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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명(趙顯命)에 가려진 탕평의 기둥
‘송인명(宋寅明)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권모가 많아서 춘방에서부터 임금의 인정을 받았고, 조문명과 더불어 탕평론을 극력 주장하였다. 노론과 소론 중 언의(言議)가 평완한 자를 등용하여 조정(調停)의 계책을 삼으니, 임금이 깊이 신임하여 권력을 좌우하는 자리에 중용하였다. 그 후 20년 세월 동안 세도가 날로 타락하여 자중자애하는 선비들은 모두 뒷걸음치며 물러가 버렸다. 경신년(영조 16) 이후 국시(國是)가 조금 정해지자, 송인명이 시세를 내다보고 옛 투식을 변혁하고자 선비들을 끌어다 쓰려고 하였으나, 조현명이 고집을 세워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당시 趙)·宋 이론(異論)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가 끌어 쓰려고 한 것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였지, 참으로 선비들을 아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조실록》의 송인명 졸기는 그의 정치적 생애를 매우 잘 요약하였다. 사신(史臣)은 영조대 전반기 탕평 정책에서 송인명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조현명과 송인명을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송인명이 시세를 파악하는 능력은 더 나았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송인명은 조현명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송인명은 조현명보다 2살 위여서 관력(官歷)에서 앞서고 40세 이후 줄곧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 우의정·좌의정으로 승승장구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종형제들인 송정명·성명·진명 등이 소론 준론의 본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론 내 영향력이 매우 컸다. 조현명도 조카가 효장세자빈(孝章世子嬪)이고 선대는 김창집 등 노론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이러한 조·송이 형제처럼 합심하여 영조대 전반 노·소론의 완론 인사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완론’ 탕평을 이끌었다. 이로 인하여 영조대 전반기에는 무신란을 비롯하여 각종 변란이 빈발하였음에도 이전처럼 급격한 환국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노·소론의 본류를 자처하는 청론=준론 인사들로부터 노론도 소론도 아닌 탕평당을 이루어 국정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위 졸기는 노론 사신이 쓴 것이지만, 당시에는 소론도 남인도 ‘완론’ 탕평에 모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탕평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군신 간 신뢰에 기반한 굳건한 지원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이라고 막연히 이해되는 ‘탕평’은 당시에 매우 새롭고 어려운 정치 실험이었다. ‘탕평’은 당파에 상관없이 아무 인재나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다. 탕평이 가능하려면 당파라는 협소한 기준을 뛰어넘는 새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주자는 탕평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공정한 의리인 ‘황극皇極’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황극이 시기마다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는 정의할 수 없었기에, 숙종대 황극탕평론을 정립한 박세채도 기사년의 남인을 제외한 노론과 소론 중심의 인재 등용만 말할 뿐이었다.
박세채를 계승한 조·송 양인은 탕평의 기준으로 노·소론이 정면충돌했던 신임의리의 절충안을 설정하여, 이에 동의하는 ‘완론’ 인사들을 중용하며 탕평을 이루고자 하였다. 양인은 경종대부터 영조의 신뢰를 확보하였기에, 다수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조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 송인명은 어떻게 영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2. 경종대 신임옥사와 송인명의 처신
군신 간 신뢰는 조선 후기 최대의 옥사였던 경종대 신임옥사를 헤쳐나오면서 형성되었다. 경종 1년 노론 4대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성사시킨 후 대리청정까지 추진했다가 무산되자, 노론이 쫓겨나고 소론이 정권을 잡는 신축환국이 발생하였다. 소론 급진파 김일경은 노론 대신과 자제들이 경종을 제거하려 한다는 고변을 빌미로 옥사를 일으켜, 그 배후로 예단한 세제의 관여를 입증하기 위하여 고문과 진술·증거 조작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3년내내 무리한 옥사를 지속하여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였다. 지금까지 신임옥사에 대해서는 소론 당론서인 《당의통략》의 영향으로 노론 4대신이 추진한 건저·대리의 변칙성과 불법성만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는 영조 17년 이후 공식 거론할 수 없던 당론에 불과할 뿐 아니라, 송인명·조현명이 같은 당인 소론의 처신을 비판하며 영조의 신뢰를 얻었던 이유도 설명할 수 없는 해석이다.
