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의 미래, 젊은 연극을 위한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지난 2003년부터 시작된 예술의전당 ‘젊은 연극 시리즈’. 2004년 제2탄으로 김태웅 작∙연출의 <즐거운 인생>이 2003년 박근형의 <대대손손>에 이어 자유소극장을 찾는다.
첫번째 무대였던 박근형 연출의 <대대손손>은 토월극장의 무대 메커니즘을 충분히 활용하여 기존 대학로 공연에서 제약 받았던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여 우리 창작극으로서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레퍼토리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젊은 시각으로 보다 풍성히 재조명할 수 있었다.
2004년 두번째 젊은 연극 시리즈 작품으로 오르는 김태웅 작,연출의 <즐거운 인생>은 <대대손손>과는 달리 예술의전당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신작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작품 속에서 꾸준히 우리시대의 현실과 아픔을 연극적으로 표출해낸 김태웅은 한국 연극의 차세대 주류로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고, 그의 작품은 새로우면서도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새로운 실험의 무대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즐거운 인생>에서는 현대사회 통념과 인습에 갇혀 있는 자폐적 주인공의 비틀린 일과 사랑이 점차적으로 회복되어가는 과정이 유쾌하지만 진지하게 그려진다.
현재 우리의 삶을 섬세하고 맛깔스럽게 표현하며 자유로운 작가적 역량과 정신을 맘껏 표출하는 젊은 연극인들을 위한 잔치, 예술의전당 ‘젊은 연극 시리즈’가 올해로 두 돌을 맞으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10년 이 넘는 예술의전당 기획 연극 시리즈는 40여 편의 주옥 같은 무대를 선사하며 연극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2003년부터 ‘정통 연극 시리즈’와 ‘젊은 연극 시리즈’로 세분화해 21세기를 관통하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철학을 전하는 한편 우리 연극계를 주도할 새 숨결도 놓치지 않고 있는 예술의전당 연극 무대는 한국 연극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기에, 이제 강남은 더 이상 대학로가 부럽지 않다.
l 예술의전당 연극시리즈의 두 얼굴
진지한 연극세계를 조명하며 매년 의미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예술의전당 ‘정통연극 시리즈’. 2003년 화제작 유리 부드소프 연출의 <보이체크>에 이어 2004년 지차트콥스키 연출의 <갈매기>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연극사에 빛나는 위대한 고전을 충실히 무대화하여 진정한 연극성을 추구하고자 시작된 ‘정통연극 시리즈’와 함께 ‘한국’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단면을 쫓아 우리 모두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계속되고 있는 ‘예술의전당 젊은 연극 시리즈’가 예술의전당 연극시리즈의 또 다른 얼굴이다.
놀이정신과 유머가 관통하는 그만의 코드, PLAY MAKER 김태웅
l 3년 만에 만나는 그의 ‘즐거운’ 신작 <즐거운 인생>
2001년 최고의 화제작 <이爾>를 통해 동아연극상, 서울공연예술제 희곡상, 올해의 베스트 5 등 주요한 연극상을 석권하며 단숨에 우리 연극계가 주목하는 젊은 극작가 겸 연출가로 급부상한 김태웅. 3년 만에 만나는 그의 신작 <즐거운 인생>은 2002년 김태웅 희곡집에 수록되었지만 무대화는 이번 공연이 처음이다.
1997년 연우무대 <파리들의 곡예>로 데뷔, 1999년 <달빛 유희>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되었다. 두 번째 작품인 <이爾>로 연극 마니아들에게 이름을 확고히 아로새긴 그는, 이어서 <풍선교향곡>, <불티나>, <꽃을 든 남자> 등을 발표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세대(올해로 마흔인 그는 작년까지 386이었다)의 사회비판과 역사의식을 무대에서 표출해내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1기 졸업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는 탄탄한 인문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진중한 철학이 말장난, 성대모사, 흉내내기, 음담패설 등 다양한 언어유희와 어우러져 ‘웃는데 울게 만드는’ 웃음의 코드가 짙게 베어 있다. <즐거운 인생> 역시 이러한 독특한 작가 정신이 배꼽 잡는 익살로 ‘범진’과 ‘세기’라는 극중 인물들을 통해 표현된다.
l “연출가? 극작가죠. 아니, 차라리 PLAY MAKER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편의 화제작을 연출했음에도 연출가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그는 막상 희곡을 써놓고 의도대로 무대에서 펼쳐보이고 싶기에 연출을 맡고 있을 뿐이라고 털어 놓고 있다. 그는 연우무대를 나와 현재는 극단 ‘우인’을 이끌고 있다. 김태웅은 작품에서 ‘웃음’이라는 페이소스로 진중한 사회의식과 비판정신을 함께 버무리고 있다. 그는 연극쟁이라면 놀이 정신으로 삶을 인정하고 사회적 굴레에 저항하는 광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극은 자연스럽게 한바탕 ‘놀이’가 된다.
