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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기:文谷集卷之二十六 玄上舍士休闢小亭。爲宴息之所。問名於余。余問曰。古人名堂室。不一其義。或以箴警。或以寓興。或以山川景物。子之意何居。士休曰。唯唯否否。吾才疏性懶。安於弛置。年及五十。蔑蔑乎無聞。則其言之尤行之悔。而可以箴警者多矣。窮居閒處。幸無羈紲之苦。稼圃弋釣琴尊棋槊。凡可以寓吾興者。亦非一也。弊廬在鳩林里中。占地最軒敞。月岳抱其前。西湖環其後。篠簜橘柚梅榴之植。交映於左右。則山川景物之供吾應接而可取以爲名者。又不可勝數也。然三者吾皆不以名吾亭也。余請其故。則乃欷歔而言曰去吾舍數里。吾叔父寢郞公別業在焉。園林臺沼。擅勝於一鄕。可與古所稱輞口卯橋爭其霸矣。築一亭其中。顏曰就陰。卽叔父之所寄傲也。不幸叔父歿世。禍敗蕩析。後承不能保家業。未及十數稔。而舊居已爲墟矣。其巋然如魯殿者。獨其亭在耳。又將撤其材而貨之。爲村民之所有。則吾於是愍然有不忍於心者。遂歸其直而移構于此。冀以無廢叔父之舊焉。子幸而名吾亭。願用是志之也。余作而曰。有是哉。士休之篤於親也。請名之曰竹林可乎。在昔竹林之所謂賢者七人。而阮家叔姪居其二。夫以諸阮子姓之衆多。咸也獨能同其遊。雖如風韻似父之渾。而亦不得預焉。嗣宗之於仲容。其契許可見矣。今寢郞公非無似續。而莫有任花石之託者。顧士休乃能眷眷於堂構之傳。士休之事叔父如此。則其叔父之視士休。不減步兵之阿咸者。卽可知矣。名其亭。宜無以易此也。況就陰之義。實取蒙莊。則其與林下趣尙。蓋亦不殊矣。名之以此。庶幾不畔於舊稱也。噫。竹林之遊。可謂極一時之跌宕。而及至嵇阮殞逝。風流雲散。則其親朋酒徒踐遺墟經舊廬。無不撫跡興感。若黃壚之嘆山陽之賦者。此固人情之所必至也況以士休之篤於親。而昔之杖屨觴詠所追陪而周旋者。今皆蕩然爲榛莽鼪鼯之場。則所以彷徨想慕。愴焉愾焉者。又豈他人比哉。是以於其榱棟之遺。猶且愛惜收拾。俾不爲易主之歸。至扁其亭。則又舍其可名者。而必欲以寓其思焉。士休之用心。其亦勤矣。余誠嘉之。敢不表而揭之。以彰士休之志也。傍有客質余曰。子之言則然矣。魏晉之士。放曠越禮。吾儒所不取。末哉。子之待士休也。余應曰。是不然。今余所取名於竹林。不過阮家父子事耳。庚桑子。老氏之役。而朱夫子取畏壘。以名其菴。則亦奚異於是哉。且子不聞山巨源之稱仲容乎。淸眞寡欲。萬物不能移。則雖云任達。其賢於今之逐逐利名者亦遠矣。斯獨非可取者耶。客默而退。士休請錄其語以爲記。遂書以與之。
해설
竹 林 亭 記(기)
현징 사휴가 작은 정자를 지어놓고 손을 맞아 연접하며 평소에 쉬는 곳으로 하면서 그 정자 이름을 나에게 물으므로 내가 묻기를 사람의 이름과 당실의 이름은 그 뜻이 한결같지 않아, 혹은 잠(箴)과 경계(戒)로 하고 혹은 흥을 붙여 지으며, 혹은 산천경물을 뜻하여 짓는 것이나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라고 하니 사휴가 말하기를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나는 다섯 자도 못 된 몸으로 성질 또한 게을러 편히 살며 나이 오십에 이르렀으나 더할 나위 없이 들은 바가 없었으며, 말과 행해온 일에 후회가 많으므로 가히 잠(箴)으로 깨우치기를 많이 하고자 합니다.
궁지에서 한가히 살면서 율수도 하지 못하고 포전에 억매여 가꾸고, 낚시나 거문고 술과 기박으로 흥을 붙여온 일이 한 두 번 뿐만 아닙니다.
