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 (출처 : 모든 것은.. 너에게!! 블로그)
프랑스 : 농민반란 "프롱도의 난" (1648년 ~ 1653년) 영국 : '청교도혁명' (1640년 ~ 1660년) 러시아 : 농민반란 '스텐카 라진의 난' (1670년 ~ 1671년) 독일 :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 중국 : 농민반란 '이자성의 난' (1630년)
이는 모두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났던 폭동과 반란 그리고 전쟁이다. 이렇게 17세기 전세계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으며,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위기의 17세기'라고 부른다. 그럼 이 시기에 전세계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에 대해 연구했으며, 대부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세계적인 위기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건 각기 다른 문화권에 있는 나라들이 아주 비슷한 시기에, 그것도 나라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의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하나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학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면 실제 17세기 전세계를 휩쓸었던 기상이변은 무엇이었을까?
17세기 전세계를 휩쓴 이상기후 - 소빙하기
-유럽의 알프스 지역에서는 빙하가 산 아래 있는 마을까지 내려왔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이러다가 들과 마을까지도 사라지겠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영국의 템스 강이 얼었다. 템스 강은 서안해양성 기후에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는 비교적 따뜻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시기 영국엔 한파가 몰아치면서 템스 강이 얼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여러 산들이 1년 내내 눈에 덮여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바다엔 북극의 얼음이 떠내려와 어민들의 피해가 컸다. -이상한파로 인해 유럽 지역의 포도 수확시기가 늦어졌다. -중국에서는 복숭아와 살구의 개화시기가 늦어졌고, 중국 강서성에 있는 감귤농장에선 추위 때문에 감귤농사가 흉작이었다. 매년 흉작이 거듭되면서 아예 문을 닫는 농장들이 늘어갓다.
이는 세계의기상학자들이 자신의 나라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파악한 현상들이다. 전 이화여대 교수인 김연옥씨는 이렇게 17세기를 전후해서 나타났던 이상기후 현상을 두고 소빙하기라고 한다. 소빙하기란 빙하기 현상의 일종이지만, 일반적인 빙하기보다 기간도 짧고 온도 하강폭도 낮은 것을 말한다. 17세기를 중심으로 250여 년간 지속되었던 소빙하기 현상으로 당시 전세계의 평균기온은 1도 정도 떨어졌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과연 평균기온 1도가 떨어졌다고 해서 17세기 전세계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는 걸까? 평균기온 1도가 떨어졌다는 것은 상당히 큰 영향력이 있다. 일례로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엘리뇨 현상을 살펴보면, 이 영향으로 지구의 해수면 온도가 올라갔다. 이를 대기중의온도로 분석해보면 약 0.5도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도 전세계적으로 기상이변과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가뭄이라든가 애리조나 사막의 폭우, 아마존 지역의 가뭄이 모두 엘리뇨현상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균 1도 떨어졌다는 것은 당시 농작물이나 일상생활에 상당히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인구의 대부분이 식량생산에 의존하던 시대에 그 영향력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 시대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서도 소빙하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을까? 4백여 년 된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서 17세기 조선의 기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의 기온을 복원하라
나이테를 통해서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충북대학교의 박원규 교수를 찾았다. 17세기 조선의 기온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수령이 4백년 된 전나무나 잣나무가 필요햇다. 왜냐하면 이 전나무와 잣나무는 기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소나무와 참나무는 강우량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 나무들로는 당시의 강우량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기간은 4월에서 8월까지의 평균기온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선 특수 장비를 이용해 4백년 된 전나무에서 연필심 굵기의 나무심을 뽑아냈다(이렇게 해서 구멍이 뚫린 부분은 생살이 돋듯 다시 살아나온다고 한다). 뽑은 나무심을 실험실로 가지고 와서 나무의 연륜을 확인하기 위해 나이테의 개수를 센다. 그리고 각각의 나이테의 넓이를 0.01m까지 자세히 측정해 컴퓨터에 입력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이테의넓이와 온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해서 당시의 나이테의 넓이와 온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해서 당시의 나이테의 넓이와 따른 온도를 계산해낸다. 이때 전국적인 평균 기온을 뽑아내려면 전국 각지에서 20여 그루의 나무의나이테를 분석해야한다. 이렇게 실험해본 결과 1620년부터 1720년까지 조선의 4월에서 8월까지의 기온이 16.9도로, 4백년간의 평균 온도인 18.2도보다 1.3도 낮게 나왔다. 이는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 조선에서도 각종 기상이변이 나타났을까? 우선 17세기의조선이라면 선조 후반부터 숙종때까지를 말하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로 전국이 황폐화되어 있던 시대다. 그런데다 얼마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으며, 예송논쟁을 비롯한 남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하던 때엿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17세기의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17세기 조선에 나타났던 이상기후나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햇다. 그럼, 이 시기 조선의 기상현상을 어땠을까? 실록을 찾아보도록 하자.
