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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정심주
요컨대 문제는 形에 있지 않고 質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內革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質을 파악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경락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어떤 상황을 유발시키는가?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암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사암도인 침구요결"을 보면,
"鍼道의 捷法最奇는 이른바 亂刺經絡하여 出血如糞에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요즘 침 놓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경락을 난자해서 100개 정도씩이나 꽂아보는 겁니다.
두통이 안 낫는다 하면 열결이 좋다니까 열결도 놨다가,
또 족삼리혈에도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으니 족삼리도 놨다가,
합곡도 슬쩍 꽂아보고, 태충혈 통곡혈도 꽂고,
사람이 용기가 없는 것 같으니 용천혈도 꽂는 등
생각나는 대로 막 침을 놓습니다.
본래 사상방이라든가 상한론방 같은 묘방들은
'方多以效少'라고 즉 方이 많으면 效가 적다고 했습니다.
체침법 배우신 분들, 족삼리가 치료할 수 있는 치료병명을 찾아보면 약 3만여가지가 되지요.
그러니 못 고칠 병이 어디 있겠습니까?
(족삼리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자침의 무분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 태충혈, 외관혈과 같이 치료할 수 있는 병명이 많은 혈을
50개씩 100개씩 선택을 해서 취혈을 해서야되겠습니까(이것은 다방이 되는 결과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무의촌 봉사를 가 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환자가 잘 낫지 않으면 陰陽寒熱虛實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고
선후배를 막론하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자꾸 플러스(+)시키다가
나중에는 머리가 혼란해져 손을 드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암침법은 참 묘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혼란 대신에 원리체계를 세워주고 그에 대한 토론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왔는데 그를 소양지기로 봤다고 합시다.
이것은 마치 불(소양상화)을 끌 때 물만 쓰는 줄 알고 모래를 끼얹는 방법을 잊은 편협성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용약법에도, 꼭 숙지황, 생지황, 황련, 황금, 황백만으로 불을 끄는 것이 아니고
용골, 모려도 염두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기름불이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 물을 부을 수 있습니까?
그럴 때는 숨을 죽이는 방법, 모래를 끼얹거나, 두꺼운 보자기를 씌우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용골, 모려를 언제, 어떤 불을 끄는 데 써야 하는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두뇌가 필요하고,
사람의 본성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한방의 어려운 점인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외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터 가슴이 울렁울렁하더니
臍部動悸가(배꼽노리가 펄떡펄떡 뜀) 있다고 합시다.
제부동계에는 龍骨牡蠣湯을 쓴다고 했으나
왜 숙지황을 쓰지 않고 용골, 모려를 쓰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열을 가라앉히는 데 숙지황, 생지황을 쓰는 경우, 향유를 쓰는 경우,
황련 황백을 쓰는 경우, 용골 모려를 쓰는 경우 등을 잘 알아서
불의 성품에 맞추어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작불은 물로 끄고, 기름불은 모래로 끄는데,
가령 촛불을 끄면서 물을 한 대야 들이부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불은 꺼졌지만 과다한 물로 인해 화를 부를 수도 있고
몸 전체가 냉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水克火라는 오행설을 외웠더라도
불을 모래로 끄는 경우는 土克火가 되므로
기존의 相生相克法이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앞의 경우 촛불은 입으로 불어서 끌 수 있으므로
木克火(厥陰風木이므로)가 됩니다.
이제까지 여러분들은 논리로써 우주를 배워 왔지
사실을 관찰해서 논리를 유추하는 법을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실을 먼저 깨닫고 그 사실을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논리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舍岩五行針은 五運六氣針'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오행적인 사고방식은 버리고 백지상태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듭니다.
방에 물을 쏟았다고 합시다.
그 물을 분필이나 흙가루로 말린다면 토극수가 되고,
전기드라이어로 말린다면 화극수가 되겠지요.
또 통풍을 시켜 말린다면 목극수가 되고,
다르게는 물길을 터서 물을 제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병을 고치는 것은 결코 한 가지 논리만으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고정된 논리만을 외운 의사는 자신의 처방에 잘 낫지 않는 환자를 보고
"의학입문에 보면 분명히 이 처방으로 낫게 돼 있는데 왜 안 낫지?