나의 폐려가 구림마을 옛터 가운데 있어 월출산을 보듬고 있으며 앞으로는 서호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나무, 유자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를 심어 놓고 있으니 좌우에 비친 산천 경물에 따라 내가 응한 것에 접하여 받드니 가히 취하여 이름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가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 내 정자의 이름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곧 한숨을 내어 쉬며 말하기를 “내 집과 몇 리 떨어진 곳에 나의 숙부 침랑공의 별장이 있으니 원림에 있는 대와 초의 경치가 한 고을에 드러나 가히 옛날 중국의 왕유의 별장보다 났다라고 하였다.
한 정자를 그 사이에 지어 편액을 취음이라 한 것은, 즉 숙부가 즐거움을 부친 것이니 불행히 숙부가 세상을 뜬 후로 화를 입어 폐하고 유랑하여 후손들이 능히 가업을 보존하지 못하여 십수년에 이르지 못하여 옛날에 살았던 곳은 이미 남은 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우뚝 서서 마치 노둔한 큰 집만은 다만 그 정자일 뿐이었으니 또 장차 그 재목을 철거하여 재물로 여겨 촌민의 소유물이 되었으니 내가 이를 민망히 여겨 마음에 참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값을 돌려 여기에 옮기어 지어 숙부의 옛 정취를 지키고자 합니다.” 함으로 그대가 다행히 이미 이름을 지었도다. 라고 하고 내가 그 정자의 이름을 인용하여 짓겠노라고 하였으니 사휴의 작은 아버지에게 독실함이여! 라고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름을 죽림정이라 함이 옳겠구나 라 하였다. 옛날 중국 위나라 말엽 진나라 초기에 허무를 주장하며 죽림에서 술 마시면서 청담을 하고 지내던 유영을 비롯한 일곱 선비가 있었으니 그 가운데 원적과 원함은 숙질간으로 그 곳에서 두 지류를 이루고 살았으며 두 선비의 자성이 많았음에 느낌이 많았다.
홀로도 능히 자적하였을 것이나 그와 같이 함께 노는 뜻은 비록 풍류와 음율은 같다손 치드라도 글은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또한 얻어진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
중용과도 함께 허계하고 지냈음을 가히 볼 수가 있다. 이제 침랑공이 후손이 없지 아니하나 화석을 맡아 부탁할 자가 있지 아니 하거늘 사휴가 원하는 것은 이를 챙겨서 당을 지어 전하는 것이 사휴가 숙부를 섬기는 것을 이와 같이 하니 숙부와 사휴 간의 정리가 가히 아름답게 여기는 것에 덜지 아니함은 곧 가히 알겠다.
그 정자의 이름을 붙임에 마땅히 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 하물며 취음의 뜻은 실지로 내포하고 취하고 있으니 그 임하의 뜻과 고상한 것으로 취향을 펼쳤음이 다 다르지 않으리라. 이름이 이러 하니 거의 모든 것이 옛날부터 칭한 바가 아닐 수 없도다.
아! 슬프다 죽림칠현이 죽림에서 놀았던 것은 가히 한때 가만히 도사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혜강과 완적이 서로 풍류를 하다 구름이 활짝 개이면 친히 술동이를 갖다 마시며 뜰을 지나고 옛날부터 전해 오는 유허지를 돌고 돌아 흥감하여 어루만진 자취가 없지 않으며 황천에의 탄식과 피리소리를 듣고 옛 생각으로 시를 하는 등 이는 반드시 진실로 인정이 지극한 소치 일 것이다.
하물며 사휴도 친의에 돈독하니 옛날 숙부의 장구를 따라 시도 읊으면서 배종하면서 두루 살폈으나 이제는 다 탕연해서 묵었으며 족제비나 박쥐 때의 마당이 되었으니 사휴로서는 방황하면서 추원함이 창연하고 개연하여 어찌 다른 사람에게 비기겠는가?
이로써 그 석가래와 기둥의 유적에도 오히려 또한 애정을 수습하여 가히 쓸만하면 바꾸지 말고 그 중지방을 다시 써야할 것이다. 그 정자에 편액 하는데 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그 가히 이름 지을 것을 두고 반드시 그 생각을 붙이고자 한 것이다. 사휴가 힘을 씀이 그 또한 가상하도다.
나는 진실로 그것을 가상히 여겨 감히 들어내 사휴의 뜻을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곁에 있던 용질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말씀인즉 그러하나 위나라 진나라 선비들이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예교를 넘어섬에 우리선비가 그 끝이라도 취할 수 있으리오.