실록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의 이상기후 현상
실록에는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때아닌 눈과 우박이었다. 7, 8월에도 눈과 우박이 자주 내려 농작물과 인명 피해를 초래하고 있었다. 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종 11년 8월 11일 - 함경도 함흥비장에서는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는데, 우박이 큰 것은 밥그릇만하고 작은 것은 주먹만했다. 이번의 큰 우박으로 온갖 곡식과 초목이 부러지고, 탐스럽게 익어가던 과일도 모두 떨어졌으며, 12살 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무수한 까마귀*꿩*까치*비둘기들도 맞아 죽었다
☆현종 12년 8월 2일 - 함경도 단천지역에선 서리가 내려 마치 눈이 온것 같았고, 함경도 갑산지역에서는 실제로 때아닌 눈이 내렸고 냇물이 얼었다. 8월에는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또한 큰 비와 바람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 사례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현종 11년 8월 27일 - 전라도 화순에서는 큰 바람이 불어서 소나무 수백 그루가 부러지고, 9살 난 아이가 바라마에 날렸다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들은 이 바람을 보고 전에 없던 악풍이라고 했다.
☆현종 12년 8월 23일 - 충청도 태안 등 연해지역의네 고을에도 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90명이 모두 죽었다.
☆현종 12년 9월 17일 - 경상도 합천에선 큰 비로 냇물이 범람해서 논밭과 마을 골목도 물에 잠겻다. 이 큰 비로 네 명이실종했고, 벼곡식도 모두 물에 떠내려갔으며, 집에도 물이 들어가 주민들은 높은 지대에 피신해 있었다.
이렇게 이상기후 현상이 계속되면서 전국 각지에 농작물 피해가 극심했고, 이는 심각한 기근으로 이어졌다. 당시 각 지역의 수령들이 조정에 보고한 상소를 보면 당시의 참혹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현종 12년 4월 3일 - 제주 목사는 "이번 경신년의기근은 전염병까지 돌아서 죽은 자가 도내에 2260명이나 되고, 살아있는 자들도 실오라기 같은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 그 몰골이 귀신과 같다"는 장계를 올렸다.
☆현종 12년 6월 8일 - 전라 감사는 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자가 2백여명이고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670명이 된다고 했다.
이러한 기근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17세기에 나타났던 두 차례의 큰 기근이 있다. 바로 현종 12년(1670)과 12년 (1671)에 있었던 경신대기근과 숙종 21년부터 25까지 이어졌던 을병대기근이다. 오산전문대의 정형지 교수는, 조선시대는 매년 조금씩의 기근형상이 나타났지만, 이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조선시대에 난 기근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 기근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워지자 민심이 흉흉해져 전에 없던 사건드리 잇달아 일어났다. 도랑에 갓난아이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게 하면, 놀비가 두 아이를 삶아먹는 끔찍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가하면 공동묘지마다 파헤쳐진 무덤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이는 밤이면 굶주린 자들이 남의 무더을 몰래 파헤쳐 시신의 염의를 훔쳐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덤도둑이 늘어나던 중 남원에서는 노비일명과 최일이 남의 무덤을 파서 염으를 훔진 뒤 그 옷을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가고디어 웃지 못할 사건(현종 12년 2월 29일)도 있었다. 이렇게 실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17세기에 전국적으로 이상기후현상이 나타났고, 그로 인한 재해가 매우 심각했다. 이것은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자료인 것이다.
