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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학비를 낼 여력이 없는 농촌 아이들이 신 프롬 목사의 앞마당에 세운 바레이 나자린 교회 옆에서 공부하고 놀이를 하고 있다. |
목회자들이 스마트폰을 든 팔을 뻗은 채 훈센 총리를 에워쌌다. 캄보디아의 총리와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첫 만남을 기념하는 셀카를 찍기 위해서였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던 이 불교 국가에서, 지난여름에 정부 주도로 2500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훈센 총리를 만난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훈센 총리와의 만남은 “지금까지 전례가 전혀 없었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캄보디아 그리스도인을 대변하는 국제 네트워크인 캄보디아 복음주의 협의회(EFC)의 상임이사 텝 삼낭은 말했다. “그것은 [캄보디아 정부가] 기독교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신호입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박해가 극심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국가 지도자들과 이웃들이 교회에 마음을 여는 기미가 보이는 것 같다며 이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고 있다.
“여러분은 평화롭습니다. 그래서 저는 캄보디아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종교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훈센 총리는 수도 프놈펜 중심에 있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섬” 코피치의 화려한 시청에서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자리였지만, “최소한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할 불씨였다”고 텝은 말했다. 한때 공산주의 국가였던 곳, 황금빛 장식을 한 소용돌이 모양의 뾰족한 불교 사원 지붕들―이 사원들에서 연중 수십 차례의 국가 불교 행사가 열린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시골의 전원 풍경을 압도하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극소수이지만 최근 1600만 인구의 2.5퍼센트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캄보디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교회 지도자 세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진 교단인 그리스도인ㆍ선교사 연맹(CMA)은 캄보디아 기독교 인구는 2010년 이후에 50퍼센트 넘게 증가했고, 현재 30만 명 이상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EFC는 모든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한 ‘선교 캄푸치아 2021’을 시작했다.
•프놈펜의 가장 유명한 대형교회에 기반으로 두고 있는 네트워크인 새 생명 교회 연합(New Life Fellowship of Churches)은 2021년까지 500개의 교회 및 셀 그룹을 개척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24개 주에 200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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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ire Eggers |
“지금은 정말 열려있는 때입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
” 밀레니엄이 시작된 이후 ‘뉴 라이프 2000’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된 많은 학생들 가운데 하나인, 32세의 영어교사 닉 파네는 말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것을 하나님이 이루고 계십니다.” 지난가을 프놈펜을 방문하는 동안, 모든 교파의 지도자들이 지금은 큰 계획과 많은 기도가 필요한 때라고 CT에 말했다.
“하나님이 한국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캄보디아의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10퍼센트에 도달하는 것을 보기 원한다고, 프놈펜 외곽에 있는 새 생명 교회의 셈 소피 목사는 말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셈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가 25명에서 현재 300명까지 교인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일 아침에 수백 명이 모이는 것이 마치 “캄보디아의 새들백 교회 같다”고, 한 미국인 선교사가 말했다. 이 비유가 사실이라면, 인구의 80퍼센트가 사는 농촌 지역의 그리스도인은 다 합쳐도 한 개의 작은 가정 교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을 견뎌낸 그들의 믿음
프놈펜의 연례 ‘아시아 기독교 컨퍼런스’에서 크메르어로 부르는 찬양이 컨벤션 센터 밖의 빨간색과 흰색의 텐트들을 흠뻑 적시는 장마철 호우를 삼켜 버렸다. 아무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무대 뒤로 번개가 번쩍였지만, 스키니 진에 테가 두꺼운 안경을 낀 청년들은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놀라우신 주님께 나의 손을 듭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컨퍼런스라고, 뉴 라이프 교회의 원로목사 제시 맥컬은 말했다. 그의 부친인 척은 1994년 외국 선교사 재입국이 허용된 바로 그해, 이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2016년에는 4500명이 넘게 모였고, 5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했다.
캄보디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기독교 역시 젊은이들을 주시한다. 내전과, 결코 잊을 수 없는 저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대학살의 여파로, 캄보디아 인구의 60퍼센트가 30세 미만이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가 1975년 정권을 잡기 전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극히 드물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1923년에 CMA와 함께 캄보디아에 왔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지역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마을들에서 선교사역을 수행했다. 그러나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베트남 전쟁의 불안이 고조되던 무렵이었다. 그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기독교 인구가 1000명에서 1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공산주의 크메르 루주의 폭정이 도래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몇 주 전에 프놈펜에 있는 한 교회에 600명이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교회에 다시 돌아와 살아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알리기 위해 교회 벽에 자기 이름을 쓰기로 약속했다. 세월이 흘렀고, 그곳에는 단 세 명의 이름만이 적혔다. 1979년 말, 캄보디아에는 단 200명의 그리스도인만 살아남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 활동했던 CMA와 월드비전 같은 기독교 단체들은 국경을 따라 생겨난 난민캠프들로 사역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교회는 새로운 신자들을 늘려갔다. 어떤 캠프에서는 주일예배에 1만 명이 모였다. 나이가 많이 든 이 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앙을 갖게 된 때가 난민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CT가 만난 가장 나이가 많은 70세의 보트 보파는 여덟 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녀는 태국과 인접해 있는 가장 큰 캄보디아 난민캠프였던 ‘제2구역’으로 갈 때 작은 성경을 가져갔다. “거기서 목사님을 만났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답니다.” 이가 다 빠진 이 할머니가 CT에 말했다. “제가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지하교회였어요. 조용한 곳에서 모여야 했거든요.”
