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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3 삼국시대 - 유비와 오나라의 이릉전투와 제갈량의 위나라 북벌
1. 이릉 전투 :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가 오군의 공격에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고 형주를 잃게되자 분노한 유비는
수년 후에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는데... 진밀은 천시로 보아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운은 위를 쳐야 한다며 말렸으며 호삼성은 일에 있어서 앞에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안다고 칭찬했지만 유비는 신하들의 조언을 묵살하고 조운을 강주로 보내고 진밀은 하옥합니다.
도인 이의기에게 길흉을 묻자 병마, 병기와 의장 수십장을 그린 다음 하나하나 손으로 찢고는
대인(大人) 한 명을 그려 땅을 파 묻고는 곧바로 떠나며 불행을 예견하니.... 유비는 마뜩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출전을 강행하는데, 그 와중에 221년 장비가 범강과 장달에 의해 죽는
등 불안한 조짐이 보였으나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둔 뒤 오나라로 진군합니다.
제갈량은 조운과 달리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햇는데 그의 형 제갈근도 유비에게 사자로 갔을때
제갈량 때문에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은 때문으로 보이니... 7월 유비군이
백제에 도착하자 오나라는 제갈근이 편지를 보내 같은 원수라면 더 큰 원수 조비를 치라며
화해를 청하지만, 유비는 거절하고 오나라를 공격하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 합니다.
이에 대해서배송지는 '글자가 아깝다' 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격렬한 어조로 제갈근의 화친 건의를
비판했지만, 그러나 호삼성과 삼국지집해의 주석가들은 제갈근의 편지가 가진 이론적 설득력에
강한 동의를 표하며 유비의 섣부른 원정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데.... 한편 조비 쪽에서는
유비가 손권을 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니 '촉은 관우가 죽었으니 공격할 여력이 없다' 였습니다.
하지만 유엽만은 두가지 이유를 들어 예상했는데 첫째는 위신을 세우고 촉이 약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관우와 유비의 개인적인 관계를 들었는데.... 221년 8월 손권은
스스로 조비에게 번국을 청하며 관우를 물리치며 얻은 우금을 돌려보내는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지만 이때 유엽과 조비와의 대화는 자치통감에 길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형정이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오나라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손권은 거절하는데.... 하지만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장수들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분해하니 형정은 오나라가 오래 밑에 있지 않으리라
는 사실을 깨닫는데.... 손권은 조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니 조비의 권유로 위에 귀순해버립니다.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하니.... 이런 말도 안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신하들은
모두 기겁하며 사치품의 요구량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였으나, 손권은 조비를 두고
예의를 가지고 따져도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공물을 갖추어서 보내 줍니다.
221년 7월 촉군이 공격을 시작하니 당시 오군은 이이, 유아를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시켰고 육손은
후방인 이릉에서 감독하며 촉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상태였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과 풍습은
무현에서 이이를 격파하고 자귀에 주둔하니, 손권은 육손에게 가절을 주어 대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주연과 반장, 송겸과 한당, 서성과 선우단, 손환을 포함한 5만군을 배속시켜 형주 방어전을 일임합니다.
자귀에 도착한 촉군은 마량을 무릉 오계 만이에게 보내 협력을 구하며 '호응'을 얻어내는데... 영릉
과 계양에서 습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보즐을 파견하니 그는 습진을 격파하고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였으므로, 결국 남방에서 군사적 동맹을 얻으려는 유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며
222년 1월이 될 때까지 촉군은 형주와 익주 분기점인 자귀에서 형주 방면으로 진출을 준비 합니다.
222년 1월 촉군이 익주 자귀에서 형주로 나오자 육손의 부장 송겸이 촉의 진채 다섯곳을 함락시키고
포로로 잡은 촉군 장수들을 참수하니..... 패퇴한 유비의 군은 다시 자귀로 돌아오자 유비는 오반
과 진식이 이끄는 수군을 통해 형주의 입구 이릉까지 진출에 성공하며 강 동안과 서안을 차지합니다.
