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날짜를 쓰다가
오늘이 결혼기념일 인걸 알았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결혼기념일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일주일 전부터 저녁을 어디에서 먹을까?
무얼 해 달라고 할까?
마음을 설레이며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용중 님은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저녁을 먹는 것으로 대신하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신경을 써 주었습니다.
오늘은 다리에 하지정맥류 치료를 하러 서울 방배동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수술날짜를 예약하고 흑석동에 살고있는 여동생을 찾아보려고 하였더니
동생은 골프를 치러가고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여동생네도 가보지도 못하고 살다보니 항상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동생은 바쁜 척 하는 언니를 챙기며 동생에게 신경 안 쓰는 언니를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모회에 간다던 동생은 언니가 왔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자매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고 하자
동생은 제부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예약하였습니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형부에게 서울로 올라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입을 옷이 마땅치 않습니다.
정말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용중 님이 보고 있을때 입을 옷이 없다고 신경질을 내는 척 합니다.
그러면 용중 님은 옷을 사러 가자고 합니다. 결혼기념일 선물 이라는걸 잊지 않지요.
다른데에는 매사 구두쇠이지만 마눌 옷을 사주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제가 옷을 사면 한 벌 사기도 어려운데 용중 님과 함께 가면 가끔 두 벌을 사 줍니다.
사회생활도 하는데 한 벌 가지고 되겠느냐고 마다 하는 저를 감동시키기도 하지요.
옷을 사면 저는 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웃 친구들에게 모델 처럼 걸어보며 포즈를 취하고 뒤로 돌아 걸어오며
철 없는 아이처럼 옷 자랑을 합니다. 동서들도 자연적으로 알게 됩니다.
아뭏든 용중 님은 친정으로 시댁쪽으로 친구들 간에
옷을 잘 사주는 남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환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던 아버님을 모시면서
우리는 여행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외출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습니다.
용산 미군부대가 있는곳을 지날 때 입니다.
용중 님은 아버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이의동 작은안골에서 역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셔서
용산에 있는 철도국에 다니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니는 새벽밥을 지으셨고
아버님은 오로지 잘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리에 힘을 주시며 30년을 작은안골에서 용산으로 출퇴근을 하셨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가슴까지 쌓인 눈을 헤치시며 늦은 밤에 집으로 오시는 바람에
기침 해소병을 얻으시어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시집을 와서 새벽 5시에 시계를 맞추어 놓고
아버님 진지를 8 년 해드렸습니다.
점심으로 김밥도 자주 싸 드렸습니다.
출근길 구두도 닦아드렸습니다.
가래질을 하시던 한진석 님의 어르신은
아버님을 보고 양잿물 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셨답니다.
아버님은 땅만 사셨지 당신 손으로 짜장면 한 그릇 제대로 사 잡수시지도 못하시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둘째인 저를 퍽 아껴주셨습니다.
순수하시고 꾸밈없이 솔직하셔서 아무런 감정이 있을리 없지요.
지금도 아버님은 제 기억 속에서 한 없이 고마우신 분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얼마동안은 아버님 생각에 가끔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아버님께 해드린 것은 조금 뿐인데 아버님은 며느리에게 커다란 사랑을
남겨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얼마전 부터 우리는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짧은 여행도 해보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합니다.
아버님의 병환으로 눈물 반 으로 지내고 있던 15 주년 기념일에는
용중 님이 블루스톤의 화려한 알반지와 목걸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오늘 저는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생각지도 않게 서울까지 올라온 용중 님과
동생내외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동동주 잔을 부딪치며 서로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랬지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나른한 동동주 잠을 자다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경기대 후문이라는 안내 방송에 눈을 뜨고 후다닥 내리는 문으로 다가가니
뒤에 앉아계시던 아저씨 한 분이 웃으셨습니다.
" 아직 멀었어요 여기는 북수원 입니다."
첫댓글 그래도 항시 결혼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