그리고 극작가 김태웅은 자신을 ‘놀이를 잘 짜는 사람’이고 싶어한다. ‘PLAY MAKER’라고 생각해 달라는 주문이다. 연극<이爾>에서 배우들의 신체성을 통해 펼쳐보인 아크로바틱한 광대놀이나 <불티나>에서 숨돌릴 틈 없이 쏟아지는 재담 넘치는 ‘치고 받기식’ 대화들은 바로 이러한 연극적 이해가 반영된 결과들이다. <즐거운 인생>에서 ‘놀이’는 객석과 함께하는 ‘음악놀이’로 변용 된다. 음악, 혹은 소리를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관객이 어울려 만들어 가는 ‘음악놀이’, 주제를 정해 함께 노래를 지어 부르거나 극중 인물의 테마를 아카펠라로 즉흥해서 만들어 보는 과정들에 마음을 열고 함께 하다 보면 모두가 ‘부처’라는 다소 엉뚱한 김태웅식 깨달음에 도달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일도 즐겁기만 하다.
소외된 현대인,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행복을 꿈군다! <즐거운 인생>
l 모두가 할 일 하며 살면 그들이 바로 ‘부처’!
‘범진’은 고등학교 음악 교사다. 노총각인 그는 혼자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 그래서 거울을 놓고 숟가락을 들어보지만 울컥하는 심정만은 버릴 수 없다. 외로워서 장난전화를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고 몸부림도 쳐보지만 결국 변두리에서 보잘 것 없이 방황하는 자화상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제자 ‘세기’는 앵벌이로 일찌감치 사회를 깨달은 고등학생이다.
범진과 세기. 이 둘의 공통점은 희망하고 꿈꾸는 것에 대해 타인과 교류하고 교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하는 사랑, 좌절, 무기력함, 분노, 슬픔의 과정과 해프닝을 통해 다시금 ‘큰 사랑’과 희망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즐거운 인생>에서 다소 거칠게 매우 재밌게 표현된다.
일상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소소하게 찾아가는 우리 모습에서 개인의 사랑이 사회의 사랑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 바로 ‘부처’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주인공들. 돌연히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문득 발견하게 되는 존재의 즐거움. 이 충돌과 모순이 우리 모습의 실제라고 역설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바로 즐거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바로 ‘부처’가 아닐까. “지 타고 난 대로 하여간 지 좋아하는 대로” 사는 삶에 대한 범진의 지적은 연출가 김태웅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 던지는 화두이자 이번 공연의 주제이기도 하다.
l 음악놀이 한 판. ‘소리를 만들며 함께할 때, 좌석번호는 출석번호가 된다’
죽음의 공포가 유독 컸던 김태웅은 음악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냈다. 생명이 다해 소멸하는 것은 무(無)가 아닌 순환으로 음악이 되는 과정이라는 철학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바다도 운동을 하니 음악이 되었고, 바람도 운동을 하니 음악이 되었다면 우리 모두가 우주와 연결되는 것도 또한 음악이라는 사실에 이르러 김태웅은 삶의 위안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얘기한다.
우리 세대의 누추한 일상에서 희망을 건져내는 작은 몸부림과 깨우침이 ‘부처’라면, 이제 그 즐거운 해탈에서 음악은 즐거움을 배가하고 그 과정을 축제로 만든다. 경찰서 앞에서 열리는 범진과 세기의 위문공연으로 끝을 맺는 <즐거운 인생>은 역시 공연 말미에서 음악놀이 한 판을 선보인다. 가령 ‘권태’를 음악으로 만든다면 어떤 화음이나 소리가 될까? 즐거움을 즉흥적으로 아카펠라로 연출해 본다면 어떤 음악이 될까?