그대는 사휴를 대접하는 구려 하니 내가 응하여 말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이제 내가 그 이름을 취하는 것은 죽림칠현중 원가 숙질의 사적이 없고 강자가 노씨의 경안을 보지 못 하였다면 주부자께서도 암자의 이름을 중첩으로 취한 것과 어찌 다를 바 있으리오.
또한 그대는 산천 거원에서 한가하였다고 중용을 일컬음을 듣지 못 하였는가? 맑고 참되게 욕심이 적어 만물에 뜻을 두지 않았던 정취를 가히 취한 것이다. 라고 하니 객이 묵묵히 물러가고 사휴는 그 말을 청하여 기록하여 죽림정기로 삼을 것을 청하거늘 드디어 써 주었다.
죽림정 12세손께서 보내준 해설임
敬次三淵叔父韻連留竹林亭: 경차삼 연숙부 운연유죽림정
三世奇緣復此亭 (삼세기연복차정): 삼대 째 기이한 인연 이 정자에 다시 이어지니. 月山愁色萬冥冥 (월산수색만명명): 월출산 수색이 늦도록 어둡고 어둡네. 霜毛世傍孤梅白 (상모세방고매백): 백발이 세상 곁에 외로워 매화꽃 같이 희고 病始偏將萬竹靑 (병시편장만죽청): 괴로움은 편장 같으나 일만 대는 푸르르네. 先札細看燈欲盡 (선찰세간등욕진): 선대 서찰 자세히 보니 촛불이 다 되고자하고 舊悲重說酒淑醒 (구비중설주숙성): 옛 슬픔 거듭 말하니 술이 맑게 깨이네. 從君碩作西湖隱 (종군석작서호은): 그대를 쫓아 크게 짓고 서호에 숨으려고 하여. 故里滄桑已再經 (고리창상이재경): 옛 마을이 변하고 변하여 이미 두 번이나 지나갔네.
庚戌(경술) 暮(모)春(춘)日(일) 金信謙 경술년 저문 봄날에 김신겸. 죽림공 후손께서 보내준 해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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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은 삼벽당기(三碧堂記)를 자작 삼벽당(현약호의 집)에 걸어주었다. 내용에 우옹(우암 송시열) 이 삼벽당이란 당호를 써 주었다고 적어있다.
읽기 권24, 三碧堂記 (삼벽당기) 玄君欽甫從千里命駕訪我於碧溪之中 時方窮陰 衡門之外 雪至尋 현군흠보종천리명가방아어벽계지중 시방궁음 형문지외 설지심
丈炯然一燈相與作土銼中語 以已相嗚咽也如是者凡三夜 談話之所 장형연일등상여작토좌중어 이이상오인야여시자범삼야 담화지소
繚繞三周月出山矣臨別欽甫以其堂三碧記爲託余謝以已焚筆硯 則 료요삼주월출산의림별흠보이기당삼벽기위탁여사이이분필연 즉
欽甫曰余知子悰緖矣 若他文則敢以煩子字之先君子嘗爲吾翁作竹 흠보왈여지자종서의 약타문즉감이번자자지선군자상위오옹작죽
林亭記 則今其文尙壁上留也子豈忘之哉 吾堂於斯亭卽其同宮 而 림정기 즉금기문상벽상류야자기망지재 오당어사정즉기동궁 이
爰有一松一栢以承其檀欒 蔚然庭翠合焉 若是而名之曰三碧嘗請于 원유일송일백이승기단란 울연정취합언 약시이명지왈삼벽상청우
尤翁得三大字矣余問尤翁之筆尙在乎曰在曰何從得之欽甫欷歔有間 우옹득삼대자의여문우옹지필상재호왈재왈하종득지흠보희허유간
曰是殆尤翁絶筆也耽羅之船明日發而今日寫此 乃在萬德之白蓮寺 왈시태우옹절필야탐라지선명일발이금일사차 내재만덕지백연사
時鯨濤罷岸 死生在前而人客之自崖送者方且乞字如雲無敢以舍達 시경도파안 사생재전이인객지자애송자방차걸자여운무감이사달 之說廣尤翁尤翁於此請 似是愛其名之意爲多 以故其筆分外奇勁今 지설광우옹우옹어차청 사시애기명지의위다 이고기필분외기경금
揭之 凜乎其霜幹雪莖與庭碧相低昻于以寓俯仰瞻邑之誠 一視諸竹 게지 늠호기상간설경여정벽상저앙우이우부앙첨읍지성 일시제죽
