파악한 현상들이다.

 전 이화여대 교수인 김연옥씨는 이렇게 17세기를 전후해서 나타났던 이상기후 현상을 두고 소빙하기라고 한다. 소빙하기란 빙하기 현상의 일종이지만, 일반적인 빙하기보다 기간도 짧고 온도 하강폭도 낮은 것을 말한다. 17세기를 중심으로 250여 년간 지속되었던 소빙하기 현상으로 당시 전세계의 평균기온은 1도 정도 떨어졌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과연 평균기온 1도가 떨어졌다고 해서 17세기 전세계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는 걸까?

 평균기온 1도가 떨어졌다는 것은 상당히 큰 영향력이 있다. 일례로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엘리뇨 현상을 살펴보면, 이 영향으로 지구의 해수면 온도가 올라갔다. 이를 대기중의온도로 분석해보면 약 0.5도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도 전세계적으로 기상이변과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가뭄이라든가 애리조나 사막의 폭우, 아마존 지역의 가뭄이 모두 엘리뇨현상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균 1도 떨어졌다는 것은 당시 농작물이나 일상생활에 상당히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인구의 대부분이 식량생산에 의존하던 시대에 그 영향력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 시대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서도 소빙하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을까? 4백여 년 된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서 17세기 조선의 기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의 기온을 복원하라

 

 나이테를 통해서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충북대학교의 박원규 교수를 찾았다.

 17세기 조선의 기온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수령이 4백년 된 전나무나 잣나무가 필요햇다. 왜냐하면 이 전나무와 잣나무는 기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소나무와 참나무는 강우량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 나무들로는 당시의 강우량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기간은 4월에서 8월까지의 평균기온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선 특수 장비를 이용해 4백년 된 전나무에서 연필심 굵기의 나무심을 뽑아냈다(이렇게 해서 구멍이 뚫린 부분은 생살이 돋듯 다시 살아나온다고 한다). 뽑은 나무심을 실험실로 가지고 와서 나무의 연륜을 확인하기 위해 나이테의 개수를 센다.

 그리고 각각의 나이테의 넓이를 0.01m까지 자세히 측정해 컴퓨터에 입력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이테의넓이와 온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해서 당시의 나이테의 넓이와 온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해서 당시의 나이테의 넓이와 따른 온도를 계산해낸다. 이때 전국적인 평균 기온을 뽑아내려면 전국 각지에서 20여 그루의 나무의나이테를 분석해야한다. 이렇게 실험해본 결과 1620년부터 1720년까지 조선의 4월에서 8월까지의 기온이 16.9도로, 4백년간의 평균 온도인 18.2도보다 1.3도 낮게 나왔다. 이는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 조선에서도 각종 기상이변이 나타났을까?

 우선 17세기의조선이라면 선조 후반부터 숙종때까지를 말하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로 전국이 황폐화되어 있던 시대다. 그런데다 얼마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으며, 예송논쟁을 비롯한 남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하던 때엿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17세기의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17세기 조선에 나타났던 이상기후나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햇다. 그럼, 이 시기 조선의 기상현상을 어땠을까? 실록을 찾아보도록 하자.

 

 실록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의 이상기후 현상

 

 실록에는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때아닌 눈과 우박이었다. 7, 8월에도 눈과 우박이 자주 내려 농작물과 인명 피해를 초래하고 있었다. 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종 11년 8월 11일 - 함경도 함흥비장에서는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는데, 우박이 큰 것은 밥그릇만하고 작은 것은 주먹만했다.

 이번의 큰 우박으로 온갖 곡식과 초목이 부러지고, 탐스럽게 익어가던 과일도 모두 떨어졌으며, 12살 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무수한 까마귀*꿩*까치*비둘기들도 맞아 죽었다

 

 ☆현종 12년 8월 2일 - 함경도 단천지역에선 서리가 내려 마치 눈이 온것 같았고, 함경도 갑산지역에서는 실제로 때아닌 눈이 내렸고 냇물이 얼었다. 8월에는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또한 큰 비와 바람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 사례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현종 11년 8월 27일 - 전라도 화순에서는 큰 바람이 불어서 소나무 수백 그루가 부러지고, 9살 난 아이가 바라마에 날렸다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들은 이 바람을 보고 전에 없던 악풍이라고 했다.