도대체 어떤 형태의 음악놀이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확답을 미루며 자신만만한 김태웅의 얼굴에서, 출석번호를 부르듯 좌석번호를 지정해 가며(관객의 호응이 적어 어색해지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착상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놀이를 구상하고 있다는 그의 답변이 자못 흥미롭다. 음악놀이에 대한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공연의 막이 내리기 전에 관객들이 기립해 박수를 치며 무릎으로 장단을 맞추는 광경을 상상하면, <즐거운 인생>이 배꼽 잡게 씁쓸한 감상을 전하면서도 결미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작은 정화의 순간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관객들을 주도할 음악선생님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지금 연습실에서는 그에 따른 준비로 여념이 없다.
개성파 연기자들의 ‘찐한’ 감동이 몰려온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괴팍한 폭력 형사로 등장하였고, TV CF에서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김내하가 집요하지만 다소는 편집증적이고 유약한 캐릭터를 표현해 낼 계획이다. 요즘 김내하는 음악선생님 역할을 온전히 체화하기 위해 피아노 연습에도 열심이다.
영화 한편이면 한 해는 먹고 살 수 있으니 더욱 더 연극에 집중하게 된다는 그는, ‘쪽팔리게’ 제자와 파출소에서 직면하고 학교에서 파직당하는 불운의 선생님을 연기하면서 이상하게 동화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있잖아요. 혼자 밥 먹기 싫고, 나만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하는…… 40대가 되니 더욱 그러한 점들을 제 안에서 발견하게 되면서 범진에 대한 이해도 더욱 커져 가고 있어요.”
미술을 전공하던 재학시절 우연히 노천극장에서 연습하던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감명 받고 연극을 시작, 선배인 안석환을 따라 연우무대에서 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즐거운 인생>을 풀어가는 메인 캐릭터인 ‘범진’은 김내하에게서 풍겨 나오는 짙은 고독감과 찰나에 충실한 여유가 뒤범벅이 되어 그의 다른 이름으로 재현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또한 매 작품마다 선 굵은 연기로 강한 끼와 에너지를 선보여온 이승훈, 박미현, 정석용, 김성태, 박정환 등 우리 연극 무대의 개성파 젊은 연기자들이 뜨거운 땀과 열정으로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5월에는 <즐거운 인생>을 만끽한다
<즐거운 인생>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뒤얽혀 있다. 파괴된 교육현실도 엿볼 수 있고, 해체된 가족의 형상도 반추하고 있다. 한계를 절감하는 예술적 탄식도 담겨있고, 추악한 사회의 어두운 이면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제간의 작은 사랑을 되찾고 사회로 대상을 확대해 가는 교훈까지의 여정임이 밝혀지는 <즐거운 인생>은 이 시대 어른들을 위한 동화와 다름없다.
진지한 시대정신을 요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창의적인 무대와 연출로 현재의 모습에 일침을 가할 <즐거운 인생>은 그래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김태웅은 최근 사회 이슈와 정황들에 대한 지적도 연습 중에 삽입해가며 함께 추구하겠다는 계획이다. 조선시대 우인이 임금에게 충언하듯 PLAY MAKER 김태웅은 관객에게 조언한다. 우리 본연의 모습, 즉 인습과 통념에서 호도된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부처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예술의전당이 2004년 봄에 선택한 김태웅의 <즐거운 인생>은 그래서 더욱 탁월하다.
○ 프로필
작·연출 / 김태웅
동아연극상 작품상, 서울공연예술제 희곡상, 연극협회선정 희곡상
연극 : <이爾>, <풍선교향곡>, <불티나>, <꽃을 든 남자> 外 다수 작품 작·연출
범진 役 / 김내하
제37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연극 : <날 보러와요>, <이爾>, , <오월의 신부>, <키스>, <난 새에게 커피를 주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外 다수
영화 : 플란다스의 개, 정글쥬스, 살인의 추억, 맹부삼천지교
이승훈
연극 : <프쉬케>, <그대의 거울>, <한여름밤의 꿈>, <마로윗츠햄릿>, <에쿠우스>, <우투리>, <이爾>, <미롱> 外 다수
영화 : 빙우, 안녕 UFO
박미현
연극 :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키스>, <오월의 신부>, <세상은 요지경>, <불티나>, <환>, <이爾> 外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