亭文而無間焉 吾堂雖小所重有在爾余斂袵起坐泫然耳應之曰欽甫 정문이무간언 오당수소소중유재이여염임기좌현연이응지왈흠보
之屬以此 有言無言之間 皆吾所不忍也 嗚呼 葦嶺之南以際大海先 지속이차 유언무언지간 개오소불인야 오호 위령지남이제대해선 君與尤翁心迹盡此 而公議之在世者至今有未定焉子之父子在南士 군여우옹심적진차 이공의지재세자지금유미정언자지부자재남사
中特能終始慕用不以禍故而小解 至使片蹄殘墨 無恙崑丘烈燼之餘 중특능종시모용불이화고이소해 지사편제잔묵 무양곤구렬신지여
而碧紗璇額之奉邂逅 情神之斯會 夫存其蹟所以慕其人慕其人 所 이벽사선액지봉해후 정신지사회 부존기적소이모기인모기인 소
以崇其道 崇其道所以권其操 是其爲心之貞雖謂之獨也靑靑可也以 이숭기도 숭기도소이권기조 시기위심지정수위지독야청청가야이
是心處斯堂 吾知其無所愧矣亦見其所寄者遠矣石室之茂華陽之悅 시심처사당 오지기무소괴의역견기소기자원의석실지무화양지열
先君與尤翁 蓋嘗以此託契矣子之家庭竹林之韻 又將 與之不衰廣 선군여우옹 개상이차탁계의자지가정죽림지운 우장 여지불쇠광
而言之是又三碧之義也 嗚呼其奇矣 今不以山川有間隔不爲寒暑所 이언지시우삼벽지의야 오호기기의 금불이산천유간격불위한서소
移奪雖百年可如一日雖千里可視一堂 惟我兩家爲同調者如此而若 이탈수백년가여일일수천리가시일당 유아양가위동조자여차이약
吾所居最爲陰峽耳寒松苦栢澗谷所不乏 獨不得此君而參焉 其將盤 오소거최위음협이한송고백간곡소불핍 독불득차군이참언 기장반
桓於此而矯首南雲以寄淸血於風玉之所而已 환어차이교수남운이기청 혈어풍옥지소이이
三淵 金昌翕 謹記 (삼연 김창흡 근기)
해설 권24, 삼벽당기 현군 흠보가 천리 길에 가마를 명하여 벽계(檗溪)에 있는 나를 방문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엄동설한이라 문(門) 밖에는 눈이 질로 왔었다. 등 하나를 밝히고 서로 토좌(土銼 : 질그릇의 화로)를 가운데 놓고 말을 하다 서로 오열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무릇 삼일동안 하였으니 담화를 한 곳은 월출산이 둘러 있는 곳이었다. 작별할 때가 되어 흠보가 그 당을 삼벽이라 말하며 기를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필연을 불살랐다”하고 사양하니 흠보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계통을 좋아하는 것을 아네.
만일 다른 글 이라하면 감히 그대를 고민하게 하겠는가.”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께서도 일찍이 나의 아버지를 위해 죽림정기를 지었으니 지금 그 글은 오히려 벽 위에 남겨져 있는데 그대도 잊지 않으셨겠지? 내 당도 이 정자와 즉 그 同宮(동궁)이니 이에 한 소나무와 한 잣나무가 있어 그 단란함을 이어서 우연히 정에푸른빛을 합하였다네.
이와 같으니 그것을 이름 짓기를 ‘삼벽’이라고 하여 일찍이 우옹에게 청하여 세 개의 큰 글자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나는“ 우옹의 필체가 아직도 있는가?”라고 물으니. 흠보는“있다”라고 하였다.
나는“어떤 연유로 그것을 얻게 되었는가?” 물으니. 흠보는 한숨을 내쉬며 사이를 두어 말하기를 “이것으로 거 의 우옹은 절필(絶筆)하였다. 탐라(耽羅 : 제주도)로 가는 배가 내일 출발하는데 오늘 그것을 써 주었다.