222년 2월 자귀로 돌아갔던 촉 본대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고 산을 따라 행군하여 이도까지
나아가자.... 오군의 손환은 공을 세우기 위해 단독으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대와 맞서다가
포위당했으며 한편 유비는 출정 직전 황권이 했던 간언을 무시하고 직접 최전선에 위치합니다.
황권은 본래 물의 방향 때문에 퇴각이 힘들고 오군이 사납다는 이유로 유비가 직접 전선
에 나서는 일을 반대하였으나.... 유비는 황권을 후방인 이릉에 배치해 위군을 감시
하도록 시키고, 자신은 최전선인 효정에 도독 풍습과 함께 본대를 이끌고
주둔하는데 이 선택은 이후 육손의 화공이 시작되자 치명적인 실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222년 6월까지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가니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해 싸우기를 청하나 육손은 칼을 빼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었고.... 육손은 이릉
에서 포위당한 손환의 구조 요청을 거부하였으며 왜 손권의 친척을 구원하지 않느냐는 장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관찰하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는데 육손의 예측대로 이도는 함락되지 않습니다.
전황이 고착되자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명의 군사를 주어 육손을 유인하려 시도하였으나, 유비가
산골짜기에 둔 복병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았으니 유비는 8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오고... 전황은 고착되어 5~6개월간의 대치 동안 유비군은 형주평야의
입구인 자귀에서 40km 진군한 상황이었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는 400km를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자귀에서 나온 촉군은 이릉, 효정, 이도의 약 40km 범위에 걸쳐 넓게 주둔하는 상태였는
데.... 이도는 최전선의 손환 포위망이었고 효정은 강건너에 주둔한 본대이며, 후방인 이릉은
황권이 주둔하여 익주로 연결되는 통로인 자귀와 이어지는 후방 연결통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촉군은 육손의 전략대로 오나라의 영토내로 5, 6백리 들어와 장강을 따라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진영을 형성했으니 이렇게 긴 진지는, 상황을 전해들은 조비가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길거란 소식이 들릴 것이다." 라고 평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시하는 일이었습니다.
육손전과 다른 오서 기전에 남은 기록들을 보면 촉군은 배를 버리고 진격 속도가 대단히 둔화된
상태였는데.... 형주 상실 당시 관우가 이끌던 병력은 모두 형주를 장악한 오군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촉군은 장강이 뻗은 형주를 공략하기 위해서 익주에서 키운 수군만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수군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것을 볼 때 유비는 익주에서 불과 수년간 억지로 만들어낸
수군만으로 오의 형주 수군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긴 보급거점
전체를 산지에 배치하는 식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요새화의
대가는 아주 느려진 진군속도와 비대화된 보급소요에다가 초반 기세의 상실이었습니다.
222년 6월 육손은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촉의 진지들을 화공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니.... 최초의 효정 타격 당시에 도독 풍습과 선봉인 장남이 사망하였고 유비는
격파당해 퇴각하는데, 이때 풍습을 벤 것은 반장이 이끄는 군사였으니 이로서 촉군은
오군의 전면적 공격에 맞서 상황을 수습할 지휘부를 잃게 되고 각 진지의 혼란이 가중됩니다.
풍습과 장남은 효정 본대에 주둔하며 이도의 손환 포위망을 감독하던 상태로 보이니 촉군의
선봉은 강 건너 반대편인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포위가 자연스레 풀릴 것'
이라는 육손전의 묘사를 볼 때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한 촉군은 육손의 타격 대상은 아니
었고 효정이 타격당하고 지도부가 궤멸하자 자연스레 포위를 풀고 퇴각을 택했다고 보입니다.
오군이 포위된 이도 구원을 회피하고 화공으로 촉군 본대 효정을 성공적으로 타격함으로서
각 거점들은 통합적인 지휘를 상실하고 개별적으로 육손의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한편 손환과 합류한 육손은 이릉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
가며 촉군의 진지들을 계속 타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성이 여러 둔영을 공격해 취했습니다.
