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과 박헌영과 길상사.
지승룡
어제 오전 1:57 ·
<길상사 주인은 박헌영이다>
20C를 여는 첫 해 교과서가 좋아하는 심훈과 위험한 인물 박헌영은 태어났다. 이들은 경기고등학교 동창생으로 만나 뜻을 같이 하며 중국유학을 다녀 온 열정을 나눈 동지이며 벗이다.
계몽주의 소설이나 쓴 심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36년 짧은 그의 삶은 치열한 투쟁이었다. 심훈이 오래 살았으면 교과서에 나올 수 없다 인물이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김정구가 부른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 가사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된 박헌영은 정신병행세를 하며 풀려난 뒤 주세죽과 함께 일본의 감시체제를 뚫고 두만강 하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박승직 광장시장을 만들다>
민족주의자 박승직(두산그룹 창업주)은 박헌영을 좋아했고 큰 후원자였다 박승직과 영화감독인 김용환은 박헌영의 위 탈출에 깊이 간여해 박승직이 자금을 지원하고 김용환이 연출을 하였다. 탈출이 성공한 이후 김용환은 그의 친동생 가수김정구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김용환이 탈출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박승직에게 전하는암호였다.
박승직은 한 때 친일명부에 올랐는데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박승직은 사업가이지만 상상할 수 없는 독립자금을 만들어 지원했고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조선총독부에는 작게 기부를 했다. 이 일로 박승직이 친일명부에 기록된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총독부에 형식상 기부를 했고 독립운동에 기부한 것은 어찌 기록에 남길 수 있는가?. 독립 운동가들의 증언으로 박승직은 친일명부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 친일명부에 작성된 인물이 많이 있다.
<계급혁명을 향한 독립운동도 안아야 한다>
종교개혁과 동학이 농민혁명으로 이어지듯 항일 운동은 복고왕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를 향한 계급혁명으로 생각하고 운동한 분도 있다. 나 이 부분 우리 민족은 넓게 수용했고 그렇게 외부 간섭이 없었다면 한국 북유럽에 버금가는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박헌영의 어머니는 이학규다. 이학규는 예산군 광산에서 식당과 여관을 했다. 그러다 금광광산 주인 조씨와 결혼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조봉희란 딸이 있었고 남편 조씨는 폐렴으로 죽었고 이학규는 광산을 직접 경영했다. 후에 미곡상을 하는 박현주를 만나 아들을 낳았는데 박헌영이다.
박헌영과 어머니가 같은 조봉희는 권번(기생이 있는 요리집)을 경영한다. 돈이 많았던 어머니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신학문을 공부했고 미모와 재능이 있던 조봉희는 어머니를 닮아 경영수완이 좋았다.
조봉희는 전북의 만석꾼 김병순과 결혼해 김제술과 김소산을 낳았다. 조봉희는 김소산에게 외삼촌인 박헌영이 대원각의 주인이라고 하며 외삼촌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박헌영에게 대원각은 네 것이니 여기서 기거하라고 하자 박헌영은 계급운동을 하는 자신이 이렇게 큰 집은 분수에 맞지 않고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이화여전 출신 김소산은 박헌영을 존경하며 공산주의에 깊이 헌신한다. 그리고 인물이 밝혀지지 않은 큰 독지가가 큰돈을 박헌영에게 주며 항일 운동을 위해 쓰라고 한다(위의 글을 보면 누군지 추축할 수 있다) 박헌영은 이 돈을 김소산에게 주며 대원각을 크게 건축하고 항일과 사회주의를 숨은 인맥의 뜰을 만든다.
대원각에는 김소산이 아끼는 새끼 마담이 있었다. 자야란 호를 가진 백석과 동거한 김영한이다.그런데 1949년에 김소산 간첩사건이 터졌다. 영화도 세상도 김소산을 기생간첩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역사를 흥미로 만든 이야기이고 김소산은 간첩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늘 지향하는 운동가였다.
김소산이 감옥에 갈 때, 자신이 나올 때까지 ‘새끼 기생’ 자야에게 책임지고 관리를 부탁했다. 1950년 전쟁이 나고 복잡한 전쟁의 와중에 수복 후 김영한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학의 첩이 되어 이재학과 모의해 1955년에 이 큰 땅 대원각 등기를 김영한 앞으로 했다.
김영한은 박헌영 아들에게 대원각을 돌려주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하며 안심을 시켰고 아들인 원경스님은 대원각을 인수하면 지금 길상사처럼 부자들의 명상 터가 아닌 사회개혁의 깊은 뜻을 담은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아들의 구상을 위험하게 느껴서인지 1997년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에 넘기며 당시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이 백석의 시 한줄 만 못하다는 묘한 칭송을 들었지만 박헌영 아들은 스님이기도 했고 분쟁하면 아버지 박헌영의 삶의 누가 될 것 같아서 법적 분쟁은 하지 않았다.
박헌영이 물질에 욕심이 있던 인물이 분명 아니지만 길상사는 박헌영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길상사가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정진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다면 박헌영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또 길상사 스토리가 김영한과 백석의 러브스토리로 회자되는 것을 넘어서서 근 현대사 치열한 항일 사상가 집안의 사업체이었고 항일 활동가들의 숨음 아지트였다는 것으로 스토리가 채워지길 소망한다.
<풍운아 심훈>
심훈은 3·1운동 가담 혐의로 투옥됐다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이념성향이 강한 문예조직 ‘염군사’ ‘카프’에 가입했다. 심훈은 자신과 박헌영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했다.
상해 망명 기간 중 사회주의에 접한 심훈은 국내로 돌아 온 후 사회주의자 친구들과 활동한다. 우선 1924년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인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 등과 함께 ‘동아일보사’에 입사한다.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심훈은 1926년 이른바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 당한다. 이 사건은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철필구락부’가 급료 인상 파업을 일으킨 사건이다. 심훈은 요즘 말로 말하면 해직 언론인이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심훈은 이듬해인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영화를 공부하였다. 영화를 배우는 동안 ‘춘희’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엑스트라였지만 심훈은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심훈은 이후 이때의 상황을 회상하는 글을 1933년 ‘경도의 일활촬영소‘라는 제목으로 신동아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심훈은 나운규, 안종화, 김기진 등과 함께 ‘영화인회’를 만들어 간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영화인으로 살아갔다.
이때 만든 영화가 ‘먼동이 틀 때’였는데 심훈은 원작·각색·감독까지 도맡아 영화를 만들었고,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듯 심훈은 영화인이라는 또 다른 이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심훈이 친구 박헌영이 출소를 하고 그의 모습을 보고 쓴 시가 있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군아 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심훈과 박헌영의 우정이 이렇게 찐했다.
3.1만세를 기념하며 쓴 심훈의 그날이 오면으로 글을 맺는다. 문학은 빈곤한 삶을 고발하는 것이고 경쟁이 아닌 우정이고 우리에게 주는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보신각)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심훈은 방정환 현진건 영화감독 윤봉춘 나운규(羅雲奎)와 벗이었고 이범석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박열 윤극영 신채호와 이회영 등과도 깊게 교류했다.
1936년 9월 16일 아침 8시 36살 심훈은 운명했다. 여운형은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심훈의 위 시를 낭송하였고, 관을 안으며 펑펑 울었다.
4회원님, 강상희, 김영해, 외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