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주님의 말씀
2024.3.31. 부활주일예배
성전에 올라와 보니 날개 성전 옆길에 목련이 활짝 피어서 부활의 아침을 빛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보셨습니까? 목련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님들의 얼굴도 활짝 피었네요. 감사합니다. 오늘의 부활절을 앞두고 한 삼 주 동안 새롭게 4복음서를 저는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받은 은혜가 많았는데요, 그 중에서 각 복음서마다 한 군데씩 은혜 받은 바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잊지 못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첫째, 은밀이 살아 있는 자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20절에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이 땅에 사십 일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천국으로 가시지만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 말씀이 오늘도 유효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 내가 갈 천국이 있다는 것이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이고 이와 같은 은밀이 살아 있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이 이 임마누엘의 삶을 많이 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내게 대해서 오늘도 살아 주시는 주님께 그리움으로 나아가서 주님과의 산 사귐을 통해서 주님께 새롭게 속하고 그 주님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서 약동할 때 우리는 은밀하신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가까울 것이고 천국도 나의 집처럼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첫마디 말씀입니다. 죄로부터 돌이킨 회개도 있지만 주님 그리워서 주님께 돌이키는 회개, 그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의 임재가 살아 있다면 내 안에서 부활의 생명은 날마다 뚜렷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주님과의 사귐이 죽어 있거나 희미하다면 주님과 주님 나라의 실재는 막연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만나셨습니다. 처음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 그는 일주일 후에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에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예수님을 알기 전입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는데 나사렛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 제자들을 잡아 오라는 공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메섹으로 향하는 도중에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해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핍박한다는 말이 충격이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살아 있는 몸입니다. 우리를 건들면 예수님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안 보이고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우리가 삶을 가볍게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은밀한 사귐이 주님과 나와의 이 은밀한 살아 있는 관계가 날마다 부활의 생명 속에서 실재가 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 주님을 아는 자
마가복음 14장 9절에는 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유월절 이틀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갔습니다. 그 식사 자리에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아주 비싼 물건이었나 봅니다. 그때 어떤 이들은 “저 아까운 것을 저렇게 허비하고 있다.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면서 그 여인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두둔하면서 “이 여인을 핍박하지 마라. 저가 나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신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깨닫게 해주실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보좌 앞의 삶이라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안 보입니다. 다만 교회와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이 보이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아는 자라면 주님을 주님답게 모시고 살아야 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 나는 예수님은 좋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싫어’라는 반응이 나올 것 같습니다. 베다니의 그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문둥이였던 시몬, 이름 모를 이 여인이 있는 베다니촌, 가난한 동네입니다.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님을 아는 자,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 주의 법이 내게 살아 있어서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섬기고 주님과 함께 숨는 자, 주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주님답게 아는 자가 마땅히 섬길 내 이웃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느니라” 우리가 섬길 거리는 항상 있습니다만 주님께 합하게 섬겨야겠지요. 삶의 순서는 첫째 주님을 아는 것이고 둘째 주님이 허락하신 길을 따라서 섬길 이웃을 만나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깨어 있는 자
누가복음 21장 3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경고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우리 마음이 쉽게 둔해지는지요. 술취함이라는 것은 꼭 술만 마셔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관계없이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임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 도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 돈밖에 모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들, 가족보다 돈이 먼저고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이 패역한 세대 속에 우리가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에는 17절, 18절, 19절에 이방인의 마음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의 허망한 마음 17절, 굳어진 마음 18절, 감각 없는 마음 19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 초점이 흐려지면 쉽게 이방인처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언제나 깨어 있을 것이다’ 착각하지 마세요! 마음으로부터 주님 앞에 근신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방탕함이나 술취함이나 생활의 곤란함, 이런 부정적인 이유로만 마음이 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된 일, 좋았던 것, 역사가 아름답게 된 일에 취해있어도 우리는 마음이 둔해지기 쉽습니다. 열왕기상 13장에 유다에서 온 젊은 선지자, 그는 사역을 잘했습니다. 담대하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벧엘에서 온 늙은 선지자의 말에 툭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그 사람이 지옥 갔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실수에 합당한 벌을 받았던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계로 성서에 적어 놓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에서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 전투는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승리했는데, 그 승리감에 도취해서 스스로 나아간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는 서른 여섯명이 죽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사역이 잘 마쳐졌다고 마음 풀면 안 되지요. 전투에서 승리했다해도 전투 후 또 다른 전투가 다가옵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선물로 받으시는 책이 ‘깨어 항상 기도하세요’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앞서서 깨어 있는 마음, 깨어 있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 있는 동안 천국 갈 때까지 마음의 허리띠를 풀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천국 가서는 마음껏 허리띠 풀어도 되지요. 깨어 있는 자, 그 사람이 바로 이기는 자이고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 찾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 넷째, 홀로 가는 길
요한복음 21장 22절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다 지쳐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제자들이고 같은 주님을 모시고 있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이 고기 잡으러 가자 해서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말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 속에 움직여야 하는 것을 뼈 속에 새겨주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두 번이나 말씀하시지요. 네가 사랑하는 형제를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나는 주님만을 따라갑니다. 그 홀로 가는 길에는 주님과 나만이 가는 좁은 길입니다. 그 홀로 가는 길을 뼈 있게 걷는 성도가 주님과 살아가는 성도이며 결국 형제의 길에도 서게 됨을 보게 됩니다. 형제의 길에 네캉 내캉 사이좋게 정으로 뭉쳐서는 안 됩니다. 뼈 있게 절도 있게 주님께 매여 있는 사람, 결국 형제도 얻게 되고 형제를 위한 형제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셨다. 그래서 기쁘다. 그 정도로는 곤란합니다. 좀 더 성숙한 성도라면 은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주님답게 알아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성도가 쓸모가 없어요. 마음이 둔해지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필요하지요. 빛도 필요하고요. 그러나 성도의 마음이 둔해져 있거나 성도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으면 주님이 사용하시는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이방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새벽에 밤중에 혹은 대낮에 홀로 어떻게 지내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진면목입니다. 주님 모시고 홀로 가는 뼈 있는 길, 천국까지 잘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