지휘부가 통제력을 잃고 퇴각하는 상황에서 촉군의 개별 진지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파괴되었으니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와 유녕은 항복하였고.... 종사좨주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였는데, 뒤에서 추격자가 곧 온다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도주하라고 권한 가삼의 말을 무시했다가 결국 전사합니다.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강을 통해 북진하며 40여곳의 진지를 격파하였고 이 과정에서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이 사망했는데..... 때는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육손은 기후를 살펴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습니다.
이릉보다 후방인 형주 평야에서 익주산맥으로 넘어가는 입구 자귀 근처 마안산까지 후퇴한 유비는
산 위에 올라 대파한 군대를 수습하려고 시도하지만, 북상하며 유비를 추격하던 육손은
마안산을 포위했 오군이 사방에서 육박해오자 유비군의 진영은 붕괴하여 오군에 대패하였습니다.
육손은 효정의 기습적 타격에 이어 수습을 시도하던 유비군을 마안산 전투에서 격멸하는데 성공
하였고, 이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형주 방면으로 나간 촉의 4만여군은 최종적으로 격멸된
것으로 보이는데.... 퇴로를 차단당한 촉군 중 상당수는 항전을 포기하고 오군에게 투항하였습니다.
마안산에서 대패한 유비는 다시 퇴각을 시도하며 후진으로 부융을 남겼고 부융은 결국 전사하는
데... 기록에 따르면 사망할 당시에도 기세가 사그러들지 않았고 오나라 사람이 타이르며
항복을 권해도, '한의 신하는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치 않는다' 며 욕하다가 죽었다고
전하는데 오군은 마안산에서 촉군의 형주방면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군은 마안산으로부터 다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촉군의 진지들을 격파하며 유비를 추격
하였고 선봉은 유비에게 포위당했던 손환이 맡았는데.... 유비는 자귀에 간신히 도달
하였으나 손환이 유비보다 '앞서서' 길과 탈출로 곳곳을 '먼저' 끊어 뒀기에 자귀에서 백제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인 배를 포기해야 했으니 유비는 결국 험한 산길을 택해 탈출을 시도합니다.
유비를 뒤쫓던 오군은 자귀 수복에 성공했는데 자귀의 촉군 중 진지를 보전한 군은 아문장인
상총의 군 뿐이었으며... 왕보가 자귀에서 사망하고 오군이 자귀 수복에 성공한 것을
보면 전투가 있었다는 것인데, 넓게보면 마안산 - 자귀 패퇴는 개별적인 사건이라기 보다
자귀에서 마안산까지 이어져 있던 진영에서 연이어 벌어진 패퇴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촉군을 추격하며 후방의 진지들을 부수던 오군을 피해 산길을 택한 유비는 간신히 백제성(百濟城)
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때 일부 역참의 관료가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222년 7월 패퇴한 유비는 오군의 추격을 피해 영안에 도달하였는데 유비를 추격한 이이, 유아의 군은
영안 근처 남산에 이르렀으니 조운이 위기에 처한 유비를 구하기 위해 백제성으로 향했을 만큼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는데.... 오군 내부에서는 백제성에 몰린 유비를 공격할지에 대해 서성,
반장, 송겸은 유비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를 예견하며 거절합니다.
222년 8월 오군이 촉군을 격파하자 북부에 주둔하다가 퇴로가 끊긴 황권과 사합은 위나라
에 항복했고 무릉만이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했는데... 역사학자 Rafe 는
이릉대전에서 촉군이 패하는 모습을 본 무릉만이들이 마량을 처형했다고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오나라의 기전에서 마량을 죽인 공과에 대한 서술이 전무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222년 10월.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화친을 제의하고, 유비가 받아들이면서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
대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사신 교환은 12월까지 이뤄졌는데..... 이후 조비가 육손의
예상대로 오나라로 밀고 들어오면서 오나라 독립의 마지막 분기점인 남정 방어전이 시작되게 됩니다.
