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초연… 연출 40년 맞는 임영웅씨
"한국인 말속도 빨라져 공연시간 10분 줄어"
"기분으로는 2~3년밖에 안 된 것 같다. 40년이면 내 평생의 절반보다 긴 세월이지 않나. '참 오래 했구나' 싶다가도 이 나이에 현장에 있다는 데 감사하고,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내가 다른 활동을 접더라도 끝까지 하고 싶은 작품이다."
임영웅(73)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올해 마흔 살이 됐다. 1969년 국내 초연된 이 연극과 '임영웅'은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포조와 럭키 등 등장인물들이 다 내 분신(分身) 같다"고 했다.
부랑자 에스트라공이 구두를 벗으려고 끙끙대는 장면으로 열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쓴 부조리극이다. 주인공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끝없는 기다림, 되감기(rewind)라도 한 듯 반복되는 대사들이 있을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달 말 일본 도가(利賀) 연극촌 초청으로 40주년 공연의 막을 연다. 9월 4~5일 의정부예술의전당, 9월 8일부터는 서울 산울림소극장에서 한국 관객을 만난다.
-
- 《고도를 기다리며》의 임영웅은“표 팔고 스폰서 구할 걱정을 하는 나는 불행한 연출가”라며“에너지를 연극에만 쏟아도 되는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조선일보DB
임영웅과 이 연극은 인연이 질기다. 1969년 12월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 초연했는데 모든 객석이 공연 1주일 전에 매진됐다. 베케트가 마침 노벨 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영웅은 "50년 넘게 연극을 했는데 그런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초연 때 악전고투했다. 강적을 만난 느낌이었다. 밤샘 연습도 여러 날 했다. 좋은 연극으로 남은 건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작품과 부대끼면서 끈적끈적한 공감이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40년이면 강산이 네 번 바뀐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변화를 겪었다. 한국인의 언어 속도가 빨라지면서 공연 시간이 10분 짧아졌고, 시작한 지 20분쯤 뒤에야 웃던 관객도 요즘엔 처음부터 반응하고 있다.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같은 대사를 일부 관객이 줄줄 읊는 것도 1990년대부터 달라진 객석 풍경이다. 임영웅은 "연극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관객일수록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웃는다"며 "부조리라는 게 기가 막혀 웃는 것"이라고 했다.
지겹지는 않다고 했다. "하면 할수록 베케트의 인간에 대한 탐구, 철저한 계산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유진 오닐이 쓴 《밤으로의 긴 여로》(9월 18일부터 명동예술극장)와 함께 밤낮으로 두 작품을 연습 중인 이 연출가는 "극과 극을 오가고 있는데, 베케트는 불친절하고 오닐은 과잉친절"이라고 말했다. 극적 상황을 가리키는 지문(地文), 인물에 대한 설명의 차이다.
올해도 에스트라공은 박상종, 블라디미르는 한명구다. 에스트라공은 여성적이며 아이 같고 블라디미르는 남성적이고 지적이다. 임영웅은 "초연 때 짙은 페이소스를 풍겼던 에스트라공 함현진, 성실했던 블라디미르 김성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등장인물 중 포조가 임영웅과 가장 비슷하다. 그가 포조의 연기를 실연할 때 배우들이 "아, 포조는 선생님이 하시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다. 연출가는 "포조는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의 연극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인 "격려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도 바로 포조의 대사다.
임영웅은 수학적인 연출가로 꼽힌다. 대사 한 줄에도 배우가 보여줘야 할 움직임·포즈·시선이 다 다르다. '호랑이' '임틀러' '마피아' 등의 별명이 붙은 그는 "까다로운 것 같지만 배우가 편해야 한다는 게 내 원칙이다. 이젠 맹수의 손톱도, 물어뜯을 이빨도 다 빠져 흐물흐물해졌다"며 웃었다.
연출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70대 중반의 현역 임영웅은 "해답은 텍스트, 희곡 자체"라고 말했다. "숨은 그림 찾기와 같다. 행간에 감춰진 보물들을 얼마나 많이 찾아내느냐가 연출가와 배우의 능력이다."
▶의정부예술의전당 공연은 (031) 828-5841~2. 산울림 소극장 공연은 (02)334-5915
-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40년간 1114회 공연… 20만명 관람
임영웅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세월만큼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올해 이 연극은 극단 산울림의 135회 정기공연이며 임영웅 연출로는 20번째 무대다. 40년 동안 1114회 공연을 올렸고 프랑스·아일랜드·일본·폴란드 등 해외 7곳에 초청됐다. 누적 관객은 약 20만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들 대부분이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섰다. 초연의 김성옥·함현진·김무생·김인태부터 1985년 전무송·주호성·조명남·김진동, 1990년 정동환·송영창·박용수·정재진, 1994년 한명구·안석환·김명국·정재진 등을 거쳐 현재는 한명구·박상종·전국환·박윤석이다. 유일한 무대 장치인 소나무는 철과 플라스틱을 혼합해 만들고 7개 조각으로 분리되는 조립식이다. 에스트라공이 신는 구두 한 켤레는 천근만근 같지만 실제 무게는 1㎏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