실록을 통해 소빙하기의 원인을 분석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행해졌던 소빙하기에 대한 연구는 나이테나 포도 수확시기와 같은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은 서구의 학자들에게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시켜주었지만, 그 원인이나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의 이태진 교수에 의하면, 실록을 통해서 소빙하기의 원인을 분석해볼 수 있다고 한다. 실록에는 당시의 이상기후 현상과 재해 상황이 자세히 기록대 있기 때문이다. 이태진 교수는 실록에 나와 있는 재해 기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분석을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실록에 나와 있는 재해 기록은 총 3만 건에달하며 그 종류도 혜성*객성과 같은 하늘의 변화뿐 아니라 때아닌 눈*비와 같은 기상현상, 지진 등 모두 26종류나 된다. 소빙하기의 대표적인 현상인 7, 8월에 눈과 서리, 우박 등이 내렸다는 기록은 실록에 총 3065건이 나와있는, 조선시대 전 기간중 15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초엽에 가장 많이 나타났다. 이것을 통해 조선에도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것과, 그 기간은 17세기를 중심으로 250년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잇다. 그럼 소빙하기의 원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실록의 재해 기록을 살펴보면 소빙하기가 나타났던 시기에 유성의 출현과 낙하 기록이 많이 나타났다. 조선 전 기간에 3064회가 나타났는데 그중의 89%인 2704회가 이 시기에 발생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태진 교수는 유성이 충돌, 낙하할 때는 많은 분진이 발생하는데, 그 분진이 대기권을 메워 햇빛을 차단시킴으로써 한랭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유성이라면 별똥별을 이야기한다. 별똥별이 떨어져서 이렇게 햇빛을 차단할 정도의 분진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빙하기 학설인 알바레스 학설은 공룡소멸설로도 통하는데, 이는 거대한 운석이 낙하 충도랗면서 생긴 분진에 의해 전지구상에 여러 해 동안 한랭한 현상이 나타나는 빙하기가 도래했으며, 이로 인해 공룡과 고생물들이 멸종햇다는 것이다. 그러니 17세기 소빙하기의 원인 또한 당시 자주 나타났던 거대한 운석들의 충돌, 낙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록에 기록돼 있는 자세한 재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서구학자들이 풀지 못했던 소빙하기의 원인까지도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그럼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시대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기록들을 빠짐없이 관찰해서 실록에 실을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엔 어떻게 천재지변을 관측하고 기록했을까?
지금의 기상대와 천문대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조선시대엔 관상감이 있었다. 관상감은 영의정을 총책임자로 해서 34명의 전문지식을 갖춘 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비상시엔 임시직을 뽑아서 운영했다. 이들 관상감 관원들은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5명의 관원이 남아 24시간 내내 천문과 기상을 관측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당시 관상감에서 작성했던 서운관지를 보면 혜성*객성과 같은 하늘의 현상과, 눈*비*서리*안개와 같은 기상현상을 꼼꼼히 기록해놓고 있다. 그럼 지방에선 어떻게 기록했을까? 지방엔 시험을 거쳐 파견된 관리가 관측을 맡았다. 이들이 관측하고 기록한 기상현상들이 관찰사나 지방수령에게 빠짐없이 보고되었으며, 이것이 최종적으로 조정에까지 보고되었다. 당시 이러한 관측체계를 잘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관상감운영이나 지방 기록들의 보고체계가 엄격히 관리했는데, 실록을 보면 이에 대한 관련 기록들이 실려 있다.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예측을 틀리게 한 관상감 관원이 처벌받는 사례를 살펴보자.