 

 ☆현종 12년 8월 23일 - 충청도 태안 등 연해지역의네 고을에도 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90명이 모두 죽었다.

 

 ☆현종 12년 9월 17일 - 경상도 합천에선 큰 비로 냇물이 범람해서 논밭과 마을 골목도 물에 잠겻다. 이 큰 비로 네 명이실종했고, 벼곡식도 모두 물에 떠내려갔으며, 집에도 물이 들어가 주민들은 높은 지대에 피신해 있었다.

 

 이렇게 이상기후 현상이 계속되면서 전국 각지에 농작물 피해가 극심했고, 이는 심각한 기근으로 이어졌다. 당시 각 지역의 수령들이 조정에 보고한 상소를 보면 당시의 참혹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현종 12년 4월 3일 - 제주 목사는 "이번 경신년의기근은 전염병까지 돌아서 죽은 자가 도내에 2260명이나 되고, 살아있는 자들도 실오라기 같은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 그 몰골이 귀신과 같다"는 장계를 올렸다.

 

 ☆현종 12년 6월 8일 - 전라 감사는 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자가 2백여명이고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670명이 된다고 했다.

 

 이러한 기근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17세기에 나타났던 두 차례의 큰 기근이 있다. 바로 현종 12년(1670)과 12년 (1671)에 있었던 경신대기근과 숙종 21년부터 25까지 이어졌던 을병대기근이다. 오산전문대의 정형지 교수는, 조선시대는 매년 조금씩의 기근형상이 나타났지만, 이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조선시대에 난 기근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 기근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워지자 민심이 흉흉해져 전에 없던 사건드리 잇달아 일어났다. 도랑에 갓난아이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게 하면, 놀비가 두 아이를 삶아먹는 끔찍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가하면 공동묘지마다 파헤쳐진 무덤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이는 밤이면 굶주린 자들이 남의 무더을 몰래 파헤쳐 시신의 염의를 훔쳐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덤도둑이 늘어나던 중 남원에서는 노비일명과 최일이 남의 무덤을 파서 염으를 훔진 뒤 그 옷을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가고디어 웃지 못할 사건(현종 12년 2월 29일)도 있었다.

 이렇게 실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17세기에 전국적으로 이상기후현상이 나타났고, 그로 인한 재해가 매우 심각했다. 이것은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자료인 것이다.

 

 실록을 통해 소빙하기의 원인을 분석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행해졌던 소빙하기에 대한 연구는 나이테나 포도 수확시기와 같은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은 서구의 학자들에게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시켜주었지만, 그 원인이나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의 이태진 교수에 의하면, 실록을 통해서 소빙하기의 원인을 분석해볼 수 있다고 한다. 실록에는 당시의 이상기후 현상과 재해 상황이 자세히 기록대 있기 때문이다. 이태진 교수는 실록에 나와 있는 재해 기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분석을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실록에 나와 있는 재해 기록은 총 3만 건에달하며 그 종류도 혜성*객성과 같은 하늘의 변화뿐 아니라 때아닌 눈*비와 같은 기상현상, 지진 등 모두 26종류나 된다. 소빙하기의 대표적인 현상인 7, 8월에 눈과 서리, 우박 등이 내렸다는 기록은 실록에 총 3065건이 나와있는, 조선시대 전 기간중 15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초엽에 가장 많이 나타났다. 이것을 통해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것과, 그 기간은 17세기를 중심으로 250년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잇다.

 그럼 소빙하기의 원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실록의 재해 기록을 살펴보면 소빙하기가 나타났던 시기에 유성의 출현과 낙하 기록이 많이 나타났다.

 조선 전 기간에 3064회가 나타났는데 그중의 89%인 2704회가 이 시기에 발생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태진 교수는 유성이 충돌, 낙하할 때는 많은 분진이 발생하는데, 그 분진이 대기권을 메워 햇빛을 차단시킴으로써 한랭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유성이라면 별똥별을 이야기한다. 별똥별이 떨어져서 이렇게 햇빛을 차단할 정도의 분진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빙하기 학설인 알바레스 학설은 공룡소멸설로도 통하는데, 이는 거대한 운석이 낙하 충도랗면서 생긴 분진에 의해 전지구상에 여러 해 동안 한랭한 현상이 나타나는 빙하기가 도래했으며, 이로 인해 공룡과 고생물들이 멸종햇다는 것이다. 그러니 17세기 소빙하기의 원인 또한 당시 자주 나타났던 거대한 운석들의 충돌, 낙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록에 기록돼 있는 자세한 재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서구학자들이 풀지 못했던 소빙하기의 원인까지도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그럼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시대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기록들을 빠짐없이 관찰해서 실록에 실을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엔 어떻게 천재지변을 관측하고 기록했을까?