위나라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가 육손에게 보낸 편지와 육손의 답신이 육손전에
남아 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적이 강릉에 있다며 지원군이 필요하냐고 묻는 유비의 질문과,
당신의 군대는 상했으니 목숨을 보전하고 싶거든 상처를 추스르리라는 육손의 화답으로 구성됩니다.
2. 제갈량의 북벌 :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겠다 (鞠躬盡瘁, 死而後已)” 촉한 재상
제갈량이 6년간 위나라를 공격한 전투로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서진의 삼국통일(280년)까지
이야기 중 제갈량의 사망(234년)은 중간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 다루는 제갈량 사후 분량은 전체의
1/9 정도인데 230년대를 기점으로 중국사에 길이 남을 용장이나 맹장들이 죽어버렸기 때문으로 봅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지를 이어 위(魏)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번 북벌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오장원에서 쓰러졌으니 '육출기산(六出祁山)' 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섯차례의 출병이 있었으며 기산 방면으로 출병한 건 2번(1차, 4차) 이고
2, 3, 5 차의 경우는 기산 방면이 아니라..... 관중과 사천 지방 사이의 평지로 진출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으며 소극적이었던 비의 시대를 거친후 강유가 유지를 이어받아 재차 6~ 7번째
북벌을 시도하나 이것도 모두 실패하니... 제갈량의 경우 연의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모사재인 성사
재천' 이라는 말처럼 운도 없었던 편이며, 반대로 위나라 등애의 경우는 조금만 삐끗해도 실패할 뻔
했던 촉 정벌에 성공했는데 큰 일을 할 때는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주위 여건들이 따라 주어야합니다.
촉은 건국하자마자 이릉대전에서의 대패하고 이후 유비가 죽는데 이릉대전으로 인한 영토, 인재,
병력 및 재정의 막대한 손실에 내부 반란등 엄청난 동시다발적 악재에 맞닥뜨리게 되자....
제갈량은 촉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려 시도하였으니 이회나 마충, 장익, 장억 등을 등용해 내부
반란을 일단락 짓고 불만 세력들을 회유하였으나 정벌에도 불구하고 남중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월수군은 제갈량이 내정한 태수인 공록이 남정 당시 사망하고 이후 태수가 임지에 부임조차
하지 못하여 군이 명칭만 남을 정도로 불안정하였으며.... 통치 영역의 이민족을 적극적으로
식민화하여 국력을 강화한 손권과 달리, 제갈량은 정복지에 관료와 군대를 두지 않고
회군하여 북벌에 매진하는 길을 택했으며 남중에 대한 촉의 영향력은 간접 통치에 머물렀습니다.
제갈량은 적극적 식민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비용을 우려한 것으로 보이니 직접통치에 이르지
못했으나.... 원정과 이회 임명을 통해 구축한 간접통치망은 징세와 물자 획득에 사용되었고
남만에서 얻은 자원들은 북벌에 투자되었으며, 유비 사후 군권은 영안에 주둔한 중도호
통내외군사인 이엄이 가지고 있었고 영안에는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구원병이 주둔하였습니다.
유비는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으니 제갈량은 남중정벌을 기획하며 조운을
중호군 정남장군으로 삼아 평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비가 주지 않았던 군권까지
전부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후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면서 조운을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로 옮기고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습니다.
강주는 유비 생전에 최측근인 장비와 조운이 맡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쪽으로 영안, 북쪽
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르는 제갈량도 중요시 여긴 후방이었으니 이엄을
믿고 배치한 것이며.... 제갈량은 맹달의 배신을 통해 상용이라는 전략적 거점을 선취하며
북벌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맹달의 우유부단함과 사마의의 과감한 기동으로 인해 좌절됩니다.