자네 병이 잘못 된거야. 가서 병 고쳐와!" 이러더군요.
제 강의는 사암침법의 실질적인 효과를 알려드림에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론만을 주장하여 厥陰風木은 신맛이고 권력욕이고 명예욕이고
어쩌고 하는 것을 결코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매일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확실한 각성의 상태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사암침법의 묘미는 나중에 치료법에서 얘기하겠지만 아주 기묘합니다.
그 기묘함이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경락이 갖는 에너지를 알아
사지의 팔관절, 무릎관절 이하에 있는 穴만으로 병의 근본을 조정해 주는 데 있습니다.
"사암침구요결"을 보면
"본서의 원저자 사암선생은 그의 존성대명을 밝힌 바 없고 그저 道號'舍岩'이라 하였을 뿐인데
세간에서는 石窟속에서 득도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승려본질이 俗姓發表를 忌하는 것이 통칙이고 보니
推考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나 최근 此書公刊의 報를 접하고 專爲上洛한 江原道一老醫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舍岩은 즉 別人이 아니라 사백십수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지휘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軍使로 일본에 건너가 여러가지 이적을 나타내어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저 유명한 四溟堂 松雲大師의 수제자라 한다"고 쓰여 있는데 혹자는 사명대사가 사암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 기이한 책이 시중에 필사본으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밝혀져 사암이 유명해졌는데,
불교계율 중에는 친히 자신의 법을 내지 말라는 율법이 있어서 이름은 커녕 아무런 행적도 알 수 없고,
다만 집 "舍"자, 바위"岩"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굴 속에서 공을 들이고 관심을 한 침법인 까닭에 일반 침법과는 다른 것입니다.
치료하는 방침은 "황제내경"과 같지만 병을 보는 관점은 획기적인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른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足少陰腎이라 할 때 腎은 오행적으로 水라는 차원이지만
少陰은 君火를 일컫는 것이며,
足少陽膽經은 木이라는 개념외에도 相火之氣를 담고 있고, 相火는 팔괘상 어디에 해당하며,
정신적 물질적으로는 어떤 것이 취상되겠는가 하는 점 등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요점만 간추린 것을 보고 사암침법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 총론부분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 강의 요약집을 보면 유심적, 유물적 취상을 하면서 '足厥陰肝經은 피리다.
足少陰腎經은 수중 Sex다'라는 말장난을 해 놓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五運六氣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며 또한 최대한의 상상력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육기적인 개념과 오행적인 개념이 서로 복합되었을 때
추론할 수 있는 여러분의 상상력을 유발시키기 위한 표현이므로
때로는 그것들이 여러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런데 제 강의의 간추린 것만 보신 분들은 제게 전화를 많이 합니다.
'어째서 陰이 쾌락이고 陽이 분노라는 것이죠? 가설이 엉터리가 아니냐?'하는 항의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간추린 것만 보는 공부는 이 강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도,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그만큼 사암침법은 난해합니다.
석굴 안에서 몇 십년 수도한 결과에서 나온 내용을 그리 쉽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분이 공부했던 방법이 가장 궁금합니다.
옛날 선가에서는 비술로 이 사암침을 공부했는데 오늘날 스님들은 이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한다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 사암침법을 공부하고 나서 '나는 舍岩針法派'라고 섣부른 속단을 한다면
그 사람은 크게 오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암도인의 가풍이 사명당의 가풍이고 곧 서산대사의 가풍이고,
서산대사의 가풍은 달마의 가풍이며, 달마의 가풍은 석가의 가풍이고
그것은 곧 역대 모든 성인의 가풍인데 성인의 가풍에 어찌 상이 있겠습니까?
상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일본의 유명한 선사의 시는 이러한 성인들의 가풍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푸른산은 흰구름의 아버지
흰 구름은 푸른 산의 아들이다.
서로 의존함이 없이 온종일 서로 의존하지만
흰구름은 언제나 흰구름이고
푸른 산은 언제나 푸른 산이다.