 

 지금의 기상대와 천문대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조선시대엔 관상감이 있었다. 관상감은 영의정을 총책임자로 해서 34명의 전문지식을 갖춘 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비상시엔 임시직을 뽑아서 운영했다. 이들 관상감 관원들은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5명의 관원이 남아 24시간 내내 천문과 기상을 관측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당시 관상감에서 작성했던 서운관지를 보면 혜성*객성과 같은 하늘의 현상과, 눈*비*서리*안개와 같은 기상현상을 꼼꼼히 기록해놓고 있다.

 그럼 지방에선 어떻게 기록했을까?

 지방엔 시험을 거쳐 파견된 관리가 관측을 맡았다. 이들이 관측하고 기록한 기상현상들이 관찰사나 지방수령에게 빠짐없이 보고되었으며, 이것이 최종적으로 조정에까지 보고되었다.

 당시 이러한 관측체계를 잘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관상감운영이나 지방 기록들의 보고체계가 엄격히 관리했는데, 실록을 보면 이에 대한 관련 기록들이 실려 있다.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예측을 틀리게 한 관상감 관원이 처벌받는 사례를 살펴보자.

 

  ☆현종 6년 2월 21일 - 혜성의 출현을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관상감 관원이 곤장을 맞았다

 

 ☆세종 4년 1월 - 일식예보를 15분 앞당겨서 했던 관상감 관원 이천봉이 곤장을 맞았다.

 

 또한 지방의 기록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경우에도 관려자들을 책임 추궁햇다

 

 ☆현종 10년 9월 9일 - 지진을 보고하지 안은 광양현감을 파직해야 한다고 논의한다.

 

 정확한 관측과 기록이 가능햇던 데엔 뛰어난 천문과측기구도 한몫했다. 창경궁에는 지금도 관천대가 남아 있는데, 이 관천대 위에 간의라는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고 별의움직임을 살폈다. 당시 이 관측기구를 이용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1463개 별의이름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규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오의 해그림자가 달라진다는 이치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정오의 해그림자를 이용해 1년의 길이를 측정했던 기구다.

 관상감에서는 이외에도 별시계*혼천의*혼상 등 각종 천제관측기구들을 이용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보했으며, 1년과 1달의 정확한 길이와 24절기도 알아냈다. 이외에도 기상에 대한 관측도 햇는데, 대나무 끝에 세모꼴 깃발을 달아놓은 풍기대라는 기구를 이용하여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했고, 전국 각지에 측우기와 수표를 설치해서 강우량을 측정햇다. 이렇게 해서 측정된 강우량 기록은 현재 1770년대 것부터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229년간의 서울의 강우량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지금도 강우량을 예측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동*서양은 17세기 이상기후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17세기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기후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선 서양의 경우를 살펴보자.

 17세기 유럽 지역에서는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다. 마녀란 약제를 다루거나 예언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17세기 이러한 마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그 희생자가 5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녀사냥의 원인에대해선 그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원인 중 하나로 17세기 이상기후 현상인 소빙하길르 얘기하기도 한다. 당시 유럽의 위정자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들이 비와 눈을 내리게 하고 농작물을 말라죽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녀를 가려내어 화형에 처했다. 당시 마녀로 지목이 되면 물실험을 통해 마녀인지 아닌지를 가려냈는데, 발목에 돌을 묶어 물에 던진 뒤 떠오르면 마녀라고 했고, 물에 가라앉으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단 마녀로 지목이 되기만 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이상기후 현상과 그로 인한 재해의 원인을 마녀에게로 돌리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마녀사냥이다.

 그럼,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경신대기근이 극심했을 때 현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내린다.

 

 "요즘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거의 없는 해가 엇다. 이는 하늘이 나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함이니, 이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정사에 임하겠노라."