제갈량은 형주를 잃은 다음 상용을 최우선으로 얻어야 할 곳으로 봤으니 북벌과 북형주를 공략하기
위해선 이곳이 최선의 요충지였기 때문인데.... 결국 촉이 상용을 얻는다면 위는 장안(혹은
옹,양주)으로 오는 촉군과 상용을 통해 낙양으로 오는 촉군을 동시에 막아야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며, 또는 상용에 위군의 전력을 더 묶어 놔서 옹, 양주 평정이 더 편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유비가 이릉에서 패한 222년부터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는 227년까지는 위나라와 오나라는 전쟁을
하는데... 위나라는 유비가 죽은후 익주에는 인재가 없다고 여겼고 몇년동안 국경 지대가 잠잠했기
때문에 촉에 대한 방비를 하지않고 있었으며 또 위나라는 전선이 엄청 넓고, 전후복구가 안 된
곳이 많다 보니 지배력이 약한 농서 지역에 가용 병력이 여유가 있진 않았고 방비도 허술했습니다.
위나라에서는 제갈량이 출병하여 남정(南鄭)에 머물때 대병을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손자가
조조도 남정에서 위기를 겪었다며 남정으로 진군해 제갈량을 토벌한다면 길이 험해 정병의 조달
과 군량 운반, 남방 4개주에서 방비를 위해 15~ 6만의 군사가 필요할 것이며 천하를 소란스럽게
동요시키면서 막대한 비용을 쓰게 되고 지키는 싸움은 노력이 3배가 더 들 것이라 하여 그만둡니다.
위나라는 그 대신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대장을 나누어 보내 여러 험요지를 지키게 하면
그 위세로도 족히 변경을 진정시켜 장병들은 편히 쉬고 백성이 무사할 수 있다고
한 손자의 말대로.... 장안 방면 총사령관에 조진을 임명하였고 또한 양주자사로
사마의의 군사 서막을 임명했으니 서막은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할 때 부임했다고 합니다.
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황제 자리에 올라 어수선해지자 제갈량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227년
에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개시하는데... 제갈량이 5년간 육성한 촉군의 규모는
생각외로 상당했던듯 한데, 후주전 주석 제갈량집에 실린 유선의 하조인 '벌위조' 에서는 북벌군
의 규모를 20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진춘추에서도 제갈량이 촉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말합니다.
유선과 제갈량의 언급인데다 위략에도 관중-농서 지방에는 촉군에 대한 방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력상 촉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양주의 여러 국왕들이
군대를 파견해 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국왕들이란 씨족장들로서, 훗날까지 위나라를 괴롭힌 이민족
인 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하며 곽회는 이후 농서의 강족 유력자를 격퇴해야 했습니다.
228년 봄, 미리 촉군 전체가 기곡으로 진출한다는 헛소문을 낸 이후 조운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곡으로
진출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옹주군 주력을 이끌던 조진의 본대가
즉각 조예의 명을 받아 미현으로 출동해 조운과 맞서지만 이는 위군의 조진군을 돌리려는
속임수니,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 기산을 통해 옹주의 서쪽으로 진출합니다.
기다렸다는듯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호응해 순식간에 촉군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양주의 농서군도
동요하여 태수 유초가 한달 내에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관리와 주민들이 항복
한다고 해버린 상태였으니.... 이로인해 조운에게 붙잡혀 있는 기곡의 조진외에, 서쪽으로 남아
있는 위군의 세력은 상규에 주둔한 곽회, 그리고 양주(서량) 에 주둔한 서막만 남게 되었습니다.
(1)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주력을 유인
(2)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해 옹주 서부의 거점들을 점령
(3) 옹주 동부에 있는 위군 전력을 협격하여 격파
(4)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서-관중 지역 전체를 병탄
(5) 최종적으로는 촉군이 위나라 장안으로 진격
1차 북벌 : '중국역대전쟁사' 에 나오는 1차 북벌 지도를 보면 조운은 북쪽(포야도) 까지
진출해 진창과 미를 노리는 형세를 갖춘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한편 제갈량 본군은
기산과 천수 서현, 상규 인근에 머물면서 옹주 각지에 병력을 파견하여 농서 지역을
진압하고 가정에 마속을 파견해 그곳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운과 등지는 기곡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니 후일 조운이 '적안의 군수물자를 보관하다가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라' 고 말한 촉한 영토 내 적안이 기곡 북쪽에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는데... 기곡은 포야도 중 태백령 서쪽 언덕이니 포야도의 포중 정북쪽에 위치하니 적안을
기준으로 북쪽 촉과 위의 경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관중 방향으로 기곡 전투가 있었습니다.