이미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모든 것을 섣부르게 판단하는 인간사의 오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중에 사암도인의 오운육기만을 배워서 빨리 성공해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각성하시고
오운육기의 天眞面目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도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명당대사 책을 아무리 보아도 오운육기, 궐음, 소음, 태음 등의 말은 한 마디도 없으니 증거할 수는 없으나,
비록 문자를 달리 썼다고 하더라도 오운육기를 보는 눈이나 禪을 보는 눈은 천진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자들을 어떻게 공부시켰는지 알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따로 오운육기를 가르치지 않더라도 절로 오운육기법을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분의 가풍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게 된 동기는 서산 → 사명 → 경허 → 만공 → 혜암으로 내려오는 참선법을 공부하는데
어느날 문득 마음의 매듭이 몇 개 풀려나갔습니다.
'아하! 이렇게 한의학을 보면 되겠구나'.
그 때 3%정도 풀린 것입니다.
그래서 D대학교에 내려가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사암침법에 대해서는 강의를 안했고 원리론에 대해서만 상당히 장황하게 이야기했고,
크리슈나무르티의 "의식으로부터의 해방", "지식으로부터의 해방", 라즈니쉬의 "성과 명상" 같은 책들을 읽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선악과에 대해서 논하라', '불경의 어느 부분을 읽어와라' 이런 식으로 정신과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얘기지만 정신과 시간에 학생들을 데려다 놓고 정신병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D대학교 1기생들은 잘 알 것입니다.
한 번 강의를 하기 시작하면 다섯 시간씩 강의를 했으니까요.
왜 제가 그런 강의를 했느냐?
사실은 그런 강의를 통해서 어떤 법에 대한 안내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후 연분이 있어서 이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렇게 100명 200명, 또 테이프를 들은 사람들까지 합한다면
상당한 수의 한의과 학생들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강의를 듣느냐?
그 기본은 바로 우리 마음을 닦는 수심공부, 도심을 익히는 공부,
천진한 면목,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탐구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양철학의 근본은 태극이라든가 아니면 우주의 근본이 되는 신선공부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방의 정면이 너무나 장중하고 위엄이 있는 가파른 벼랑과 같을지도 모르므로
방과 술은 멀리하고 먼저 도부터 닦아보자하는 마음에서 저는 굉장히 많은 세월을 우회해 왔습니다.
무언가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여기 저기 침술의 대가와 처방의 대가라는 사람들을 찾으면
그 대가들은 나를 여러 방법으로 시험하면서 "음양관하나 얻으려면 40살 넘거든 찾아오게",
"한 10년 이 처방 저 처방 쓰다가 40넘거든 한 두어가지 처방을 쓰게나" 그러더군요.
여러대가들의 말씀도 결국은 저 깊은 내면의 修身공부를 강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의과대학은 면허증만 따서 나가는 곳이 아니라 도 닦는 수련도장으로 성장되어져야 합니다.
사암도인이 굴 속에서 몇 십년 도를 닦아서 연구한 것만 똑 따먹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의 마음을 알아서 그 분이 못다한 사명을 우리가 이루고자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각론에 가면 사암침법을 강의하게 되는데, 저는 사암침법 임상 예를 여러분들에게 외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것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足太陰脾經을 많이 썼으나 지금은 다른 경락을 많이 써야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주는 변하고 있습니다.
사암선생이 살았던 때와 지금은 인심이나. 대기나, 삶의 수준 등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터득한 원리를 응용해서 써야지 양방병명처럼 외워서 쓰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이 강의를 하는 배경이 무엇인지,
그 마음이 어떠한지 알고 싶다면
제가 알고 있는 공안법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1700가지 공안을 다 통과해야
"아하! 이런 것이었군. 결국은 불여우같이 우리를 갖고 놀았군" 하고는 한바탕 웃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강의에서 거론되는 임상 예를 중요시하지 말고 천진면목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임상예의 암기보다는 그 분의 행적에 대한 소설을 먼저 읽으세요.
문제는 그 분의 눈이지 그 분의 행실이 아닙니다.
제 사부님이신 혜암선사께서 제 한의원에 오셨을 때,
"무얼 드시겠습니까?"하니까.
