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이 오면 우리는 태극기를 건다. 그게 전부다. 왜 거는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날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고, 학교에서 한 번쯤 배웠고, 그걸로 끝이다. 개천절은 그냥 쉬는 날이 됐다. 그런데 이 날이 대한민국의 국경일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거기엔 해방된 땅에서 나라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의 뜨거운 기획이 있었고, 좌우로 찢긴 민족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으려 했던 필사적인 시도가 있었다.
일제가 개천절을 금지한 건 우연이 아니다. 단군 탄생을 '황당하고 기괴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폄하하고,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했으며, 개천절 행사 자체를 금지했다.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동력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만주사변 이후로는 개천절 관련 언론 보도조차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그러나 해방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외세에 분할 점령된 현실, 좌우 이념의 극한 대립,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 그 혼돈 속에서 누군가는 단군을 다시 불러내기로 했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절대적 공통점' 앞에서는 좌도 우도 없다는 논리였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 처음 개천절 행사를 연 건 대종교인 민세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이었다. 1945년 9월 24일, 안재홍은 사회민주당·자유당·민중공화당 등 여러 정치조직을 통합해 국민당을 창당했다. (1) 임시정부 절대지지, (2) 38선 철폐, (3) 민족국가 건설을 내세운 이 조직은 10월 3일 개천절 행사를 열고 "정식 연호가 제정되기 전까지 단기를 사용하도록 선전할 것, 개천절 유래를 신문에 발표하여 민중을 계몽할 것"을 결의했다. 대종교인이었던 안재홍에게 이 결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더 큰 행사는 따로 있었다. 1931년 이후 약 14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공식 개천절 봉축식이 그해 11월 7일, 음력 10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단군전봉건회·대종교회·조선국술협회가 주최하고, 1만여 명이 모였다. 당시 사회를 맡은 건 조영하였고, 한글학자이자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이극로가 조선국술협회 회장 자격으로 개회사를 했다. 이왕직 아악부의 연주 속에서 태극기가 가을 하늘에 나부꼈다. 참석자들은 백두산을 향해 경례를 바쳤다. 언론은 그 광경을 "감격 높은 민족의 제전"이라고 전했다. 일제의 탄압이 사라진 땅에서, 오랫동안 금지됐던 이름들이 다시 불렸다. 이극로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징이다. 대종교는 독립운동과 한글운동, 민족문화 운동을 하나로 묶은 세력이었다. 단군을 되살리는 일과 우리말을 지키는 일은 그들에게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싸움이었다.
1946년 개천절은 성격이 달랐다. 전년도에는 대종교 계열 인사들이 사실상 주도했다면, 이번엔 불교중앙총무원·천도교총본부·기독교감리회·기독교장로회·천주교회 등 여러 종교단체와 사회단체가 연합한 '교화사업중앙협회'가 중심에 섰다.
행사 회장은 임시정부 요인 성재 이시영, 부회장은 청사 조성환이었다. 회장-부회장이 대종교 중진이었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개천절이 대종교라는 특정 종교의 행사가 아니라, 이제 전 민족의 의례로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특히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행사에 인근 기독교 교회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당시 기준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사 조만식 장로와 함태영 목사도 단군전봉건회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날 이승만이 발언을 했다.
"단군은 결코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한 인간을 신으로 우상시하는 것은 미개의 민족이나 패망한 일인들이 믿어온 신조이었지, 우수한 문화인인 우리 민족에게는 있을 수 없다."
이 발언은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단군을 신으로 신봉하는 대종교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편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동시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인 것도 명심하고 건국에 매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이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로서 단군을 자리매김하는 논리. 결과적으로 이 발언은 단군과 개천절에 대한 해석을 종교적 영역에서 세속적·국가적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1948년 개천절이 국경절로 정해지는 데 필요한 이념적 토대가 여기서 형성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도 이날 담화를 발표했다. "남북의 통일과 완전독립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고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증진케 하자." 군정청의 공식 입장으로 개천절의 의미를 공인한 것이다. 이미 여러 언론이 이날을 '국경일'로 지칭하고 있었다.
정세는 더 긴박해졌다. 미소 대립이 굳어지고 분단의 기운이 짙어가는 가운데, 1947년 개천절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미군정청 문교부가 전국의 학교와 관공서, 사회단체에 개천절 봉축식 참여를 사실상 의무화하는 지침을 내렸다. 봉축식 순서까지 정해서 각 기관에 배포했다. 개회선언부터 애국가 봉창, 천산요배, 개천가, 만세삼창까지 이어지는 식순이었다. 이것은 개천절이 더 이상 민간의 자발적 행사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 의례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이 해에는 「개천가」도 탄생했다. 한국 근현대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채동선이 작사한 노래였다.
"삼천만아 노래 불러 찬양하세 / 한검님의 큰 영광 큰 은혜를 / 이보다 더 기쁜 날 또 있는가."
대종교의 신가가 교단 안에서만 불리던 것과 달리, 이 개천가는 일반 대중과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개천절이 문화적으로도 대중화되는 순간이었다.
11월 15일, 4280주년 개천절 봉축 행사가 서울에서 열렸다. 김구·조소앙 등 요인이 참석했다. 딘 군정장관은 "4,000여 년이란 오래고도 빛나는 역사를 가진 민족은 드물다. 반드시 자주독립을 달성하여 자유의 행복을 누릴 것으로 확신한다"고 축사했다. 중국 총영사 대리는 "단군 때부터 양국은 좋은 친구였다"는 말로 한중관계의 깊이를 상기시켰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도 200여 명이 모였다. 초등학교 아동들이 계주로 성화를 들고 강화도를 돌아 참성단에 도착하는 장면은, 개천절이 완전히 한국사회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1947년 11월 15일 현대일보의 사설은 이렇게 썼다. "피를 찾는 날! 동족을 찾는 날!" 유엔이 남한 총선거를 결정한 바로 그날이었다.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개천절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이후의 역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1948년 9월 단기 기원이 대한민국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됐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양력 10월 3일이 개천절로 정해졌다. 해방 후 단 4년 만에, 대종교 교단의 종교 행사였던 개천절이 대한민국의 공식 국경일이 됐다.
이 속도는 우연이 아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해방공간 3년간, 대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치열하게 일군 결과였다. 그들이 개천절에 쏟아부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열정이 아니었다. 분열된 민족을 묶을 수 있는 마지막 언어를 찾으려는 절박함이었다.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 했던 그 시도는 결국 성공했을까.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개천절은 국경일이 됐지만, 민족국가는 세워지지 않았다. 남북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3년 뒤 6.25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그 3년간 개천절이 남긴 것은 있다.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절박한 시도. 좌도 우도, 기독교도 불교도 천도교도, 대종교도 함께 모여 같은 조상을 기렸던 기억. 그건 지금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무언가다.
개천절을 그냥 빨간 날로 보내는 것. 그것도 선택이다. 하지만 해방 직후 가을 서울운동장에 모인 1만 명의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며 백두산을 향해 경례를 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이 날은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들이 불러낸 단군은 신이 아니었다.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마지막 공통분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