☆현종 6년 2월 21일 - 혜성의 출현을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관상감 관원이 곤장을 맞았다
☆세종 4년 1월 - 일식예보를 15분 앞당겨서 했던 관상감 관원 이천봉이 곤장을 맞았다.
또한 지방의 기록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경우에도 관려자들을 책임 추궁햇다
☆현종 10년 9월 9일 - 지진을 보고하지 안은 광양현감을 파직해야 한다고 논의한다.
정확한 관측과 기록이 가능햇던 데엔 뛰어난 천문과측기구도 한몫했다. 창경궁에는 지금도 관천대가 남아 있는데, 이 관천대 위에 간의라는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고 별의움직임을 살폈다. 당시 이 관측기구를 이용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1463개 별의이름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규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오의 해그림자가 달라진다는 이치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정오의 해그림자를 이용해 1년의 길이를 측정했던 기구다. 관상감에서는 이외에도 별시계*혼천의*혼상 등 각종 천제관측기구들을 이용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보했으며, 1년과 1달의 정확한 길이와 24절기도 알아냈다. 이외에도 기상에 대한 관측도 햇는데, 대나무 끝에 세모꼴 깃발을 달아놓은 풍기대라는 기구를 이용하여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했고, 전국 각지에 측우기와 수표를 설치해서 강우량을 측정햇다. 이렇게 해서 측정된 강우량 기록은 현재 1770년대 것부터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229년간의 서울의 강우량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지금도 강우량을 예측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동*서양은 17세기 이상기후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17세기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기후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선 서양의 경우를 살펴보자. 17세기 유럽 지역에서는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다. 마녀란 약제를 다루거나 예언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17세기 이러한 마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그 희생자가 5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녀사냥의 원인에대해선 그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원인 중 하나로 17세기 이상기후 현상인 소빙하길르 얘기하기도 한다. 당시 유럽의 위정자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들이 비와 눈을 내리게 하고 농작물을 말라죽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녀를 가려내어 화형에 처했다. 당시 마녀로 지목이 되면 물실험을 통해 마녀인지 아닌지를 가려냈는데, 발목에 돌을 묶어 물에 던진 뒤 떠오르면 마녀라고 했고, 물에 가라앉으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단 마녀로 지목이 되기만 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이상기후 현상과 그로 인한 재해의 원인을 마녀에게로 돌리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마녀사냥이다. 그럼,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경신대기근이 극심했을 때 현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내린다.
"요즘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거의 없는 해가 엇다. 이는 하늘이 나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함이니, 이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정사에 임하겠노라." -현종 11년 10월 9일
이상기후 현상의 원인은 바로 왕 자신의 부덕함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이는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해가 발생하면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재해의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사직서를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즉, 재해는 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통치능력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며, 잘못된 것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해가 발생하면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반성을 하고 근신에 들어갓다. 그 예로 임금은 반찬 수를 줄였고, 제사 때에도 음식의 양을 줄여 제사비용을 줄였으며,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또한 궁궐 내 호위군사의 수를 줄이고 관리들의 녹봉도 반이상 삭감했다. 또한 예를 지켜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 예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상예비요> <의례문해> 같은 예학 관련서적들이 많이 출간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17세기 예학의 발달은 당시 극심했던 재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빙하기로 인한 사회적인 영향
소빙하기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회적인 영향도 끼쳤다.
온돌의 본격적인 보급 첫째는 온돌의 본격적인 보급이다. 우선 17세기 궁궐에서는 온돌이 사용이 늘어난다. 인조 8년 1월 무신조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선조(광해군)대에는 방에 온돌을 놓은 곳이 매우 적었는데, 지금은 온돌이 늘어나 땔감이 많이 들어온다."
