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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5. 설교
“너머서교회의 두번째 교회이야기..”
설교제목 : ‘관심없음 ’
본문 : 고전 15:46~49 / 창 1:26~27 / 골3:9~10 / 롬8:29
1. 얼마전 한국 갤럽의 조사연구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주제는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관한 5차 보고서 였습니다.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3차례에 걸쳐 공개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데이터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런 데이터들은 현재가 어떠한가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미래를 예측하는데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1.1. 중요한 점이 몇가지 발견되었습니다. 첫째는 종교를 믿지 않는 청년층이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교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계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예측 가능하게 합니다.
1.2. 또 하나의 이슈는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중에서 가장 큰 비중은 ‘관심이 없어서’입니다. 그 다음이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실망. 그리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1.3. 이것은 오늘날 구도자라고 하는 부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인생의 깊은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모든 삶이 ‘돈’이라는 목적 아래에 굴복해 보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도, 연애의 목적도, 결혼의 목적도, 자녀를 출산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돈’에 대한 부담과 그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4. 조사에 의하면 이제 사람들의 절반은 종교가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특히나 20~30대의 젊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더이상 필요한 무엇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1.5.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교회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 질서 속에서 사상과 삶을 만들어주는 형성자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또한 기독교는 지배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있다. .이 말은 종교적인 사상들과 그 이상의 것들이 공적인 토론에 더 이상 정보나 지식들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기독교는 서구의 삶을 움직이는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멈추게 되었다" 그렇게 종교는 그리고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과 인식속에서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논의의 대상에도 추가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2. 오늘의 사회와 교회의 문제를 알아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2.1. 한국의 교회는 두가지에 큰 영향을 받고서 성장했습니다. 하나는 주관주의, 감각주의, 물량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복음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의 경제입니다. 이 두개의 궤적을 같이 하여 한국의 교회는 폭팔적으로 성장하고 정체되고, 위기를 맞이합니다. ‘새마을 운동’ ‘잘살아 보세’의 구호는 교회안에서 성장과 팽창을 촉진하고 그것이 곧 위대한 사명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는 본질적 의미의 깊은 고민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미국에서 넘어온 복음주의는 이런 물량적 팽창에 대한 빈약한 신학적 근거로서 제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 후 1990년대 후반부를 지나면서 교회에 곧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000만이 넘는 교회의 부흥의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양극화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기독교 국가로서 자리매김을 할 것이라는 긍정적 반응과 함께 이제 교회는 포화 상태이며, 그 상태가 지극히 건강하지 못하기에 곧 교회는 해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2.2. 그 후 한국의 경제적 위기는 곧 교회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회복과 자성의 노력을 통해 쇠퇴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성장 한계에 늪에 빠진 한국 교회는 새로운 부흥과 성장의 동력을 얻고자 영성의 수준을 높이는 프로그램이나 목회자의 자질을 끌어올리려 목회자의 청빙에서 ‘유학파’ 목사의 청빙이 주류를 이루었고, 복음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성의 목소리도 컸습니다. 또한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캠프 사역이 활발하게 전개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전략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발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해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더이상 교회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거나 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2.3. 우리가 이렇게 오늘 한국교회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려고 하는 것은 비관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시대이든 절망적이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해체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위기’일 수 있지만 반대로 ‘기회’이기도 합니다.
2.4. 이제는 이름뿐인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단지 성공과 성장만을 추구하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복음에 대한 열정도 지속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건강하지 못했던 것들이 제거될 것입니다. 더더욱 건강한 교회와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선명해 질 것입니다. 해체의 위기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겨낸 건강한 작은 교회가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2.5. 우리가 신뢰하는 바는 참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속에 빛과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시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언제라도 하늘의 천사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도 있습니다. 그 전능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여전히 세워가실 것입니다.
2.6. 우리는 불편한 교회의 현실을 마주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위기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함입니다.
3. 관심없음.
3.1.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진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비판적이다’. ‘위선적이다’, ‘구식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남들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 ‘다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사람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을 바라보아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뒤에 하나의 수식어가 더 붙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래서 뭐!’ 라는 것입니다.
3.2.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sns 에 이렇게 올렸습니다. “ ‘그런거지 뭐’, ‘그래서 뭐’ 이 두가지는 인생의 (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의) 양대 키워드이다. 경험으로 말하는데 이 두가지만 머리에 잘 새기고 있으면 인생의 시련 대부분을 큰 탈없이 이겨낼 수 있다.” 이 사람은 ‘그래서 뭐’ 라는 수식어를 시련과 어려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부분을 이야기 했지만. 오늘의 젊은 이들이 사용하는 이 수식어는 사뭇 다릅니다.