경종에게는 정상적 국정을 볼 수 없는 정신 질환이 있었고 아들도 생산할 수 없었다. 이는 궁중에서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경종의 후사에 양자를 들일지 동생인 연잉군으로 정할지를 둘러싸고 왕대비와 왕비 간 심각한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송인명은 장인 유립兪岦에게 건저를 방해하는 소론 준론의 죄가 ‘북인·남인보다 더하다’며 근심을 토로하였다. 최고 결정권자인 왕대비는 숙종의 뜻을 내세워 연잉군으로 정하였다.
이를 뒤집기 위하여 왕비 세력과 연결된 소론 급진파의 영수 김일경이 무리한 옥사를 지속하며 세제의 역모 관련성을 입증하여 그 자격을 박탈하려 한 것이다. 송인명은 조태구·유봉휘·이광좌 등 소론 준론의 영수들을 설득하여, 국문에서 연잉군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이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노론 가문과 연결된 조현명 가문과 달리, 송인명 가문은 소론 준론 핵심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소론 준론도 김일경의 의도를 알기에 연잉군의 이름은 삭제하게 하였지만, 이 기회에 노론 핵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옥사를 지속하는 데는 동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자를 들이려는 왕비 세력은 환관·궁녀를 매개로 김일경 세력과 내통하며 세제를 폐한다는 거짓 교지까지 내리려 하였다. 당시 외롭게 세제를 보호하던 인원왕후는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기에 세제의 왕대비 진현進見은 시급했다. 그러나 환관·궁녀는 궁중의 여우를 막는다는 구실로 진현길마저 차단하고 있었다. 전각의 배치를 잘 알고 있던 송인명은 세제에게 궁궐 담장을 넘게 하여 진현을 성사시키고, 인원왕후에게 저간의 사정을 알려 환관·궁녀를 처단하게 하였다. 그 후 김일경 세력은 왕실과 연계가 차단되었지만, 경종대 내내 세제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송인명은 조문명·조현명과 더불어 청론淸論을 자처하며 세제 보호에 함께 힘썼지만 그 공로는 이들보다 단연 앞선다고 할 만하다.
3. 송인명의 완론 탕평과 탕평 규모 변경 추진
영조는 즉위 직후에 숙종처럼 집권 세력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전면 교체하는 환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토역론이 분출되어 확산되자, 이에 반발한 소론 급진파는 일부 남인을 끌어들여 1728년(영조 4)에 무신란을 일으켰다. 송인명·조현명은 소론 급진파에 반대하는 다수 소론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고 그 성과를 《감란록(勘亂錄)》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계기로 경종대 이래 지론으로 영조를 설득하여 탕평책을 본격 추진하게 하였다. 특히, 송인명은 세제에게 조태구·유봉휘·최석항·이광좌는 김일경과 달리 임인옥사에서 연잉군과 연루를 차단하고자 했으므로, 비록 건저와 대리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조태구·유봉휘·이광좌를 추종하던 다수의 소론 준론을 우호 세력으로 확보하려는 구상이다. 영조는 건저·대리를 저지하였던 조태구·유봉휘를 배제하고 싶었으나, 송인명의 주장을 수용하여 노·소론이 합의할 수 있는 탕평의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영조대 전반 탕평을 지탱하던 기유처분(己酉處分)에 의한 신임의리이다.
이 처분은 노론과 소론에 모두 역적과 충신이 있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기반하여 노·소론의 역적을 처단하고, 완론을 중심으로 탕평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노·소론 주요 인사들이 행한 충·역의 정도를 따지는 분등론(分等論)을 토대로 노·소론이 주장하는 상반된 신임의리를 절충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절충은 불가능했다. 근본적으로 이는 노론과 연잉군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의혹에서 출발한 임인옥사를 사실로 인정하는 소론 의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문인이 대부분인 노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출사에 소극적이었다. 소론의 주류인 준론계도 노론과 타협이 불만이어서 비판적으로 참여할 뿐이었다. 노·소론의 탕평파는 소론인 ’조·송이 건곤(乾坤)을 이루고 (노론) 김재로(金在魯)는 장식품’이라는 비아냥과 ‘소인’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영조가 이 처분에 따라 완론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자 정국 안정은 이룰 수 있었다. 이에 영조는 기유처분에서 벗어나는 조치들을 내리면서 점차 본심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영조는 자신이 경종 독살 시도의 배후라는 혐의를 부인하였기에 임인옥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임인옥에서 희생된 자신의 처조카나 궁속(宮屬)들을 사면하고, 자손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추단된 노론대신 김창집·이이명을 신원하였다. 이는 그동안 송인명이 임인옥 문제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질책이기도 하였다. 사실 송인명은 영조 《경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인옥안을 최종 정리한 책임자였다. 영조는 송인명에게 옥안 개정을 맡겨도 보았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옥사 자체가 고문과 증거 조작으로 모순된 증언이 가득한 무안(誣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는 탕평파를 앞세워 옥안을 소각하고 새로운 탕평의리를 담은 영조 17년의 《신유대훈》을 도출하였다. 핵심은 건저·대리는 모두 정당하므로 이를 추진한 노론 4대신은 신원하고, 노론 연소배들 역시 경종을 독살하려던 역적이 아니라 세제의 이름을 파는 패역으로 옥사를 초래한 ‘불량배[不逞之徒]’로 규정되었다. 노론의 신임의리에 가깝게 탕평 의리가 변경된 것이다. 기세를 얻은 노론 준론은 조정에 적극 진출하여 ‘무옥’으로 세제를 폐위시키는 데 동조한 조태구·유봉휘의 죄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소론 준론도 노론 연소배들이 범한 역모의 사실성을 입증하여 임인옥의 정당성은 확보하고자 하였다. 노·소론의 본류가 각기 ‘청론’을 내세우며 맞서게 된 것이다.