강진 만덕(萬德)의 백련사(白蓮寺)에 있을 때에 고래 등 같은 파도가 연안까지 쳐서 생사가 목전에 있는데 손 들이 언덕 쪽으로부터 와서 글씨를 써 달라고 걸구하는 사람이 구름같이 몰려 있을 때 감히 차분한 말로 우옹에 게 장광 설하여 우옹이 이 같은
청에 그 이름의 뜻을 많이 사랑하여 그 필력을 발휘 과분하게도 기이하고 강하게 써 주었으므로 이제까지 걸어 놓았으나 그 늠늠함이 서리발치고 뜰 가의 송백은 푸르름을 서로 낮게 빛나니 부앙하며 처다 보는 고을 사람의 정성이 한 번 보아도 모든 죽정의 문사들과 거리감이 없다 하였다. 이 당은 비록 작으나 소중함이 있었으므로 나는 옷깃을 거두고 일어났다 앉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 응하여 말하기를 흠보가 이같이 부탁 하는데 말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내가 못하겠다. 라고 차마 하지 못하였다. 아버 지를 위해 죽림정기를 지었으니 지금 그 글은 오히려 벽 위에 남겨져 있는데 그대도 잊지
아! 장성 갈 때 남쪽 큰 바다 끝에 내 아버지와 함께 우옹의 자취가 이곳에 다 있으나 세상 공의는 정해지지 않았고 그대 부자(父子)가 남쪽 선비 가운데 있어 특히 종시(終始) 능히 모용 하였으며 화를 당하지 않았으나 조그마하게 남은 먹 조각에 하염없이 활활 타다 남은 곤구 벽사와 선액을 받들어 해후하게 되니 정신이 이에 모여진다.
그 자취가 상존함은 그 사람을 추모함이요 그 사람을 추모함은 그의 도를 숭상함이요 그 도를 숭상함이란 그 지조의 따름에 힘쓴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이므로 비록 독야청청이라고 하드라도 가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이 당에 처해 있으니 나는 그 부끄러움이 없는 바를 알만하며 또한 그 먼 때부터 뜻을 부쳐 왔음을 볼 수 있다.
석실과의 성함과 화양과의 즐거워했음을 내 아버지와 함께 우암과도 일찍이 이곳과 탁계(託契)해서 지내셨으며 그대의 가정에 죽림의 운을 장차 주어서 정의가 쇠하지 않았으니 널리 말해서 또한 이것이 삼벽의 뜻이기도 하다.
아! 그 기이한 것은 지금도 산과 냇의 사이가 막히지 않아 춥거나 덥거나 이탈하지 아니하고 비록 백년이라도 하루같이, 비록 천리 길이라도 가히 이 당에 와 보니 오직 우리 두 집안은 함께 조화해 온 것이 이 같으므로 내가 사는 곳이 가장 음협하다.
이곳에 찬 솔과 패로운 잣나무는 시냇가에나 고을에서 궁핍하지 않으니 나 같은 사람은 이 사람 같이 참내하기를 얻지 못할 것이므로 장차 이곳을 주저하면서 남쪽에서 피어나는 구름을 머리를 들고 청혈과 풍옥지소를 향하여 볼 마음뿐일 것이라. |
삼벽당 당호는 1689년 2월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 유배길에 강진에서 써주신걸로 문헌집에
나타난다.
이곳 죽림정은 현재 550년째 대대로 살고있어 모든 문헌들이 유실되지 않고 있어 연구목적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첫댓글 자료 올리는중임
죽림정 자료(해설) 그의 후손이 보내준자료 입니다..
벽계(檗溪)마을 앞을 흐르는 벽계천(檗溪川)은 용문산에서 발원하여 입구 지계곡과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를 지난 다음 우리군 서종면 통방산 산기슭을 휘돌아 노문리를 거쳐 수입리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드는데
사암 박순 이후에도 조선시대의 문신과 유학자(이제신, 남언경, 삼면 김창흡) 등 당대의 명인들이 또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백계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는 어진 이들이 살아갈 흥취를 일게 했던 경기도 양평쪽을 말함
조선시대 때는 탐진(강진)에서 탐라(제주)가는 뱃길이 가장 안전하고 가깝다고 한다.
우암은 1689년 2.4일 유배명을 받았다.
아주 반갑습니다. 좋은 자료 실어주시어 크게 고맙습니다. 죽림정에 이런 자료가 있는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 하세요?
저도 서울에 살기에 친정 (나주)가는 길에 들려본것입니다.
구림 마을을 한바귀 도는데 양~입구의 보호수가 심상치 않아 들어간것인데 주인장께서 뜻밖에 문곡선생님의 유배지가 이곳이라고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