3.3.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이고 의미없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를 너무 잘 대변해 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3.4. 지금의 우리도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 목적은 무엇일까요? 진학? 취업? 경제? 평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관심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관심 없습니다.
3.5. 많은 사람들이 단지 종교인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그 사실을 자신이 그래도 도덕과 윤리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6.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경매에 넘어가 이단에게 넘어가는 것. 교회 숫자가 줄어드는 것, 관심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화려한 음악으로 치장하고 공간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정말 불신자들을 위한 것일까요? 사실 불신자들은 교회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이 모든 것에는 그래도 그 교회에 한번이라도 발을 디디게 되어 교회를 이동할 사람들, 즉 수평으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정착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파이프 오르간이 좋다고 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프로그램이 있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연예인이 이 교회에 온다고 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모르죠 아이돌이라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3.7. 교회에 관심이 없는 그들을 위해 교회의 외형을 바꾸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없는 수고 입니다. 많은 교회가 불신자를 전도하고 복음으로 이끌기 위해 프로그램을 준비하지만 사실 그런 논의는 충분한 논의가 되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4.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4.1. 간단한 결론 하나를 먼저 끄집어 내어 봅시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에 교회는 성령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중생의 빛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 회심의 결과를 따라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4.2. 하나님께서 복음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단지 교회 공동체 안에만 두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도 그 소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객체적이어서 우리 개개인에게도 주어지는 과제인 것입니다.
4.3. 우리는 교회 안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관심없어하는 그들에게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며, 관심없는 그들의 내면을 부추겨 그들이 삶과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인도해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4.4. 시대의 흐름 가운데에서 왜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졌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삶과 죽음, 인생의 깊은 의미들을 깨닫도록 비추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이든 아니면 개인이든 모두 우리 안에서 우리끼리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있는 몇 사람이 모여 희희낙락 하고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재정과 프로그램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낼 수 없음에도 우리는 그런 것들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주된 동력이 될 거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 중요한 내가 교회이고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 모든 주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5.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5.1. 기독교에 대해 관심없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회복하고 변혁해야 하는가? 깊은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중의 하나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5.2. 창세기는 우리에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골로새서 3:9~10에서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바울을 당부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진다고 이야기 합니다. 로마서 8:29은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으니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5.3. 칼빈은 그의 시편 19편 주석에서 “우주의 기능은 매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그림처럼 비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붙여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5.4. 칼빈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는 거울에 대하여 단지 인간안에서만으로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만물로 확장합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구체화 하는데. 칼빈은 이 세상을 거울로 보고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거울로서 하나님의 본체를 너무나 명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1:19~20에 근거하여 인간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5.5. 칼빈은 이렇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의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한다”
5.6.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어지고, 그분의 성품이 나타내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에게 반사해 주어 그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5.7. 하나님의 거룩, 사랑, 은혜, 공평, 정의로움이 우리에게 투영되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누군가에게로 반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해 주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며, 이 땅의 허무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바라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5.8. 문제는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소명을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에게 비추어져도 우리는 그 빛을 다시 반사할 수 없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불투명한 탐욕과 거짓된 것들이 가득한 우리들은 그 빛을 누군가에게 반사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5.9. 아이들을 부모들의 삶과 성품에 투영된 하나님의 성품과 일상의 신비를 보아야 하지만 오늘의 부모들은 그러한 소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주어진 척박한 현실에 굴복하여 더러운 이끼들이 가득 끼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비추어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지만 오늘의 그리스인의 삶과 성품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 줄 수 없습니다. 삶과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는 그 사람들은 단지 관심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누구도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5.10. 교회는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잠식되어 진리를 잃었고, 보통의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경건의 빛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비아냥거리고, 천박한 기쁨을 쫓아다니며, 탐욕스럽고,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 줄 수 있겠습니까.
5.1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절대자와 신의 존재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질적으로 신을 찾아가도록 인간은 창조 되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신에게로 가는 길을 비추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오늘의 세대 가운데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된 사람이요, 교회임을 깨달아 그 소명을 감당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5.12.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일상을 살아가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어 비추어 질 때 비로소 관심을 잃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 모이게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6.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인, 그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든 일상속에서 비추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관심없고, 냉소적인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