제갈량의 본대는 천수에 주둔해 가정을 점거하기 위해 선봉을 보내는데 위군과의 대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니.... 이 길목만 잘 지키면 그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옹, 양주를 점거할 수 있는
것이며, 조운의 군대를 나눈건 조진의 본대가 제갈량이 한중을 점거하는, 후방을 치는걸 방비
하기 위함이니 조진의 본대가 험한 산길을 통과해 천수로 향하는 변수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출하여 위수 이북의 천수, 남안, 안정을 기습 후 정리할 때에 가장 염려했던 것은
조진등 관중의 지원병력이 불시에 들이닥쳐 제갈량 촉군의 뒤를 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관중에서 옹,양주로 들어오는 루트는 크게 두 곳이 있었으니 위수 북쪽 통로와 남쪽 통로가 그것 입니다.
진창성에서 위수를 따라 상규로 올라가는 코스가 최단거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의 떡이니....
저 사이는 천변 양안이 급경사여서 인마의 통행이 불가능했던 것이라 옹, 양주로 들어오려면
위수의 북쪽이나 남쪽으로 우회해야만 했는데, 북쪽 루트가 바로 가정 소로이고 남쪽
루트는 진창에서 기곡이나 야곡으로 내려와 기산쪽 무도군을 경유해 상규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조운과 등지는 남쪽 루트를 막아 진창과 미성에 조진을 묶어둠으로써 제갈량 본진의 뒤를 치지 못하도록
방비하고 한중을 보호하는 완충역할까지 떠맡았으니... 마속이 가정을 무사히 지켜내고 제갈량이 옹양주
를 평정하였다면 다음 순서는 진창과 미성이었으니, 두곳까지 빼앗길 경우 부풍군 바로 위쪽에 안정군
이 위치하는 만큼 장안이 바로 코앞이어서 관동이 진동함은 물론 위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관중(장안)에서 농서로 넘어오는 큰 길은 지금도 가정을 통하는 그 길뿐이고 제갈량
이 천수로 가는 길이 기산도 이고, 군대가 머무를수 있는 곳은 기산 다음이
천수니 군대가 머무를 곳을 만들어야 하는데.... 1차가 기산이고 천수(상규)를
함락시키면 2차가 되니 그 이후는 농서 쪽을 공략해서 수비태세를 만들면 됩니다.
제갈량의 의도대로 기곡에서 조진과 맞서는 조운과 등지의 부대, 가정에서 장합과 대치하는 마속군
이 위군 본대가 천수에서 촉군과 대치한 위군과 합류를 막는 동안... 서쪽 천수, 남안에 한달
후에 합류할 농서 3개군의 호족과 강, 저 등 이민족들이 모이고, 가정 북동쪽을 진수하고
있는 안정군이 버텨주는 사이.... 제갈량 본대가 수비전에 대비해 포진 및 상규 함락을 한
상태에서 위군을 맞이해 싸웠다면 농우 일대와 양주까지 촉의 영토로 굳어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하나는 옹, 양주 점거 뒤의 국경선을 확실히 굳히기 위해서인데, 점령도 중요하지만
점령후 방어 역시 너무나도 중요하니..... 지도를 보면 알수 있지만 가정을 제대로
점거하면 가정의 루트와 함께 북쪽의 안정 진창, 그리고 위수 험난한 지형이 방어선
을 만들어주게 되니 안정, 가정, 진창, 한중으로 이어지는 자연 국경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촉한-조위 전선은 다음 세가지 형태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1) 옹, 양주 겸병에는 성공하지만 진격하여 장안을 점령하지는 못할 것이며,
촉나라와 위나라의 국경은 이대로 고착화 될 것입니다.
