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가성론
金可成論
김 성 한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 논(論)이라는 것이 나온다. 잘난 사람의 잘난 소이를 만천하에 알리자는 것이다. 알림으로써 잘난 사람이 십분 더 잘나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쓰는 사람도 대상이 잘난 덕분에 오부쯤 잘나지는 수가 있다.
천하에 이름이 자자한 김가성(金可成)의 잘난 소이를 이 논으로써 알린다면 못난 신문배달 나 강일만(姜一萬)이 조금 잘나져서 보통 정도로 됨직하고 더구나 그와 동문수학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알리게 되면 보통을 지나 한치쯤 더 잘나져서 신문배달의 이 딱한 처지를 모면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서투른 붓을 들어 감히 김가성론을 쓰는 근본동기는 여기 있는 것이다.
서울 무슨 대학 교수 이학사(理學士) 김가성이라면 신문쪼각이나 읽는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고, 더구나 중학생지고 이를 모른다면 필시 그는 게름뱅이에 틀림없다. 화학에 있어서는 교과서 참고서 할 것 없이 김가성 저(著)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깊이 학술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후배를 위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다지도 많은 저술을 하였으니 그를 모른다는 것은 선배에 대한 의리로서도 말이 안 된다. 학계의 권위자 김가성 교수의 이름은 실로 혜성 같은 바가 있다.
여기 또 한가지 우리가 경앙하여 마지못할 사실이 있다. 그토록 자자한 이름을 날리는 그가 금년 단 27살이라는 것이다. 27살, 새파란 청년으로 일국 학계의 권위자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무시무시한 사실인 데다가, 허다한 저술을 내놓았다는 한가지만으로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그의 근면독학을 생각할 때 천하의 학도들과 더불어 나논 그의 찬란한 앞날에 대하여도 무한량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유명한 김가성이 단 27살일 수 있느냐고 의심하논 분이 계시거든 아까 내가 그와 동문수학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나 동문수학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기에 우선 이 점을 따져 놓아야 하겠다.
일본에서도 첫짼가 둘짼가 간다는 그 무슨 제국대학을 나온 그와 더불어 내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대학문을 들어가 본 일은 단 한 번밖에 없다. 공구리 대가리라 기억도 분명치 않으나 재작년 여름인 것 같다. 나 같은 것도 남편이라고 시굴서 따라나온 아내가 적리(赤痢)에 걸려서 열흘도 더 고생한 일이 있다. 적리쯤, 그까짓 것, 장국에 고추를 푹 놔서 먹으면 곧 나을 게라고 시굴서 하던 버릇대로 된장에다 고추가루 두 숫가락씩 섞어서 지졌다―두부도 다섯 토막씩이나 넣어서 날마다 세 번씩 꼭꼭 이렇게 대접하였으나 어떻게 된 놈의 병인지 낫지는 않고, 한주일이 지나고 보니 아내는 거의 죽어간다. 이에 일대 결심을 하고 ― 우리 같은 사람이 한번 병원에 가려면 정 말 일대 결심을 한다 ― 죽은 사람 모양으로 늘어진 아내를 뒤집어 업고 대학병원에 갔다.
그때 시굴서 나온 지 불과 한 달이라 서울 지리를 잘 몰라서 대학병원에 들어간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문리과대학인 그 대문을 들어갔다. 정면에 보이는 집은 너무나 어마어마하다. 바른편에 서 있는 조금 작은 집은 가슴이 떨리기는 하나 그래도 정면에 놈보다 덜 어마어마하기에 용기를 가다듬어 이 놈을 골라잡고 현관에 들어갔다. 막상 들어서니 아닌게아니라 가슴이 떨렸다.
머리가 괴상하게 까불까불한 ― 그때 나는 파마라는 것을 몰랐다 ― 처년지 부인인지 두 사람이 ‘미스 킴’, ‘미스 리’ 하면서 나오는데, 그 푸른 서슬에 물어 볼 염두도 못 내고 한참이나 망설이고 있노라니까 쪼끄만 아이가 복도를 지나간다. 옷도 시원치 않거니와 잘나보았자 애새끼가 아니냐 얕잡아보고 말을 건넸다.
“적리하는 사람은 어디서 보나유?”
“뭐요? 정리허다니 뮐 정리해요? ”
“아아니 이렇게 저어 앓는 사람 보는 데 말유우.”