온돌은 민간에도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전기에는 마루가 넓은 집구조였던 것이, 후기엔 난방이 필요에 따라 마루가 좁고 방이 넓은 구조로 바뀌게 된다. 당시 온돌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은 땔감 사용량의 증가로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엔 도성 근방의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며, 그로 인해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하는 일이 잦아져 영조 36년에는 대규모의 청계천 준설공사를 실시한다.
면화 사용량 증가 둘째는 면화 사용량의 증가다. 그 동안 방한복 역할을 했던 가죽옷 대신 촘촘하게 누빈 솜옷이 대중화된다. 17세기 저술된 <농가집성>을 보면 그 이전의 농서에는 없었던 목화 재배법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도 면화 사용량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제의 동요 세번째는 신분제의 동요다. 17세기 대기근이 극심해지자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이 급증했다. 진휼청이라는 구호기관이 있었지만 진휼기금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구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일종의 명예직 임명장인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매했다. 부호들에게 공명청을 팔고 그 대신 쌀을 받아 기민들을 구제한 것이다. 사실 공명첩이란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재해가 있을 때 조금씩 발매했고, 임진왜란 때도 발매가 되었다. 17세기 소빙하기 현상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자 이때도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매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노비에서 양민이 되거나 일반평민에서 양반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신분제가 도용된 것이다.
이렇게 기후는 그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데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 역사학계에서 소빙하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록인 것이다.
역사 지진기록은 지금도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실록은 소빙하기의 연구에만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록에 남아있는 각종 재해에 대한 기록 중 지진에 대한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고들 한다. 그런데 실록을 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지진들이 있었음이 눈에 띈다. 그 중 몇가지를 보면,
"경상도 진주에 지진이 일어나 수목이 부러져 넘어지고, 오랫동안 물 마른 샘에 흙탕물이 솟구쳐나오고, 관문의 앞길에 땅이 10장(30m)이나 갈라졌다." -인조 21년 4월 23일
"평양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집이 흔들흔들 곧 넘어질 듯 했으며, 이렇게 세 차례나 일어났다." -현종 10년 9월 24일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큰 지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대 지진학과의 이기화 교수를 찾아서 어느 정도 규모의 지진인지를 확인했다. 첫번째 사례는 진도 9이고, 두번째 사례는 진도 5라고 했다. 이는 상당히 강도 높은 진도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일어났던 지진 중 최고 진도의 지진은 어느 정도 였을까? 이기화 교수에 의하면, 1643년 울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근처의 땅이 갈리지고 부근의 봉화대가 무너졌다고 한다. 이는 진도 10으로, 얼마전 발생했던 홍성 지진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강도다. 지금으로는 상상이 안되는 규모의 지진이다. 그럼 조선시대 지진은 얼마나 자주 발생했을까? 조선시대 전기간의 지진 발생횟수는 총 1197회로, 1년에 평균 4회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1562년엔 한해에 112회가 발생하기도 했다. 놀라운 일이다. 또한 지역별 분포도를 보면 경상도 일대에 지진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결과에서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이 지역은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돼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과연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원자력발전소의 정인수씨는 역사지진들을 모두 연구해서 앞으로 발생 가능한 지진의 강도를 예측해 그에 맞게 내진설계를 했다고 한다. 실제 원자력발전소 건립 당시 작성된 부지 보고서를 보면 조선시대 지진기록을 사례별로 분석해놓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 지역에서 발생 가능한 최고 진도의 지진을 산출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실록의 지진기록은 단지 기록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고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발생 가능한 최대강도의 지진을 산출해낸 뒤 그에 맞게 건물이나 병원 같은 중요 건물들도 이 기준에 맞게 내진설계를 하게 되어있다. 실록의 재해기록이 현재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소빙하기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원인까지 추정할 수 있고, 또한 우리나라의 지진 강도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의 재해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 이것은 실록의 또 하나의 새로운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은 지금도 그 활용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자연재해 기록의 보고인 것이다.