(2)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제갈량이 천천히 군세를 확장시키기
시작하여 결국 장안을 점령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3) 위나라가 크게 흔들리며 장안을 지나 파죽지세로 진군하며 사예까지 얻게 됩니다.
오장원이나 진창에 제대로 눌러앉을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이어질수 있고 그러면 손권 역시 조예
의 후방을 찔러 위나라는 양면전선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조예 사후 조위가 혼란스러워
지는걸 생각하면 가능한 예측인데, 제갈량도 장기적인 변수 생성을 보고 진격한 것이니
일단 성공했으면 양주를 차지한 다음엔 오와 다시 동맹을 맺고 위를 견제했을 거라고 봅니다.
옹, 양주를 겸병했으면 기병 전력도 꾸릴수가 있을 것이니 제갈량이 몇년 둔전하면서 힘을 비축한후
장안으로 나아갔을 것이며.... 늘어난 생산력을 기반으로 다진다면 중원으로 나아갈 때는 굳이
한 길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한나라 부흥의 대의 명분도 힘을 받고 손권이 합비 쪽을 공격하면
장안에서 완 쪽으로 진군해 허창을 압박해도 되고 한왕조 부활한다는 명분으로 낙양으로 가도 됩니다.
위나라의 대응은, 조진은 야곡으로 나와서 조운이 미와 진창으로 치고 나오는걸 막았으며 그 사이
옹주가 촉한에 넘어가자.... 조예는 장합으로 하여금 5만의 보기 병력을 이끌고 가정을 지나
촉에 넘어간 3군, 특히 천수 일대에 주둔한 제갈량을 격파할 것을 명령하는데, 3군만을 탈환할 것
이었으면 가정 위에 있는 안정군 부터 공격해야 하나 장합은 가정을 통해 천수로 바로 진격합니다.
천수에 주둔한 제갈량을 몰아내지 않고는 3군을 되찾을수 없고 안정군은 제갈량에 호응한 세력이 장악
하고 있어 공격하면 시간을 주는 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인데... 실제로 안정군 탈환은 마속이
격파되고 제갈량이 퇴각한후 조운이 후퇴한 다음에나 미현에 있던 조진이 실행하게 되며, 또 위진
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창에서 서남쪽에 있는 산관으로 병력을 보내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합니다.
제갈량 또한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시간적, 지리적으로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
제갈량은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장합을 저지하게 하고, 예비대로 열류성에 고상을 파견하여
대비를 하는데, 하지만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이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
하게 운영하다가 장합에게 패하는데, 마속은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선봉인 왕평이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급수로를
끊은후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으며.... 열류성에서 가정을 후원하던 고상도 옹주 자사 곽회에게
진영이 격파당했고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의 조운도 조진에게 패배하여 퇴각하는데 미를 지키고
있던 조진이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후에 안정 지역으로 움직여 월지성을 항복시켰다고 합니다.
산에 올라간 이유로는 장합이라는 까다로운 상대를 속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이는
데 장합이 가정으로 오면 지키고 만에 하나 다른곳으로 이동하면 장합의 뒤를 후려치거나
끊어버려야 하는데, 단지 지키는 것 보다 적극적으로 전과를 얻기위해 산 위에 자리를 잡고
고지를 점령한 기세를 타고는 쳐서 장합의 부대를 격멸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차 북벌은 순조로운 상황이었고 기곡에 의군을 보내 적 총사령관을 묶어두는 기책을 쓰고 옹, 양주를
석권하는 완벽한 기습이었으니, 마속도 기책으로 장합의 군세를 격멸해 큰 공을 세우고자 욕심이
들었으며 5만 백전노장 장합의 군대를 붙잡아 두는건 계속해 상대방의 병력 이동을 체크해야 하며 품
이 많이 들고 지난한 군대통솔과 전술적 수고가 들어가지만 장합을 격멸하면 손쉽게 문제가 해결된다는?
