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편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절: 7절
내용 관찰
45편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교회가 그의 신부로 묘사된 사랑의 노래 곧 혼례 시입니다. 45편의 핵심은 "왕"입니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1) 합니다. "좋은 말이 넘친다" 함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의미합니다.
왕이란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가 관찰해 보십시오. 이 왕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히브리서는 6-7절을 인용하여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히1:8-9)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란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이미 창세기에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49:10)하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론에 이어 2-9절은 왕에 대한 묘사입니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2),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3)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싸우시는 용사(4)로 묘사되어 있는데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하는 말씀은 계 19:11에 그리스도가 백마를 타고 싸우러 나가는 장면과 일치합니다.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5)고 원수를 정복할 것을 말씀합니다.
6절에서는 놀라웁게도 왕을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면서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고 의의 왕국의 통치자 되심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아들에 관하여는"하고 아들되시는 그리스도의 신분이 얼마나 뛰어나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7)고 말씀합니다.
8-9절은 혼례식 장면입니다. 아름답게 꾸민 신랑인 왕과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9) 말씀하고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8)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10절은 신부인 왕후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번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합니다. 이 말은 육적으로 하면 냉엄한 말 같으나 왕후가 된 이제는 떠나온 옛사람의 백성들과 인연을 끊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롯의 처는 이 당부를 저버린 표본이고 리브가는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24:58)하고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창24:55)는 간청을 물리침으로 "네 백성과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린"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1) 합니다. 왕후는 궁중 왕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14). 12하에서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한 말씀이나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14하),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15)는 말씀은 성도들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인도될 것을 말씀합니다.
16절은 "왕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받을 영화를 말씀하고 있는데 "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하십니다. 먼저 언급한 "왕"은 왕중왕 되시는 그리스도요 나중에 언급한 "군왕"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계20:4)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을 얼마나 어디까지 높혀 주셨습니까?
마지막 결론에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고 송영으로 끝맺고 있음은 너무나 합당한 것입니다.
묵상해 봅시다.
왕에 대한 묘사가 어떠합니까?(2-7)
이 왕이 그리스도이심을 히브리서는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왕후에게 당부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적용: 왕후에게 한 말씀은 곧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는 듣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있습니까(10)
암송: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10).
제 46 편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요절: 7절
내용 관찰
46편의 주제는 "피난처"입니다. 첫 절에서 이를 말씀하고 7절과 11절에서 이를 강조하며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46편의 피난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떤 장소 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1) 하고 하나님 자신이 피난처임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환난 중에 만날" 아주 찾기 쉽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임재하셔서 "우리와 함께"(7,11하) 하시기 때문에 피난 처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46편의 주제는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지만 핵심은 그 하나님이 성 중에 "계시매 "(5), “우리와 함께 하시니"(7,11)한 "함께 하심"에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계시지만 그들과는 함께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당연시하거나 예사로 보아 넘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보다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일은 달리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을 통하여 함께 계셨습니다(출25:8).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5상)란 성막이 예루살렘 성안에 안치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는 "임마누엘"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 성막은 이에 대한 모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통털어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떠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임마누엘 사건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은 달리 없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영이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가 가능하여졌다고 말씀하심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는 말씀이나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0)는 말씀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영광스러움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우리 안에 감취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는 것입니다(계21:3). 그러므로 피난처는 궁극적으로 임마누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세상의 피난처요(고전3:16) 하나님의 영을 모신 성도들은 피난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간이 무엇인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요 선수적으로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유월절의 밤이 그리했으며 홍해도 밤새에 갈라졌으며(출14:21) 만나도 새벽에 내렸습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6)함과 같이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공격해 왔을 때에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고 이 점을 말씀해 줍니다.
그래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홍해를 가르실 때에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출14:14). 또한 구속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사역을 인간이 거들어 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2-3)고 말씀합니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은 환난 중에 만날 "도우시는 하나님"(1)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7,11) 뭇 나라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실 하나님"(10)이십니다.
묵상해 봅시다.
46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피난처는 무엇으로 주어졌습니까?
그 피난처가 지금은 어디에,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적용: 피난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그 함께 하심이 교회의 공동체로 그리고 형제 자신 속에 주어졌음을 명심하십시다.
암송: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