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만(張晩) 초상화
[생졸년] 1566년(명종 21)~ 1629년(인조 7) / 향년 63세
조선 18세기 경기도유형문화재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옥천부원군 문중 위탁 영정(위탁 504)
장만(1566-1629)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며,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표) 1등에 올랐다.
경기도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두 점의 장만 초상 중 일상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서 머물다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장만은 안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17세기 초에 처음 그린 초상을 나중에 다시 모사(模寫) 한 것으로 보인다.
선비가 한가하게 머무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든 자세 등은 신선을 연상케도 한다. 장만이 입은 심의(深衣)의 깃과 소매의 형태, 안감의 색 등도 일반적인 조선의 복식과 차이가 있다. 장만의 문집에 선조로부터 금룡(金龍)이라는 부채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와의 연관성도 흥미롭다.
-------------------------------------------------------------------------------------------------------------------------------------------------------
■ 장만(張晩)
[생졸년] 1566년(명종 21)~ 1629년(인조 7) / 향년 63세
조선 후기에, 우찬성, 병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증 이조판서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장기정(張麒禎)이며, 어머니는 백천 조씨(白川趙氏)로 조광침(趙光琛)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 ·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 승문원의 벼슬을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 형조좌랑 · 예조좌랑 · 전적 · 직강 · 사서 · 정언 · 지평을 역임하고, 1599년(선조 32) 봉산군수로 나갔다.
이 때 서로(西路)에는 명나라 군사가 내왕했으므로 그들에게 급식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수령들을 결박하고 욕을 보이는 등 행패가 심했으나 그들을 잘 다스려서 도리어 환심을 샀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전해져 통정대부(通政大夫,正二品 당상관)에 승계(陞階)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에 오르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승지(都承旨) · 호조참판 · 대사간(大司諫,正三品)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왕후의 고명주청부사(誥命奏請副使) · 세자책봉주청부사(世子冊封奏請副使)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수년 동안 안으로는 형조 · 병조의 참판, 밖으로는 전라 · 함경 양도의 관찰사(觀察使,從二品)가 되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 때에는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침입을 경고해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했고,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從二品 )로 호지(胡地)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듬해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건의로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從二品)로 나가 관서민(關西民)들이 편리하도록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여진추장에게 공첩(公牒)을 전달해 여연(閭延,평안북도 자성순 여연면) 등 오래 폐지되었던 4군(郡)이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켜 들어와 사는 여진사람들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참판으로 조정에 들어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從二品)를 겸하였다. 당시 대북의 전횡을 힐책하다가 일시 삭직되었으나 곧 승계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1619년(광해군 11) 체찰부사가 되어 요동 파병에서 패망해 서쪽 국경이 동요되자 이의 무마에 힘썼으며, 왕명으로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1569~1626)과 함께 대 후금정책을 협의하였다. 이어 숭정대부(崇政大夫,從一品)에 오르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공사처리가 도리어 권간(權奸)들의 시기를 받자 벼슬을 포기할 각오로 시정(時政)을 극론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칭탁하고 통진(通津,김포 통진읍)으로 물러갔다. 다음해 인조반정(1623년 3월 12일)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도원수(都元帥,正二品)에 임명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1587~1624)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右贊成,從一品) 에 임명되고 팔도도체찰사로 개성유수(開城留守,從二品)를 겸했으며, 그 뒤 병을 구실로 풍덕(豊德(개풍군 풍덕리) 별서(別墅)로 내려갔으나 왕의 준책(峻責,꾸짖음)을 받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병조판서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사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洛西集)』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