                                                                                                 -현종 11년 10월 9일

 

 이상기후 현상의 원인은 바로 왕 자신의 부덕함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이는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해가 발생하면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재해의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사직서를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즉, 재해는 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통치능력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며, 잘못된 것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해가 발생하면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반성을 하고 근신에 들어갓다. 그 예로 임금은 반찬 수를 줄였고, 제사 때에도 음식의 양을 줄여 제사비용을 줄였으며,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또한 궁궐 내 호위군사의 수를 줄이고 관리들의 녹봉도 반이상 삭감했다.

 또한 예를 지켜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 예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상예비요> <의례문해> 같은 예학 관련서적들이 많이 출간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17세기 예학의 발달은 당시 극심했던 재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빙하기로 인한 사회적인 영향

 

 소빙하기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회적인 영향도 끼쳤다.

 

 온돌의 본격적인 보급

 첫째는 온돌의 본격적인 보급이다. 우선 17세기 궁궐에서는 온돌이 사용이 늘어난다. 인조 8년 1월 무신조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선조(광해군)대에는 방에 온돌을 놓은 곳이 매우 적었는데, 지금은 온돌이 늘어나 땔감이 많이 들어온다."

 

 온돌은 민간에도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전기에는 마루가 넓은 집구조였던 것이, 후기엔 난방이 필요에 따라 마루가 좁고 방이 넓은 구조로 바뀌게 된다. 당시 온돌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은 땔감 사용량의 증가로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엔 도성 근방의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며, 그로 인해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하는 일이 잦아져 영조 36년에는 대규모의 청계천 준설공사를 실시한다.

 

 면화 사용량 증가

 둘째는 면화 사용량의 증가다. 그 동안 방한복 역할을 했던 가죽옷 대신 촘촘하게 누빈 솜옷이 대중화된다. 17세기 저술된 <농가집성>을 보면 그 이전의 농서에는 없었던 목화 재배법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도 면화 사용량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제의 동요

 세번째는 신분제의 동요다. 17세기 대기근이 극심해지자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이 급증했다. 진휼청이라는 구호기관이 있었지만 진휼기금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구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일종의 명예직 임명장인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매했다. 부호들에게 공명청을 팔고 그 대신 쌀을 받아 기민들을 구제한 것이다. 사실 공명첩이란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재해가 있을 때 조금씩 발매했고, 임진왜란 때도 발매가 되었다. 17세기 소빙하기 현상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자 이때도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매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노비에서 양민이 되거나 일반평민에서 양반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신분제가 도용된 것이다.

 

 이렇게 기후는 그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데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 역사학계에서 소빙하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록인 것이다.

 

 

 역사 지진기록은 지금도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실록은 소빙하기의 연구에만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록에 남아있는 각종 재해에 대한 기록 중 지진에 대한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고들 한다. 그런데 실록을 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지진들이 있었음이 눈에 띈다. 그 중 몇가지를 보면,

 

 "경상도 진주에 지진이 일어나 수목이 부러져 넘어지고, 오랫동안 물 마른 샘에 흙탕물이 솟구쳐나오고, 관문의 앞길에 땅이 10장(30m)이나 갈라졌다."

                                                                                                   -인조 21년 4월 23일

 

 "평양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집이 흔들흔들 곧 넘어질 듯 했으며, 이렇게 세 차례나 일어났다."

                                                                                                   -현종 10년 9월 24일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큰 지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대 지진학과의 이기화 교수를 찾아서 어느 정도 규모의 지진인지를 확인했다.

 첫번째 사례는 진도 9이고, 두번째 사례는 진도 5라고 했다. 이는 상당히 강도 높은 진도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일어났던 지진 중 최고 진도의 지진은 어느 정도 였을까?

 이기화 교수에 의하면, 1643년 울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근처의 땅이 갈리지고 부근의 봉화대가 무너졌다고 한다. 이는 진도 10으로, 얼마전 발생했던 홍성 지진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강도다. 지금으로는 상상이 안되는 규모의 지진이다.

 그럼 조선시대 지진은 얼마나 자주 발생했을까?