하나님의 섭리로 조 콩은 혁명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산림청 공무원직을 그만두었다. 그는 미국 오리곤 주의 정착촌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크메르어를 사용하는 CMA 교회들의 성장을 도왔다.
1990년대 초에 캄보디아 정부가 종교 활동을 다시 허용하고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그도 있었다. 프놈펜에 있는 국립극장을 가득 채운 집회를 인도하고 오지 마을들에서 방문전도를 하면서, 그의 팀은 3주 만에 500명의 신자를 늘렸다.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킬링필드에서 구해주셨고, 복음으로 저의 영혼을 구해 주셨기 때문에 저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EFC의 공동 설립자이자 현재 의장을 맡고 있는 콩은 말했다.
역량 있는 지역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교들, 훈련 프로그램을 갖춘 캄보디아의 21세기 교회는 자치 역량이 더욱 커지고 있으며(선교사들은 이제 외곽에서 지원 역할만 한다) 제자훈련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목회자들이 고난을 받던 30년 전, 20년 전, 심지어 10년 전만 해도 기회를 얻지 못했던 때와는 달리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겐 기회가 많다고, 45세의 EFC 지도자인 텝이 말했다. “떠오르는 세대를 보십시오. 그들은 열정적이고, 준비가 잘되어 있고, 전략적입니다.” “구세대에겐 그러한 역량이 없지만, 대신에 경험이 있지요.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를 존경하고 그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세대가 이들을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넘겨준 것처럼, 이러한 전환은 캄보디아 교회의 역사와 성장에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광야를, 이 나라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신실하게 지나온 캄보디아 1세대 목회자들은 이제 새로운 지도자 그룹을 맞이하고 있다.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어 있는 이들은 늘어나는 신자들을 더욱 깊은 지식과 제자도로 인도하는 데 여러 모로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서로 협력하여 일하고, 젊은 지도자들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신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스스로를 낮추어야 합니다.” 콩은 말한다.
수혜자에서 신자로
2000년대 초반 내내 캄보디아 젊은이들은 대개 키즈 클럽이나 컴퓨터 강좌, 영어 수업 같은 교회선교 프로그램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들었다. “사람들은 교회를 개발기구로 생각하곤 했지요.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 교회에 왔기 때문입니다.” 뉴 라이프 교회개척 위원인 행 소타는 말했다. “지금은 기적을 바라며 옵니다.”
캄보디아의 교회는 영적 변화와 여러 가지 극적 회심에 대한 간증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다. 예컨대 실눈을 하고 찬송가를 뚫어져라 들여다봐도 볼 수 없었던 시각장애 여인이 선교사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자 시력을 되찾은 이야기, 건설노동자가 독사에 물리고도 살아난 이야기, 가난한 구두닦이가 지금은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이야기 들이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들은―특히 농촌교회들은―복음전도 프로그램에 의존한다. “학생들을 통해 우리는 그 부모들에게 다가갑니다.” 티엔 싱라이는 말했다. 그녀는 씨엠립 성경 제일 장로교회의 목사인 티모시와 함께 무너져가고 있는 12세기 힌두교와 불교의 복합사원인 저 유명한 앙코르와트를 자랑하는 북서부 지방의 마을 교회 10곳을 섬기고 있다.
캄보디아 국기에도 있는 앙코르와트는 이 나라의 종교적 뿌리를 늘 떠오르게 한다. 불교는 캄보디아의 국교이고 기독교는 서양 종교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나 교육 프로그램을 사람들은 고마워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에 겨우 몇 달러로 살아가고, 의료비나 학교 수업료를 낼 만한 여력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캄보디아 중부의 바레이 나자린 교회는 매일 아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섯 가정을 후원한다. CT가 방문했을 때, 마을 엄마들이 그네에 나란히 앉은 채 자녀들이 교회에서 크메르 글자를 배우고 운동장에 둥글게 서서 게임을 하고 캄보디아 전통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는 불교신자입니다.” 통역을 통해 한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 오면 행복해 합니다.”
