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인연 / 小枾 이관희
일 년 전 남편을 잃고 힘들어할 때부터
팔순의 친정엄마 께서 아이들과 나를 챙기는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신적 충격이 컸던 만큼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구청에서 주관하는
독거노인 봉사활동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손발을 맞추고
노인들의 긴 하루를 같이하며
세상에 얹혀 살아가는 나를 배우고 있다.
타들어가는 여름, 날씨가 꾸물대고
친정엄마가 부르는 전화벨이 다급하다
포도가 먹고 싶으니 오는 길에 사가지고 오라는 말꼬리가 도망가는 부탁이다
비가 조금씩 굵어진다
자주 가는 과일 가게를 지나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친언니 같은 과일가게 주인은
반갑게 너스레를 떤다
왜 비를 맞고 다니시나요, 안사돈 마님
우리끼리 주고받는 농담이다.
대성아 수건 좀 가지고 와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난
키 크고 잘생긴 짧은 머리 청년
과일가게 언니의 아들이다
청년은 내 등을 꼼꼼히 닦고 나서
수건을 건네준다.
학교 다닐 때 배구 선수였고
지금은 군 복무 중인데
다음 달에 제대한단다.
포도와, 몇 가지 과일을 골라 담아 나오는데 청년이 달려 나와
우산을 박력 있게 펼쳐 손에 쥐여주며
우산은 가져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똑똑 부러지는 말투가 인상적이다.
그 뒤로 몇 번 들렀던 과일 가게,
청년은 보이지 않았고, 세상이
떠들썩했던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풍요로운 가을,
따뜻한 온정이 오고 가던 겨울도 지나간다
나약하던 내 잔뼈들이 조금씩 굵어지고
새 생명들이 돋음 하는 봄,
또 일 년이 지나가고 시간은 멀어지는데
남편의 모습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쌍둥이 작은 딸은 목포에 있는 큰아빠 회사에서 일을 한다
멀기도 하지만 바빠서 못 본 지 오래다.
큰 딸은 아침 일찍부터 치장이 바쁘다, 엄마 오늘 좋은 일이 있을지 몰라요
황급히 나가면서 던진 말, 묘한 여운을 남긴다.
주섬주섬 빨래 거리를 챙기는 나
TV 삼매경에 빠진 우리 엄마,
지금이 가까움 이란 저녁시간이다
불빛에 드러난 엄마 얼굴 골주름이 깊다
눈물이 핑 도는 순간
큰딸의 전화벨 소리가 눈물을 훔쳐간다.
엄마, 저녁 일곱 시쯤에 3번출구 앞에
양푼이 칼국수 집으로 오세요
할머니랑 저녁 먹자,
나 오늘 부서 팀장으로 승진했어요
내가 한턱 쏠게 당찬 목소리를 들으며 친정엄마 손을 잡는다
영문도 모르시는 엄마를 모시고
약속 장소에 미리 가 있었다
칼국수를 좋아하시는 우리 엄마
지루한 기다림이 역 역하다
올 시간이 된 것 같아 밖을 내다보니
딸내미가 분명한데
다정해 보이는 남자를 보내고 달려온다
엄마 많이 기다렸지, 빨리 주문하자
호출 버튼을 누르려는 딸의 손을 잡고
방금 헤어진 청년이 누구냐 물어보자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친구란다.
예야 멀리 못 갔을 테니
얼른 전화해서 오라고 해라
같이 저녁 먹자
친정엄마의 말씀이다
그렇게 우리 만남이 이루어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중에
훤칠한 청년이 들어온다
작년에 보았던 과일 가게 청년처럼
키가 크고 잘생겼다.
청년은 친정엄마께 정중히 인사드리고 나에게 멈칫멈칫 다가오더니
저, 도희 어머니
저는 어머니 뵌 적이 있습니다
작년 여름 제가 휴가 나왔을 때
비 오던 날 우리 과일 가게에 오셨어요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과일가게 청년이 맞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때 모습과는 달리 머리도 길고
깔끔한 차림새에 내가 몰라 볼 수밖에,
세상에 이런 인연이 있을까
친정엄마도 깜짝 놀라시는 표정이지만
애써 말을 돌리신다
식기 전에 어 이들 먹자
그 예기는 나중에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거침없는 행동이 왜 그리 예쁘던지.
그날의 청년 모습이
머릿속에 자리매김할 때쯤
볼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왔다는
시숙님 전화를 받는다.
자연스럽게 딸들 예기가 나오고
큰딸 남자친구
그리고 결혼 이야기까지...
기둥이 없는 우리 가정을 세세히
살펴 주시는 고마운 마음에
시숙님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맑은 물 사랑으로 키워온
두 꽃봉오리 쌍둥이 자매
마음 밭에 활짝 피어 나비를 부른다.
바스락, 부스러질 것 같은
가을 창가에
남편과 마주 앉아
향기 짙은 차 한 잔 나누고 싶다.
첫댓글 모친 예기와 남편 예기가 나온걸 보니
부인께서 쓰신 글인가 봅니다 여하튼
소중한 집안 예기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예전부터 여자 입장에서
글을 썼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ᆢ
역시나 멀티작가의 소질이 있으십니다.
가슴이 쩡내려 앉는것 같내.
쿵하고 내려않아져 할가슴이 쩡하믄 뭘까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척 춥네요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오려주심 감사이 읽고 있읍니다.
역시 임원이 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