 조선시대 전기간의 지진 발생횟수는 총 1197회로, 1년에 평균 4회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1562년엔 한해에 112회가 발생하기도 했다. 놀라운 일이다. 또한 지역별 분포도를 보면 경상도 일대에 지진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결과에서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이 지역은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돼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과연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원자력발전소의 정인수씨는 역사지진들을 모두 연구해서 앞으로 발생 가능한 지진의 강도를 예측해 그에 맞게 내진설계를 했다고 한다. 실제 원자력발전소 건립 당시 작성된 부지 보고서를 보면 조선시대 지진기록을 사례별로 분석해놓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 지역에서 발생 가능한 최고 진도의 지진을 산출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실록의 지진기록은 단지 기록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고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발생 가능한 최대강도의 지진을 산출해낸 뒤 그에 맞게 건물이나 병원 같은 중요 건물들도 이 기준에 맞게 내진설계를 하게 되어있다. 실록의 재해기록이 현재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원인까지 추정할 수 있고, 또한 우리나라의 지진 강도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의 재해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 이것은 실록의 또 하나의 새로운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은 지금도 그 활용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자연재해 기록의 보고인 것이다.

 

 

 

#소빙하기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 (출처 : 법 앞에 평등하라 블로그)

 

 

지구는 약 1만년 전까진 빙하기였다. 지표의 절반 이상을 지금의 남북극에 자리잡은 거대한 얼음이 덮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하긴 지금도 넒은 의미에서는 빙하기에 속한다. 남북극은 아직 빙하기이기 때문이다. 공룡시절에는 남북극까지 식물이 무성했고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녹지않는 만년설이 남북극을 덮게 된 것은 불과 2백만년 전쯤부터다.

 

이때부터 지구의 기후가 갑자기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화산활동이 정지되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었고,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이어져 육지가 가로막혀 해류의 순환을 방해해서는 남북극으로 난해류가 흘러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좌우간 빙하기에도 난빙기와 극빙기가 있는데, 지금은 난빙기에 속한다. 난빙기란 비교적 온난한 빙하기를 말하는 것이고, 극빙기는 아주 추운 절정기의 빙하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빙기에도 가끔씩 극빙기까지는 안 가도 순환벨트가 깨져 극히 추운 작은 빙하기가 나타나는 수가 있는데, 이를 소빙하기라고 한다.

 

인류 역사 중에서는 가장 최근엔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제일 유명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전 인류적으로도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서양에서는 마녀사냥이 극치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튼 등이 나타나 과학의 혁명이 시작되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 루소와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도 나타나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

 

또, 지리적으로도 신대륙이 발견되어 막대한 인간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개발이 시작되었던 시기다.

 

또 동양에서는 임진왜란(최초의 전 국가전의 효시)이 벌어지고, 병자호란이 그 뒤를 이어 벌어진 시기였으며 명청이 교체되면서 엄청난 변혁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에도 시대의 긴 평화시기를 겪게 된다.


한국도 광해군 폐위와 같은 유교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찬탈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임진과 병자 양란으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소빙하기가 극치에 달했던 16,7세기에 이런 일들이 전 인류적으로 집중하여 생긴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우선 빙하기 때문에, 농사가 안되어 곡식이 생산되질 않으니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갔으며 얼어죽는 사람들도 상당수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에서는 여름에 눈이 내리고 일년 내내 산들이 눈에 덮여 있으며 영국 템즈강이나 남유럽의 스페인의 강과 하천까지 얼어붙어 배들이 운항할 수 없고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 도버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도 17세기에는 온통 겨울 동안은 얼음에 갇혀 출항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자연의 조화에 대해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때마침 불고 있던 종교개혁을 트집삼아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불에 태워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뭔가 환란이 닥쳐오면 그것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때도 그랬던 것이다.