바레이 교회의 신 프롬 목사는 2006년 라디오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 몇 달 만에 이웃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2013년에 캄보디아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그의 집 앞에 목조 건물로 교회를 지었고, 안팎을 종이학, 줄줄이 엮은 달콤한 향의 플루메리아 꽃, 아이들의 낙서로 장식했다. 10킬로미터 거리에 교회가 있지만,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야윈 소떼로 붐비기 때문에 차로 45분이나 걸렸다.
“교회가 사회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때,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형성되고, 이웃들도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요.” 성경 제일 장로교회의 어린이 선교사역 팀장인 티엥은 말했다.
“‘나는 예수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그들은 말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일학교에 와서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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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의 100여개 교회 가운데 아주 오래된 교회인 형제은혜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수십 명이 예배를 드린다. 림 목사의 자녀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손자들은 교회 건물 뒤에 있는 고아원에 살고 있는 약 30명의 아이들과 어울려 교회 주변을 뛰어다닌다. |
그녀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캄보디아의 고 시아누크 왕의 이름을 딴 화려한 항구도시 시아누크빌에서 영어 공부를 가장 잘 하는 학생인 그녀는 번역 과제로 주어진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1장의 죽은 나사로 이야기였다.
티엥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불교도인 부모와 형제들은 그녀가 식사기도를 하면 혼자 중얼거린다고 놀려댔다. 그녀는 교회에 갈 때면 검은 비닐봉지에 책을 숨긴 채 가족들에겐 공부하러 간다고 말했다. “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으니까요.” 티엥이 말했다.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된 캄보디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과 가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기 전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내 가족은 불교 신자인데, 내 부모님은 불교 신자인데, 내 친구들은 불교 신자인데, 그들은 나를 박해할 거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프놈펜 외곽에 있는 샘 목사는 말했다.
불교 사원 행사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한 크메르인의 전통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고서도 그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샘이 그들에게 안 된다고 답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대신에 샘은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보라고 가르친다.
“제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서서히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샘이 말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들 스스로 우상들을 부술 것입니다.”
‘참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기독교 세계관을 문화적 위협으로 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끌리다보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의 탄생과 죽음을 주요 기념일로 정했기 때문이다. 개종자들은 ‘누가 세상을 창조했는지’ ‘누가 인간을 창조했는지’, 불교에서는 답할 수 없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에 주목한다.
“저는 부처는 캄보디아인의 신이고, 예수는 미국인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선교회 지도자였다가 지금은 프놈펜과 바탐방에서 ‘아시아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고아 돌봄 프로그램에서 일하고 있는 오우 사봉은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처도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성경학교에 다니기 전에 오우는 소년병이었으며, 난민이었고, 수련 승려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캄보디아 사람들이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제 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쉽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바탐방에 있는 형제은혜교회에는 서구 교회의 낯익은 전통과 캄보디아의 관습이 섞여있다. 60명 정도의 교인들이 반짝이는 타일 바닥 위에서 맨발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흙투성이 크룩스 슬리퍼와 샌들들이 입구에 쌓인 채로 있거나, 아니면 아이들의 장난감이 된다. “평화를 전하는” 시간이 되면, 참석자들은 합장을 한 채 서로 고개를 숙이며 “쫌리업쑤어”라고 전통적인 인사를 나눈다. 지지직거리는 앰프를 통해 CCM이 쾅쾅 울려 퍼지고 나면, 잔잔하게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에 맞추어 크메르 전통 찬양이 이어진다.
림 파니 목사는 요한일서 3장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 회중에게 이야기한다. 림이 크메르 루주를 피해 난민캠프에 있을 때, 처음 들은 메시지도 이것이었다. 그를 구원한 복음은 지금도 여전히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일하는 것도 힘들고,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사업을 하는 것도 힘듭니다.” 25년 전에 이 교회를 개척한 림은 말했다. “저희는 하루를 할애해서 교회 가족과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을 일터로 보냅니다.
캄보디아의 경제적, 사회적 압박이 복음전도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캄퐁톰 지역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에서는 한 십대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하고 있다. 열네 살 때 중매결혼에 항거하자, 부모는 지참금을 잃게 된 것을 교회 탓으로 돌렸고, 마을을 두루 다니면 이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몇 시간 거리에서 옮겨온 목회자 부부가 그 소녀가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또 학교를 계속 다니고 있는지 확인했다.
“저는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 같았지요.” 그녀는 우물에서 탈출하기 전까지는 우물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시아 기독교 컨퍼런스에서, 자신들의 미래 직업을 위해 또는 가족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기도하기 위해 무대를 에워싼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서 캄보디아를 위한 부흥의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캄보디아는 새로운 희망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뉴 라이프 교회의 샘이 말했다. “그들은 참된 무엇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된 그 무엇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캄보디아에 복음을 위한 창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열려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CT
케이트 셸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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