제갈량은 기산 진출 → 천수를 지나 상규의 점령 → 가정에서 대치후 타군으로 지역 다지기나 또는 위
대군과의 결전이어야 하나 예상보다 빠른 장합의 도착으로 상규 점령을 미루고 장합과의 대치를
먼저 했는데.... 가정의 패배로 대군이 의지할(방어할) 장소가 없이 퇴각했다는 것은 상규를 점령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가정이 돌파 당하더라도 상규에서 위수 방어를 통한 대치가 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가정에서 해야할 마속의 역할은 뚜렷했는데, 바로 기곡에서 조운과 등지가 했던 역할이니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제갈량이 옹, 양을 안돈할 때까지 시간을 끌며 가정부터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후방까지 이중, 삼중으로 지연방어를 하든가... 대치 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장합이 혹시나 다른 길로 이동하려고 하면 먼저 가서 방어를 하든가 그 뒤를 후려치는 역할입니다.
촉군은 4 곳의 전장에서 모두 패했으나 사실상 마속의 패배와 동시에 제갈량의 1차 북벌은 끝난 것이니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서 적 군세보다 많았는데 패한건 나의 불찰' 이라는 말을 보면... 당시 촉군이
기산에서 충분한 세를 가지고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제갈량이 본대에 남긴 위연, 오의는 나중
북벌에서 곽회나 비요 군세를 격파하게 되는걸로 보아 서막이나 곽회를 격파할 여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서막은 남안 지역의 반란을 토벌했으나 곽회가 서쪽으로 이동해 강족 유력자 당제를 농서군에서 격파한
공으로 건위장군에 오른 것만 봐도 해당 지역의 강족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서막이 관할하는 양주의 농서군 지역도 삼군이 호응하자 불안에 떨었고 태수인 유초가 촉한군에게
한달간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농서군 관리와 주민들은 항복할 것이라고 통보까지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자신을 포함한 본대 병력의 퇴로가 완전히 끊기기 전에 신속하게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가정이 뚫리면 아직 점령도 다 하지 못한 천수에서 위군을 맞이해야
하는데.... 천수가 가정보다 수비하기도 어렵고 이미 선봉이 대패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장합
의 대군에 농서에 남은 위군까지 협공에 가세한다면 불리하기에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갈량이 서현의 남여 수천인을 약탈하고 강유를 사로잡아 촉인들이 축하했지만 정색하고
" 하늘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의 주둥이에서 고통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정의 피해가 컸어도 수습이 가능했던 것은 '군사들은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
라고 적혀있으며 기곡에서는 조운이 부대의 후미를 막았기 때문에 병력이나 물자의 손실은 적었습니다.
3군의 호응을 받았으나 데려온건 점령했던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가구 밖에 없었으니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우장군으로 강등됐으며 군법에 따라 마속을 참했으니...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泣斬馬謖)” 의 기원이 되는데 한진춘추에 의하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1차 북벌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북벌이었으나 실패로 촉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사라지고
이후 제갈량은 2차, 3차, 4차 그리고 5차 북벌마다 위나라 사마의등 강력한 전략적 방어
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패배 중에도 제갈량에게는 강유라는 큰 인재를 얻는 소득은 있었습니다.
위나라군인 강유는 아직 투항한 기대주에 지나지 않으니 서열이 낮은지라 제갈량 사후 후계자는 장완
이었고 다음은 비의였으며, 253년 곽순에게 암살된후 후임자가 없다가 256년에 적도 전투에서
왕경의 군사를 대파한 공으로 강유가 대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유업대로 다시 위나라 북벌에 나섭니다.
첫댓글 제갈량은 여러번의 북벌은 나서지만 결국 성공 못하고 전장에서 목숨을 마치는게 많이 아쉽습니다
장기전의 승패는 국력이 뒷받침 되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진 것도 같은 이유이지요!
아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