“병원엘 가지 왜 이런덴 와? 시굴띠기는 별수 없어!”
기왕 수치를 당한 바에는 알고나 가자고 ㅍᅟᅢᆼ 돌아서 가는 놈을 지긋지긋이 붙잡고 캐어 물으니 건너편을 손가락질하고 턱을 한번 쑥 내밀었다. 돌아다보니 여기와 비슷한 집이다.
가르쳐 주는 대로 가 보니 과연 병원에 틀림없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이런 큰 집을 안에까지 들어갈 때의 심경 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어리둥절이었다. 문지기와 간호부한테 몇 번이나 꾸중과 냉소를 받으면서 그럭저럭 절차를 밟아 의사 선생님을 뵈옵고 약 한 봉지를 얻어들고 나왔다. 다시 행길까지 나왔을 때의 기분으로 말하면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심사였다. 온몸에 식은땀이 잔뜩 배었다. 자유를 찾은 나는 크게 한숨을 한번 휘유우 쉬었던 것이다.
이날 아내에게 대해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어른 한 사람을 메고 질질 끓는 여름 햇볕에 성북동서 여기까지 내왕하였으니 ― 더구나 시굴띠기라 길을 몰라 찔룩찔룩하여 시간과 노력이 갑절이나 들었으니 ―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병원이라면 나는 이때부터 진절머리가 났다. 다시는 병원에 안 가리라 결심하였다.
내가 대학문에 들어가 본 역사는 대개 이렇다.
나는 이런 위인이다. 그러니까 내가 제국대학을 못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요새같이 가짜 이력서가 ㅍᅟᅡᆫ읕 쳐서 남들은 다 출세하는 세상에 김가성 교수와 동창이다, 제국대학읕 나왔다 하고 싶은 마음이 난들 없으랴마는 원래 돼먹기를 이러고 보니 그런 생각은 엄두도 못 낸다.
그러면 중학 동창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무리 놈팽이 중학 졸업생이라도 영어 단어 열 개쯤을 알고 있을 게다. 그런데 내가 대학 현관에서 ‘미스 킴’ ‘미스 리’를 몰라서 처년지 부인인지 분간 못했다는 것은 내가 중학에도 다녀보지 못했다는 유력한 증거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중학을 졸업했다는 이력서 한 장 만들지 못해서 서기 나부래기 한자리 못하고 요모양 요꼴로 신문배달 감투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국민학교 동창인가 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15, 그가 11살 되던 해 봄에 그와 나는 둘이 다 국민학교(그때는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편입한 지 한 달 남짓해서 그는 서울로 전학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동창이라기도 어색한 점이 없지 않다. 내가 그의 나이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때 인상이 하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듣기에는 이 시굴서 광주(鑛主) 노릇하는 그의 아버지가 서울 가서 더 큰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간다! 참 장한 일이었다. 이 시굴에는 늙어 죽도록 기차 한번 못 타 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단 11살에 서울에 간다! 일마나 장한 일이냐!
나는 그가 어머니 아버지 뒤를 따라 갈 때 점심 보따리를 걸머지고 이십 리나 되는 큰 소나무 밑까지 전송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때 시굴에는 손수건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는 주먹도 흔들어 보았다.
그는 가고야 말았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서 길가에 앉아 발버둥 치며 울었다. 나 같은 것은 죽어 곤두박질쳐 보았자 서울 장안엔 못 갈 것이요, 이를테면 가성은 하늘에 올라가고 나는 땅바닥에 팽개쳐진 버러지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나 오래 울었던지 어두워서야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부지깽이로 후려갈기는 바람에 대문간에서 또 한번 발버둥치고 울었다.
그랬으니까 내가 아무리 둔한 인간일지라도 그의 나이를 잊거나 생김 생김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그의 나이 27살에는 충분한 확실성이 있다.
결국 그와 나는 글방 동창이다.