송인명은 탕평의리의 절충과 수정의 과정에서도 조현명과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었고, 이 무렵에는 이조전랑의 통청권을 무력화시키고 재상권을 강화함으로써 노·소론의 ‘청론’에도 공동 대응했다. 그러나 영조 20년을 전후로 형제 같던 관계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송인명은 그동안의 탕평이 노·소론 완론자들에 국한되었다며, 이를 준론자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조태구·유봉휘·이광좌에 대한 토역론을 차단하는 것이 필수였다. 반면, 조현명은 완론 위주 탕평 규모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고, 경종대 임인옥과 영조대 무신란의 발발에 이들의 책임이 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지론도 때때로 표출하였다. 탕평을 위하여 견해차는 공식적으로 억제되고 있었지만, ‘형제 같던 조·송 사이에 이론이 생겼다’는 말이 영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영조는 송인명이 그간의 탕평 규모를 변경하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송인명은 영조 22년에 사망하였고 ‘충헌(忠憲)’의 시호는 평생의 충성을 의미한다.
4. 송인명의 사후, 소론 탕평파의 분열과 쇠퇴
이 무렵부터 영조는 조태구를 포용하라는 그의 충언을 져버리기 시작하더니, 조태구·유봉휘·최석항 등 임인옥 책임자들에 대한 노론의 토역론을 유도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에 이르러 조태구·유봉휘·최석항·조태억·이광좌에 대한 토역은 실현되었다. 을해옥사의 발발과 정리는 조현명의 조카 조재호(趙載浩)가 이끄는 소론 완론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소론 준론은 자신들의 의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대거 제출하는 등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패배하였다. 이 문제는 훗날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을 유발하는 단초도 되었다. 사도세자의 주변에는 토역론에 반대하던 준소 인사들이 많았기에, 세자도 그 영향으로 영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을해옥사 후에는 세자를 지켜줄 신하들도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노론에 비하여 다양한 학파와 세력으로 구성되어 구심점도 약하고 계승 관계도 명확하지 않아 그 전모가 잘 그려지지 않기에 기존에는 막연하게 하나의 정파로 취급되었다. 조·송의 협력과 갈등을 통해 소론 내 다양한 분파의 부침을 확인할 수 있다. 소론 준론은 정조 즉위 후 몰락한 소론 완론 탕평파를 대체하여 다시 조정에 진출하여 사도세자 재평가 문제를 계기로 새 활로를 모색했다. 임오화변 전후의 행적을 통하여 충역의리의 새 판을 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마저 정조 사후 환국으로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 결과 소론 준론계 인사들의 문집은 불완전한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미정고(未定稿) 형태로 후손이 보관하던 송인명의 《장밀헌집(藏密軒集)》도 몇 해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애석하게도 후손의 영락으로 문집 간행 준비가 충실하지 않아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상소문의 비중이 크다. 그러나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송인명의 사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고, 이를 통해 송인명의 시 세계나 그와 고유했던 소론 준론계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송인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의 일독을 기대한다.
[출처] [역사인물열전] 송인명, 영조 탕평의 잊혀진 주역📝|작성자 한국고전번역원
☞ 증조부 : 宋時喆. 조부 : 宋光淵. 부 : 宋徵五. 자 : 宋翼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