"시원한 맥주나 가져와라, 닭고기 하고"
"아니 스님께서, 더군다나 生佛이라고 소문이 나신 분이 어떻게..."
"그러면 어떠냐? 맥주는 시원해서 좋고 닭고기는 쫄깃쫄깃해서 좋지 않느냐?"
시원한 것을 그저 시원한대로 먹고 있는데,
나(금오)는 자기가 먹은 술이 풀장을 가득 채울 만큼이나 되는 주제에
어쩌다 한잔 먹는 것을 보고 계율이 어쩌고 자격이 어쩌고 하며 입방아를 찧습니다.
이 선사의 행위가 자칫 방종으로 보일지 모르나
행동보다 그 사람의 바른 소견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른 소견, 곧 '正見'이지요.
이 바른 소견 하나만 얻으면 오운육기를 강의하는 제 말에 끄달리지 않고
여러분 스스로 오운육기를 굴릴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시 두 편을 소개하면서 미흡하나마 이렇게 사명당과 사암의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한가로이 앉아 있는 것이 곧 나의 일이 아니요.
본래 계급이 없으니 길의 고저가 없도다.
금까마귀가 한 밤 중에 하늘 바다를 가로질러 지날 때
혼자 승상에 의지하고 앉아 새벽 닭소리를 듣노라.
閑坐則爲非我事
本無階級路高低
金烏夜半痛天海
獨倚繩床聽曉鷄
이 시는 사명당이 그의 제자에게 공부의 자세를 가르칠 때 지은 것으로
제 號를 여기에서 따서 저의 사부님께서 지어 주셨는데
금오란 동양에서는 흔히 태양을 상징하고,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상징하지요.
참선에는 많은 말이 필요가 없으니
단지 심상하게 자신을 묵묵히 관조하는데 있느니라.
趙州無字와 더불어 세상사를 잊고 공부를 한다면
비록 입이 있어 말을 안한다 하더라도 내가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겠다.
나의 스승은 천축국의 금선씨(천축은 인도의 異名, 금선씨는 부처님)인데
곧바로 발이 부르트게 옛뜰로 돌아가라.
내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지 돌아간 즉 너희는 얻을 것이라.
달이 푸른 계수나무에 임했는데 바로 원숭이가 우는 구나.
參禪不用多言語
只在尋常黙自看
趙州無字如妄却
雖口無言我不干
我師天竺金仙氏
直使趻跰返故園
自是不歸便歸得
月臨靑桂有啼원
이 시는 사명당이 그의 제자에게 준 시입니다.
조주는 스님이름이며,
무자란 어떤 사람이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데
개에게도 있는지 없는지 물었을 때
"없다"라고 대답한 선가의 화두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깨달음의 방법에는 믿음(긍정)과 의심(부정)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敎學的인 방법은 믿고 긍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고,
선가적인 방법은 의심과 부정과 반항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도 의심과 반항의 정열 없이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때의 의심은 번뇌 망상에 속하는 의혹이 아닙니다).
여러분! "청소년을 위하여"라는 책을 꼭 읽어보세요.
여러분! 우리 한민족의 약점인 사대사상이 더욱더 팽배해진다면
한의학을 공부하려고 유럽이나 중국으로 유학간다는 말이 나올지 모릅니다.
앞으로 중공과 문호가 개방된다면, 중공에 가서 공부하고 온 것을 자랑으로 삼아서
중공의 어느 한의원 앞에서 찍은 사진을 영업장 안에다 대문짝만하게 붙이는 그런 일이 생기게 되지나 않을까요?
한방에 종주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뭐하러 중공에 유학을 가요?
중공사람들이 배우러 오도록 만들어야지요.
중공의 개방주의 정책에 따라 문호가 넓어지자 한방을 배우기 위해 많은 수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동양철학이나 모든 근본이 중공에 있는 줄 알지만
아마 그동안 중공의 몇몇 눈 밝고 마음 밝은 사람들은 산 속으로 도피해서 살기 바빴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조직과 통제로 사람을 획일화 시키는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와 선의 꽃이 피겠습니까?
독일에서 몇 년 유학해서 독일어 좀 알고 칸트의 책을 번역 좀 했다고 그것이 유명한 칸트학자입니까?