중학 대학에서 그가 어떻게 공부하였는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마는 글방에서 공부할 때를 생각하면 그는 참으로 천재였다. 내가 나이로 치면 4살이나 더 먹은 녀석이 천자를 잘 외우지 못해서 싸리 회차리로 종아리를 얻어맞으면서 겨우 묶을 속(束) 띠 대(帶) …… 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벌써 천자는 물론이요, 무제시(無題詩)를 메고 명심보감을 시작하였다. 둔한 탓인지 나는 집에서도 곧잘 얻어맞았다. 글방에서 늦게 돌아왔다 얻어맞고 나무를 안 뽀긴다 얻어맞고 글방을 집어치우라 얻어맞았다. 집과 글방에서 얻어맞은 것을 한데 합지면 하루 평균 적어도 여섯 대, 일년을 ,365일로 치고 2,190대는 뚜등겨맞았을 것이다.
그가 명심보감을 시작하던 날 광경은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이 한 번, 재―왈 위선자는 천이 보지 이 ― 복하고 위 불선자논 천이 보지 이 ― 화 ― 니라(子曰爲善者天報之以福爲不善者天報之以禍) 하고 한 번 불러주고 두 번 불러주니 가성은 벌써 거침없이 줄줄 읽는 것이었다. 그가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단박 읽어내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이 희색이 만면해서 ‘가성은 일람척기(一覽輒記)니 가위(可謂) 출람지 재(出藍之才)야!’하였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하여간 그가 굉장히 훌륭하다는 뜻인 것만은 알아채렸다. 참 부러웠다.
별안간에 선생님이 ‘일만아 이리 와서 글을 바쳐라’하기에 글 읽는 것은 잊어버리고 남부리운 생각만 하던 나는 우선 겁을 집어먹고 싸리 회차리부터 힐끗 쳐다보았다. 서울서 내려왔다는 이 선생님은 용서가 없었다. 예의범절에 밝고 모르는 것이 없는 우리 선생님은 무식쟁이만 사는 이 골짜구니에서는 동네 전체의 스승이었다. 그는 무불통지해서, 일례를 들면, 제사 지낼 때 민어의 꼬리는 어느 쪽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녀석, 곁눈질 말구 어서 이리 와!”
호통질에 선생님 앞으로 가서 무름을 꿇고 앉으니 이십 명 동창의 글소리만 머리에 쟁쟁할 뿐, 가슴은 떨리고 알던 것도 잊어버렸다.
“묶을 속, 떼― 재……”
하고 전능력을 기울여 바쳤더니,
“이노―ㅁ, 같이 시작헌 아이는 벌써 명신보감인데 무어야? 떼 재야? 온 호(乎) 이끼 야(也)까지는 몇 십년 걸릴 작정이냐? 저 싸리챌 가지구 이리 와 섯!”
싸리 회차리로 다릿배를 꼭 열다섯 대 뚜등겨맞았다. 여느때는 열 대 이상은 안 때리던 것이 이번에는 열하고도 다섯 대다. 이러니까 이날의 자초지종은 잊을래야 잇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고생고생하여 가며 내가 겨우 천자를 끝내고 가성은 명심보감을 삼분지 일이나 떼고 나서 봄이 오니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가정이야 잘하니까 들어갔지마논 나는 잘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그때는 하무 학교 가는 아이들이 없어서 교장선생님과 면장님이 모집을 다니던 때라 입학시험도 없이 들어갔다. 나는 여태까지 입학시험이라는 것을 치러본 일이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없을 게다. 오늘날 대학교수와 신문배달이라는 이 엄청난 차이의 시작은 벌써 이때에 있는 것이다.
가성과 나는 헤어진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 선생님과 아버지한테 가끔 얻어맞고 아니꼬운 아이들은 보는 대로 뚜등기는 사이에 햇수가 차서 보통학교를 나오고 나니 역시 팔자는 하는 수 없어서 황소 엉덩이를 회차리로 몰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재수없게 집밭이 모조리 홍수에 떠나가 버렸다. 손발이 닳도록 가꾸던 생각을 하면 애석하기도 하거니와 우선 살길이 아득하였다. 이에 서울 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서울로 가자, 감투바람이 회리바람같이 불고 감투가 나뭇잎같이 나뿌끼는
서울, 안 되면 지게꾼 감투라도 얻어걸리기야 하겠지.
십오대나 살던 충청도 이 산골짜기를 나는 비상한 결심으로 보따리를 걸머지고 떠났다. 서울 와서 얼마 안 되어 정말 나는 감투 하나를 얻어썼다. 지게꾼 감투보다 한등 높은 감투다.