 

더구나, 빙하기 때문에 농작물이 얼어죽어 되지를 않으니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건 얼어죽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죽기 싫으면 새로운 따뜻한 영토를 개척하여 그리 이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리상의 발견은 이런 사회적 요구에서 생긴 것일 것이다. 유럽사람들은 소빙하기 때문에 이주할 새 땅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탐험가들에게 새로운 땅을 찾아줄 것을 요구했다. 콜롬부스, 마젤란, 제임스 쿡 등은 그 요구를 들어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 등을 찾아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리로 매우 빠르게 이주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상하게도 식민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서양에서는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엣날 일본이 한국이나 만주를 강점하고 있을 때나,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강점하고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또, 서양이라도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강점했을 때도 러시아인들은 그쪽으로 잘 이주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좋은 본국 놔두고 식민지같은 데 가겠다고 하겠어? 문화시설도 형편없고 야만인들만 득실대는 미개척 지역에 당신 같으면 가겠는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누구도 가겠단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등도 본국인들의 식민지 이주를 권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되려 새로운 영토 경영에 대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적극 이주를 권장했으나 실제 이주한 사람들은 얼마 안되었는데(주 : 가령 일제시 일본에서 한국이나 만주에 이주한 자들은 35년간 고작 2백만이었다. 전체 일본인 8천만 중에 고작 2백만이라니 그것도 무려 40년에 걸쳐서), 유럽인들(러시아인 제외)은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신대륙으로 이주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당연하다.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굶어죽거나 얼어죽기 싫으면 안 가고 배겨? 아예 소빙하기 탓에 농사가 안되고 추워 죽겠으니 싫어도 가지 않으면 안되지... 최소한 남북아메리카는 소빙하기라도 농사지을 기온은 되고,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는 따뜻해서 얼어죽진 않으니까...

 

따라서, 이때 시작된 대규모의 유럽인 이주로 원주민이 거의 없던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은 완전힌 유럽인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또 원주민이 비교적 많던 남아메리카(마야, 잉카 제국)는 혼혈 메스티조의 나라가 되었다.

 

소빙하기는 인간의 이주를 촉진한 원흉이었던 것이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마무리된 데는, 소빙하기가 한몫했다는 말이다.

 

일본이 온난한 기온에서 갑자기 추워지고 혼슈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무사들도 차츰 전쟁을 싫어하고 고향으로 도망가거나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야전 생활로는 얼어죽기 십상이므로 겨울에는 전쟁을 할 수가 없어진 탓이다.

 

겨울에는 그러므로 군대를 해산했는데, 이듬해 군대를 소집해도 도주하거나 각종 핑게로 응하지 않아 징병제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사, 오다 노부나가는 이 점을 이용해 징병제 대신 모병제와 총으로서 다른 영주들을 공격해 굴복시켜 전국시대를 마감할 수 있었다.

 

중국도 인구는 늘어나는데, 갑자기 시작된 소빙하기로 말미암아 많은 인구가 굶주리게 되자 이로 인해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반란이 잦아져 결국 명은 망하게 된다.

 

중국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여 이 난국을 타개하려 했지만, 이때는 이미 서양 각국이 지구상을 몽땅 도리한 상황이었다. 또, 중국은 대륙국가라서 뛰어난 함정을 만들 기술이 부족해 해외로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소빙하기로 인해 굶주리고 얼어죽게 된 백성들은 무능한 정부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긴 소수민족 반란으로 명은 멸망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 생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도 그렇다.

 

우선 일본은 전국시대는 마감했으나, 무엇보다 소빙하기로 인해 농사도 안되고 따라서 봉록(무사들의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없게 되자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난 무사들을 자연적으로 줄이고, 또 그들의 봉록을 해결할 땅을 정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즉, 임진왜란은 20세기 히틀러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원인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비생산적인 내란 때문에 오랫동안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대와 무기를 소모하고, 또 소빙하기로 궁핍해진 국민들의 밥그릇 해결을 위해 새로운 정복지를 얻어 국외에서 한몫을 단단히 약탈해오지 않으면 나라가 도산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빙하기는 인류에게 엄청난 격변을 안겨다 준 원흉이었다.

 

소빙하기는 18세기를 고비로 서서히 수그러들어 20세기 초반쯤에는 다시 예전의 기온을 회복했고 최근에는 되려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

 

너무 많아진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나친 탄산가스를 배출하여 온실효과가 이전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 남북극의 얼음이 다 녹아버리면 많은 땅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강우량이 늘어나 사막이 옥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데가 있으면 들어가는 데도 분명 있다.

 

문제는, 세계는 국경이 있고 또 급격히 진행되는 온난화 때문에 피해를 일방적으로 보는 국가나 민족이 나올 것이므로 [잘못한 놈은 따로, 잘되는 놈은 따로]의 세계가 될 것 같아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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