이렇게 해야 인정을 해 주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학문적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입니다.
자유분방히 참으로 正道를 공부하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중공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방을 잘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학문적 사대주의,
한문을 주절주절 잘 엮어낼 수 있어야 한의학자가 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글로도 얼마든지 진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문자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표현보다는 그 뜻이 중요하지요.
바로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란 책을 쓴 김용옥 교수는
'5천년 전에 쓰여진 "黃帝內經"의 말은 그 당시엔 평상언어가 아니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때의 언어감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한자자전적으로 아무리 풀이를 잘 했다 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거지요.
따라서 지금 우리네 고전 공부에도 제기되어야 할 이론이 참으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귀(승검초의 뿌리)가 토끼의 간에 미치는 영향' 이런 식의 얄궂은 석사, 박사논문보다는,
차라리 고전 한 페이지를 잘 번역한 사람,
현대용어로 획기적인 번역을 한 사람에게 학위를 주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토끼 간이 어쩌구, 쥐가 어쩌고 하는 이런 작태가 계속된다면 한방은 결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한 페이지의 고전에 온 정열을 바쳐서 참으로 알기쉬운 말로 번역을 해 낸 사람에게 학위를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한방은 찬란한 꽃을 피울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번에는 사명당께서 쓰신 '覺夢歌'를 소개합니다. 깊이 한 번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人生天地此世間이 妙蒼海之一粟이라.
蜉蝣같은 우리 人生 朝不謨夕世道로다.
夜來風雨正急되어 花落多少念?로다.
恨端枕에 驚起하니 莊生인가? 蝴蝶인가?
空王(석가)佛未出世에 三界大夢 꿈을 일워 깜짝 놀라 일어나니
秋夜月 둥근달이 중천에 밝았더라.
月色이 괴괴하고 萬山은 적적한데
無鉉琴 높이 타니 이 소식 누가 알리.
三毒酒에 大醉되어 無明長夜 잠이 깊어
꿈을 길이 꾸노라고 구경할 줄 모르오니
이 아니 불쌍한가?
방편으로 수행하여 내 먼저 成佛한 후 중생제도 하여보세.
태고라 넓은 천지 一間土窟 삼어 두니 自心性은 光明日月에 비할 소냐?
四海水深廣하야 不增不滅하오시니 定慧水이 아니며
人我業産 깊은 곳에 須彌山高妙하니 圓覺道場 이[是] 아니며
松栢은 不變하여 四時長靑하였으니 常住說法 이[是] 아닌가?
靑山은 청정하고 白雲은 무심한데 적적한 山水間에 무심히 홀로 앉아
虛空馬를 빗겨 타고 般若慧劍 높이 던져 法性寺를 찾아들어 主人公을 벗을 삼고
行住坐臥되어 語黙動靜 逍遙自在 受用하니 覺樹曇花滿發한데 嶺上에 우는 새는 觀音鳥 이 아니며
녹수는 잔잔하니 趙州淸茶 이[是] 아닌가? 이 어떠한 경계런고? 라라리라리로라 태평가를 기리부세.
杜鵑새 울음소리 終日無心 終夜無心 無心客이 되었구나.
深山無人到에 다만 來者烏鵲이라, 낮에는 해가 오고 밤에는 달이 오니
비록 寂寞空山이나 주야벗이 산수로다.
有時에는 염불로서 無孔笛를 빗겨 불고 柱杖子를 의지하여 打聲一篇이루오니 寂滅樂現前일세.
有時에 嶺頭巖上徘徊하여 觀月하니 雲無心而 出岫하고 水流意而谷灘이라.
봄이 오면 꽃을 보고 겨울 되면 눈을 보니 대장부 살림살이 다시 무엇 구하리요.
自受法樂 無爲眞樂 저버린 자 누구던고?
生死長夜 잠든 사람 五欲樂에 沈淪하여 無量苦 받지 말고 自他受用하여 보세.
自縛自繩不祥하다. 方便 돗대 손에 잡고 생사바다 넓은 물에
般若龍船 노를 저어 저 바다를 얼른 건너 同往極樂하여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