#소빙하기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 (출처 : 법 앞에 평등하라 블로그)
지구는 약 1만년 전까진 빙하기였다. 지표의 절반 이상을 지금의 남북극에 자리잡은 거대한 얼음이 덮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하긴 지금도 넒은 의미에서는 빙하기에 속한다. 남북극은 아직 빙하기이기 때문이다. 공룡시절에는 남북극까지 식물이 무성했고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녹지않는 만년설이 남북극을 덮게 된 것은 불과 2백만년 전쯤부터다.
이때부터 지구의 기후가 갑자기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화산활동이 정지되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었고,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이어져 육지가 가로막혀 해류의 순환을 방해해서는 남북극으로 난해류가 흘러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좌우간 빙하기에도 난빙기와 극빙기가 있는데, 지금은 난빙기에 속한다. 난빙기란 비교적 온난한 빙하기를 말하는 것이고, 극빙기는 아주 추운 절정기의 빙하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빙기에도 가끔씩 극빙기까지는 안 가도 순환벨트가 깨져 극히 추운 작은 빙하기가 나타나는 수가 있는데, 이를 소빙하기라고 한다.
인류 역사 중에서는 가장 최근엔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제일 유명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전 인류적으로도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서양에서는 마녀사냥이 극치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튼 등이 나타나 과학의 혁명이 시작되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 루소와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도 나타나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
또, 지리적으로도 신대륙이 발견되어 막대한 인간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개발이 시작되었던 시기다.
또 동양에서는 임진왜란(최초의 전 국가전의 효시)이 벌어지고, 병자호란이 그 뒤를 이어 벌어진 시기였으며 명청이 교체되면서 엄청난 변혁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에도 시대의 긴 평화시기를 겪게 된다.
소빙하기가 극치에 달했던 16,7세기에 이런 일들이 전 인류적으로 집중하여 생긴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우선 빙하기 때문에, 농사가 안되어 곡식이 생산되질 않으니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갔으며 얼어죽는 사람들도 상당수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에서는 여름에 눈이 내리고 일년 내내 산들이 눈에 덮여 있으며 영국 템즈강이나 남유럽의 스페인의 강과 하천까지 얼어붙어 배들이 운항할 수 없고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 도버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도 17세기에는 온통 겨울 동안은 얼음에 갇혀 출항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자연의 조화에 대해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때마침 불고 있던 종교개혁을 트집삼아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불에 태워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뭔가 환란이 닥쳐오면 그것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때도 그랬던 것이다.
더구나, 빙하기 때문에 농작물이 얼어죽어 되지를 않으니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건 얼어죽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죽기 싫으면 새로운 따뜻한 영토를 개척하여 그리 이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리상의 발견은 이런 사회적 요구에서 생긴 것일 것이다. 유럽사람들은 소빙하기 때문에 이주할 새 땅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탐험가들에게 새로운 땅을 찾아줄 것을 요구했다. 콜롬부스, 마젤란, 제임스 쿡 등은 그 요구를 들어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 등을 찾아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리로 매우 빠르게 이주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상하게도 식민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서양에서는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엣날 일본이 한국이나 만주를 강점하고 있을 때나,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강점하고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또, 서양이라도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강점했을 때도 러시아인들은 그쪽으로 잘 이주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좋은 본국 놔두고 식민지같은 데 가겠다고 하겠어? 문화시설도 형편없고 야만인들만 득실대는 미개척 지역에 당신 같으면 가겠는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누구도 가겠단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등도 본국인들의 식민지 이주를 권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되려 새로운 영토 경영에 대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적극 이주를 권장했으나 실제 이주한 사람들은 얼마 안되었는데(주 : 가령 일제시 일본에서 한국이나 만주에 이주한 자들은 35년간 고작 2백만이었다. 전체 일본인 8천만 중에 고작 2백만이라니 그것도 무려 40년에 걸쳐서), 유럽인들(러시아인 제외)은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신대륙으로 이주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당연하다.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굶어죽거나 얼어죽기 싫으면 안 가고 배겨? 아예 소빙하기 탓에 농사가 안되고 추워 죽겠으니 싫어도 가지 않으면 안되지... 최소한 남북아메리카는 소빙하기라도 농사지을 기온은 되고,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는 따뜻해서 얼어죽진 않으니까...