우연한 기회에 신문배달 한 사람을 알게 되어 나도 흐리멍덩할망정 속에 먹물이 묻어 있기는 하니 남의 문패는 곧잘 알아 볼 것이라고 책임지고 추천하여 주어서 약주 한잔 멕이지 않고 신문배달 감투를 집어쓰게 되었다. 그때부티 나는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 신문을 안고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김가성을 만났다. 지난 봄이다. 아침 일찌기 신문을 받아가지고 돈암동 가논 전차를 집어탔다. 이 시각에는 언제나 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원남동에서 정거하자 스프링에다가 중절모 쓴 말쑥한 청년 신사가 가죽가방을 옆에 끼고 올라선다. 아무리 보아도 알 사람이다. 잘 생각이 안 나서 그 신사와 바깥을 번갈아보면서 궁리해 보았다.
―가성이 같다.
둔한 내 머리에도 마침내 이렇게 떠올랐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시 보았다. 옛날엔 없던 안경을 쓴 것만 다르지, 작은 키에 갸름한 얼굴이라든지 어울리지 않게 길다란 목이라든지 예전 그대로의 김가성이다. 더구나 콧등에 있는 조그만 점을 발견함에 이르러서는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一틀림 없는 김가성이다.
이렇게 결론이 내리자 나는 반가운 마음에 사람 없는 전차칸을 비틀거리면서 뛰다시피 ― 정말 약간 뛰기도 하였다 一그의 옆까지 가서 덮어놓고 어깨를 툭 쳤다.
“가성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나같이 경솔하지 않고 침착하였다.
“댁은 뉘신데?”
한다.
“아, 이 사람 날 모르는가? 내가 바루 강일만일세.”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하아 그러십니까? ”
하고는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이렇게 ‘습니까’가 튀어나오고 보니 괘나니 ‘아닌가’ ‘일세’ 따위를 건넌 것이 멋적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말투를 바꾸는 것도 계면쩍어서,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고 한번 더 건드려 보았다.
“S대학에 있읍니다. 한번 놀러 오시오, 명륜동 사는 친구헌테 연구자료가 좀 있다기에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앞서 집을 나왔읍니다. 지는 여기서 내립니다.”
악수하려는 내 손을 받지도 않고 내려 버렸다. 아마 보지 못했을 게다. 그는 어디까지나 학자적 냉정을 잃지 않았다. 참 훌륭하였다. 연구자료라는 말은 그리지 않아도 훌륭한 그의 모습에 일대 광채를 더하였다.
나로 말하면 일러주지 않아도 신문을 한아름 옆에 끼고 있으니 신문배달이라는 것쯤은 짐작되었을 것이요, 때묻은 명정옷을 입고 있으니 땀냄새가 나리라는 것도 그 예민한 머리로 몰랐을 리가 없다. 좀 섭섭도 하였지마는 출근시간이 되어서 그렇거니 하고 스스로 위안하였다. 다만 S대학에 있다니 서기님 인지 선생님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궁금하였다. 선생님이 아니고 서기님일지라도 보통 서기님이 아니고 대학의 서기님! 아 그는 정녕 출세하였구나! 샘도 안 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가 서기님이 아니고 몇 등 높이 교수인 동시에 이 나라 학계의 권위자임을 알아내게 되었다. 사실 대학 선생님을 교수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던 것이다. 하루 아침은 돈암동 내 구역의 배달을 마치고 나니 한 장이 남았다. 남은 놈을 손에 들고 읽으면서 길바닥을 걸어갔다. 삼선교를 지나 바로 파출소 앞에서였다. ‘金可成’이라는 석자가 눈에 번쩍 띄었다. 눈을 비벼가면서 자세히 보았다. 신문에 이름이 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더구나 반대에 남길 책을 지었으니 !
☆ 絶讚 學生必讀의 書 ☆
S大學 敎授 金可成 先生 著
化彈의 徹底的硏究
K帝大를 卒業後 美國에서 꾸준히 硏究를 거듭하시던 斯界의 權威 金可成先生이 化學徒에게 보내는 會心의 力作. 學習, 受驗에 반드시 있어야 할 學生의 寶典일 뿐더러 一般史敎養에도 한번은 꼭 보아야 할 最新敎養書, 賣盡이 切迫하였으니 速히 近方書店 或은 直接 本社에 注文을 바람. 注文은 先金에 限함.
