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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Cheer Up! 힘내라힘!’ - 2.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나요?
본문 : 사무엘상 24장 18절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으나,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너는, 네가 나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는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새번역>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일까?' 혹시 이런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주일학교에서 늘 들어오던 이야기처럼 하늘만큼 땅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설교 시간에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러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식상한 단어처럼 들릴 때가 있는, '독생자를 포기하기까지 사랑하시는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위대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본질을 잊어버리고 '얼마나' 혹은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의 양과 질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만드는 함정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주로 이 의문을 던지는 순간에 대한 함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이 ‘얼마나 사랑’ 이란 질문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듣고 싶은 순간은, 결코 우리의 신앙이 독수리같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고 있는 때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을 때이고,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말처럼 인식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린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본질보다는 그 외에 것들로, ‘얼마나’, ‘어떻게’, ‘내가 느낄 정도로’, ‘현실적으로’ 라는 말로 하나님을 압박하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하시는 거 보니 저를 이제는 더 이상,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으시는 거죠?' 마치 사랑하면 매 주 마라탕과 치킨, 피자를 사주면서 그 사랑을 보여 주는 게 당연하고, 그렇게 사줘야 사랑한다고 믿겠노라고 말하는 아이들처럼 생떼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에 이미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름부음을 받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승장구하게 되고, 백전백승의 전적을 전하며 이제 곧 왕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왕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존경받고, 축복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사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한 사람 때문에 그는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매일 매일이 두려움의 연속이고,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보낸 세력 때문에 늘 숨어 지내야 하고,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게 된 날에는 곧 자신을 쫓아와 죽이려는 이들에 의해 늘 좌불안석, 지독히도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다윗'이었던 것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만들어져가는 신앙인으로서 '다윗'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완성형 '다윗'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우리는 '다윗'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산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거나 주변에 살고 있는 완성형 신앙인을 보면서 존경스러움과 동시에 질투를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까지 완성형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나 역시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성장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완성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 대한 기억이 늘 편향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참 다행히도, 우리와 동일하게, 다윗 역시 철저히 괴롭고 외로운 광야 생활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사망의 골짜기를 그 역시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우리보다 몇 배의 고통의 시간을 겪은 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에 다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존경할 필요도, 질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공감하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다윗이 하나님을 '깜빡'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었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사무엘상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다윗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이런 상황에 내몬 존재가 하나님일거라고 책임을 돌린 채 외면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나라의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로까지 만드실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화가 났던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마음이 복잡했던지, 그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과 다르게, 아니 처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아주 태연하게 그것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오랫동안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던 다윗이 하나님을 불현듯 찾자마자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 응답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치고, 타작한 곡식을 마구 약탈하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 여쭈었다.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을 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셨다. "그렇게 하여라. 어서 출전하여 블레셋 족속을 치고, 그일라를 구해 주도록 하여라." <사무엘상 23장 1~2절, 새번역>
아주 오랜만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순간 다윗의 마음이 두근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게 응답하실까?', '내가 이렇게 긴 시간동안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는데 내가 필요할 때 찾는다고 하나님이 싫어하진 않으실까?' 그런 마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마치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 늘 함께였던 것처럼, 변함없이 늘 옆에 있었던 것을 티라도 내고 싶어 하시는 듯,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하십니다. 바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떠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도무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디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언제라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29장 11~14절A, 새번역>
별 것 아닌 것 같은 응답이었지만 다윗은 이 응답을 기점으로 다시 회복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전히 함께 계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뜨거운 인격적 교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5G급 울트라캡숑짱 초고속 KTX같은 응답을 통해, ‘그일라’ 사건을 통해, 그 이후의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다시금 뜨겁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경험이 다윗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깊이를 고스란히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사랑 받은 자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법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12절, 새번역>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깨달은 다윗은, 그 이후 사울왕에게 고스란히 그 사랑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원수였던 사울왕을 대하는 사랑을 통해, 원래는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던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사울왕을 죽일 찬스가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그 절호의 찬스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신 것을 기억하며, 그저 사울의 겉옷을 자르는 것에서 그치게 됩니다. 다윗이라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임금님의 겉옷자락을 보십시오. 내가 이 겉옷자락만 자르고, 임금님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나의 손에 악이나 죄가 없으며, 임금님께 반역하거나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임금님은 나를 죽이려고, 찾아다니십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와 임금님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시고, 나의 억울한 것을 주님께서 직접 풀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나의 손으로는 직접 임금님께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1~12절, 새번역>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울왕이 정말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울왕이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성경 그대로 사울이 목 놓아 울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살려준 다윗에 대한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내가 그토록 다윗을 괴롭혔는데 다윗은 왜 내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지?’
이런 질문들 끝에 사울왕은 다윗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줬는지를 모든 이들 앞에서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윗이 보여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을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왕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다윗이 흘려보냈던 사랑을,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흘러온 이 사랑을 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으나,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너는, 네가 나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는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사무엘상 24장 18절, 새번역>
이 구절이 좀 더 잘 설명되어 있는 공동번역도 같이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야훼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고 나에게 이렇듯이 한없는 은덕을 베풀었구나. <사무엘상 24장 18절, 공동번역>
마지막으로 히브리어를 잘 번역하고 있는 바른성경 번역으로도 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너는 나를 죽이지 아니하여 네가 나를 얼마나 선대했는지 오늘 보여주었다. <사무엘상 24장 18절, 바른성경>
성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모든 이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시는지!
하나님은 당신을 끔찍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한없는 은덕, 은혜와 덕을 베푸시는지!
하나님은 당신에게 한없는 은덕, 은혜와 덕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선대, 선하게 대하시는지!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당신을 선대, 선하게 대하시사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깨달은 것처럼, 다윗이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원수 같았던 사울에게 전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 받은 사울왕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시간,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얼마나'에서도 벗어나 '사랑' 그 자체의 본질로 더 깊게 나아가 보시길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은 원수였던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오늘 주일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만 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 반복일지라도 또 말하고 싶습니다. 또 외치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변함없이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도, 사울마저도, 저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를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최악의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양과 질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정말 끔찍히 생각하시며, 한없는 은덕을 베푸시며 선대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끝으로 언제 들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 뭉클해지는 이 말씀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로마서 5장 6~10절, 쉬운성경>
결단 찬양 - 주의 사랑을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후렴 + 나의 하나님 후렴 + 나의 하나님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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