따라서, 이때 시작된 대규모의 유럽인 이주로 원주민이 거의 없던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은 완전힌 유럽인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또 원주민이 비교적 많던 남아메리카(마야, 잉카 제국)는 혼혈 메스티조의 나라가 되었다.
소빙하기는 인간의 이주를 촉진한 원흉이었던 것이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마무리된 데는, 소빙하기가 한몫했다는 말이다.
일본이 온난한 기온에서 갑자기 추워지고 혼슈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무사들도 차츰 전쟁을 싫어하고 고향으로 도망가거나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야전 생활로는 얼어죽기 십상이므로 겨울에는 전쟁을 할 수가 없어진 탓이다.
겨울에는 그러므로 군대를 해산했는데, 이듬해 군대를 소집해도 도주하거나 각종 핑게로 응하지 않아 징병제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사, 오다 노부나가는 이 점을 이용해 징병제 대신 모병제와 총으로서 다른 영주들을 공격해 굴복시켜 전국시대를 마감할 수 있었다.
중국도 인구는 늘어나는데, 갑자기 시작된 소빙하기로 말미암아 많은 인구가 굶주리게 되자 이로 인해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반란이 잦아져 결국 명은 망하게 된다.
중국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여 이 난국을 타개하려 했지만, 이때는 이미 서양 각국이 지구상을 몽땅 도리한 상황이었다. 또, 중국은 대륙국가라서 뛰어난 함정을 만들 기술이 부족해 해외로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소빙하기로 인해 굶주리고 얼어죽게 된 백성들은 무능한 정부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긴 소수민족 반란으로 명은 멸망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 생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도 그렇다.
우선 일본은 전국시대는 마감했으나, 무엇보다 소빙하기로 인해 농사도 안되고 따라서 봉록(무사들의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없게 되자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난 무사들을 자연적으로 줄이고, 또 그들의 봉록을 해결할 땅을 정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즉, 임진왜란은 20세기 히틀러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원인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비생산적인 내란 때문에 오랫동안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대와 무기를 소모하고, 또 소빙하기로 궁핍해진 국민들의 밥그릇 해결을 위해 새로운 정복지를 얻어 국외에서 한몫을 단단히 약탈해오지 않으면 나라가 도산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빙하기는 인류에게 엄청난 격변을 안겨다 준 원흉이었다.
소빙하기는 18세기를 고비로 서서히 수그러들어 20세기 초반쯤에는 다시 예전의 기온을 회복했고 최근에는 되려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
너무 많아진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나친 탄산가스를 배출하여 온실효과가 이전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 남북극의 얼음이 다 녹아버리면 많은 땅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강우량이 늘어나 사막이 옥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데가 있으면 들어가는 데도 분명 있다.
문제는, 세계는 국경이 있고 또 급격히 진행되는 온난화 때문에 피해를 일방적으로 보는 국가나 민족이 나올 것이므로 [잘못한 놈은 따로, 잘되는 놈은 따로]의 세계가 될 것 같아 문제지...
본 블로그의 /유물,유적,문화재/면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지식창고(과학&생물 등)/면에 있는 [동양인들은 유전적으로 작은 키를 가졌는가?], [지구의 생성과 변천사 해부], [중세초기 인류의 키는 현재와 비슷해], [빙하기와 온난화], [소빙하기의 영향]을
/역사/면에 있는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과학으로 푸는 '역사 미스터리']를 참고하세요.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hearo9mars 에서 게시물들의 내용화면이 바로 나오지 않을 때는 본 블로그 우측 메뉴에 있는 '카테고리(대분류)'를 통해 직접 게시물을 클릭하면 뜹니다. 그 게시물의 내용(용량)이 많은 관계로 서버가 일시적으로 못 읽어들여 그런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
출처: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화성인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