四六豪華版, 마카오更紙 二五○面 價四○○圓
가성이가 쓴 책을 읽지 않으면 학생은 학생 구실을 못하고 교양인은 교양인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다. 나논 여기서 그가 굉장한 출세를 한 것을 비로소 확인하고 전일에 내가 저지른 실례를 후회하고 그가 취하던 태도의 정당성을 발견하였다.
신문에 박혀 있는 큼지막한 ‘金可成’ 석자는 나에게 육박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신문배달이다. 아다뿐이오. 이제부티는 조심조심해서 안 그러겠노라고 진심으로 맹세하였다.
또 한번 나는 김가성을 만났다.
하루는 충무로를 지나가는데 바로 옆을 그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지 못했는지 앞만 보고 간다. 달려가서 머리에 썼던 미군이 팽개치고 간 모지를 벗어들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일전에는 참 실례했읍니다.”
실례 안해도 실례했다고 우겨대는 것이 이 땅에서는 예의가 되어버렸다지마는 나는 진짜로 실례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심으로 이 말을 사뢰고 경솔하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아, 요새 안녕허십니까?”
그의 대답은 역시 점잖고 태도 또한 침착하였다.
“저의 집은 성북동인데 자세한 주소는 이렇습니다.”
하고 신문대금 받으러 다닐 때 쓰던 연필로 영수증 용지 뒷등에 써서 드렸다. 이렇게 거처를 알려드리는 것이 잘난 사람에 대한 예의요, 후일 그가 일만이에게 덕을 베풀어 줘야겠는데 주소를 몰라서 어찌나 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아아 그러십니까.”
그는 받으려 하지도 않고 눈으로 한번 훑어만 보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가려고 한다. 머리가 비상한 가성인지라 종이 쪼각에 적은 것 따위를 받을 필요는 절대 없는 것이다. 그를 보내고 나는 호주머니에 도루 집어넣었다. 언제 보나 침착하고 냉정하여 학자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과연 예민한 머리에 훌륭한 태도다.
적어도 권위자가 아니냐, 응당 그래야지.
여기서 또 한가지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다. 나를 보기만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헤어지자논 그의 눈지 말이다. 둔한 내 머리는 꼼꼼히 생각해 보았다.
―대학교수요 권위자된 자 어찌 길가에서 거지 같은 무리와 상종할 수 있을
것인가! 체면 문제다.
과연 백번 마땅한 일이다. 나의 불찰이었다. 나 같은 것은 맨골에도 못 가는 데 없고 남이 팽개친 초라한 모자를 써도 상관없지마는 그가 말쑥한 중절모를 단정하게 써야만 하는 그 이유도 여기서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김씨 그와 만나지 않기로 하고 만나도 모르는 척 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그의 체면을 위해서다. 실상 지난 여름에도 ‘화신’ 앞에서 그를 만났지마는 나는 모르는 척하였다. 그도 모르는 척하더라.
그가 출세한 후 그와 만난 것은 이것저것 합쳐서 세 번밖에 안 되지마는 그의 소식 혹은 그와 관련된 얘기는 그 뒤에도 몇번 들었다.
하루는 종로를 지나다가 박문서관에 들러 잡지를 보고 있었다. 사볼 밑천이 없으니까 책방에 가서 이렇게 공짜로 보기가 일쑤다. 조그만 책방에서 이런 짓을 하다가는 단박 쫓겨날 것이지마는 큰 데는 사람이 우굴우굴하여 눈에 덜 뜨인다. 옆에 섰던 중학생 두 놈이 책을 뒤척거리면서 얘기를 한다.
“얘 이 책이 어때?”
힐끗 겉눈으로 보니 그 〈化學의 徹底的硏究〉라는 책이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나와 관계 있는 사람의 책이다. 하물며 내가 경앙하여 마지않는 김가성 교수의 저서임에랴! 먹는 것 없이 나는 그 책이 좋다는 평을 내리고 이어서 두말 없이 사가기를 원했다. 원했을 뿐더러 조바심까지 났다.
그런데 이놈의 대답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틀렸어, 왜말루 쓴 그…… 무슨 책이더라? ……하여튼 무슨 화학연구야. 꼭 그대룬거 머. 그래두 볼라거든 내걸 갖다 봐.”
적어도 신문에까지 난 사계의 권위자가 쓴 책이 그릴 리 없다고 생각하니 이 따위 모욕적 언사를 감히 하는 학생놈이 아니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나 같은 것이 무어라고 하자니 알아야 핀잔두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노라니까 행하고 내던지고 나가 버렸다. 자세히 보니 그 책뿐 아니라 옆에는 ‘金可成 著’가 세 가지나 더 있다. 꼬마 점원이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책을 바로잡는 것을 보고 나도 행하고 나와 버렸다.
바로 추석날이다. 신문사에 볼일이 있어 들렀더니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기자요 두 사람은 손님이었다.
“가성이란 놈, 죽일 놈이야. 지난 초열흘날 결혼했다는데 청첩장 하나 없잖아. 그 며칠 천에 길에서 만났는데두 아무말 없구, 관호한테 물으니 동창이라고 부른 건 두민이밖에 없대.”
“두민인 의살 해서 돈냥 벌었겠다, 그럴법 허지 뭐야.”
“고거 큰일 났어. 뻔질뻔질 돌아만 댕기구…… 게다가 제깐엔 큰 권위자루 자처한다지.”
“흥, 왜놈 덕을 단단히 봤지, 무호동중에 이작호(無虎洞中狸作虎)야.”
“일종의 새치기지.”
“새치기 권위잔가 하하…….”
“새치길수록 껍데기는 점잖구 한다는 소리는 크거든.”
“그 무슨 책인가 한 건 내구 꽤 벌었다지, 더 점잖아지겠군.”
모두들 가성의 진짜 동창인 모양이다.
―가성이가 그릴 리 있나? 그 일람척기하던 가성이가, 다른 가성이겠지.
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김가성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소이연을 똑똑히 가르쳐 주고 싶었으나 아는 것이 없는 데다가 말주변까지 없으니 가슴만 답답하였다.
새파란 청춘에 벌써 학계의 권위자가 되었으니 그의 앞날은 어쩌면 아인슈타인쯤 될는지도 모른다. 못 되어도 일본의 유가와(湯川) 따위는 어림도 없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혼자 좋아서 어깨를 으쓱해 왔는데 그럴 리가 있나? 다른 가성이겠지.
하루는 옆집 문간방에저 자취하논 S대학생이 도끼 빌리러 왔기에,
“김가성 교수님 잘 계셔요?”
하고 물었더니,
“네?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나는 그가 어려서 일람척기 하는 신동이었던 것과 제국대학을 나오고 미국 가서 깊이 연구한 학자요 권위자니 크게 이루는 바가 있으리라고 자랑삼아 선전삼아 퍼부었다.
“글쎄요…… 뜬소문에는 다섯 가지 위원을 겸 하고 있다니까 그런지는 몰라두…… 참 요새는 또 어느 무역회자 중역이 됐다나부던데요.”
학생의 달갑지 않은 대답과는 달리 나는 여기서 실로 삼탄(三嘆)하였다. 교수 자리는 자리대로 차지하고 돈은 돈대로 벌고 행세는 행세대로 하고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푸르다더니 과연 그른 말이 아니다.
“잘 살구 출세하구 더 바랄 게 무에 있어요, 과연 모두들 기대하던 대루 됐군.”
내가 이렇게 응수하니,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이렇게 말미를 떼는가 했더니 멍하니 건너편 산꼭대기를 바라보다가 일어서 도끼를 쥐고 나가버렸다. 나 같은 신문배달 무식쟁이를 상대로 얘기해 보았자 얘기가 안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별놈이 별소리를 다 해도 내가 경애하는 김가성 교수는 일인 십역이라도 능히 감당할 천재요, 그 지식으로 말하면 고금과 동서를 천부는 몰라도 반쯤은 통했으리라 믿는 까닭에 그에게 태한 경애나 신뢰가 털끝만치라도 동요할 리 없다. 그는 단연 거리에 굴러다니는 어중이 떠중이와는 유가 다르다.
그후 나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아마 지금쯤은 직함도 더 늘고 저서도 부쩍 많아져서 더욱더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으리라.
김가성론을 마친다. 이로써 내가 김가성 교수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으니 나도 조금 잘나질까 남몰래 기대하고 있다. 말꼬리에 붙어서 천리를 가려는 파리의 심사라고 험하지 말기를 바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 조상의 그 알뜰한 전통을 낸들 잊을까 보냐.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