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몽 크노 『문체 연습』(문학동네, 2021)을 읽고
“초현실주의, 언어학자, 작사가, 갈리마르출판사 편집자, 수학자, 영화인, 번역가, 소설가이자 시인,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거장 크노는 문학실험과 정치변혁의 현장에 양발을 딛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창작세계를 폭넓게 일궈나간 보기 드문 인물이다.” 지은이 약력의 첫머리에 적힌 글이다.
“언어실험의 극단적 예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문학사에서 유례없는 작품들로 이름을 남겼는데, 일례로 바흐의 푸가에서 영감받아 동일한 일화를 99가지 문체로 변주해낸 『문체연습』(1947), 단 10편의 소네트만으로 시 100조 편의 제작 가능성을 제시한 시집 『시 100조 편』(1961) 등은 오늘날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이 책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2002년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재룡 평론가가 옮긴 책이다. 현재 고려대 불문과 교수이며 시학과 번역학, 프랑스와 한국 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평론을 집필했으며 2015년 시와사상문학상과 2018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하며 자타공인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최고와 최고가 만나, 최고의 책을 만들지 않았을까? 『문체 연습』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한 가지 상황을 아흔아홉 가지의 변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문체 연습이라고 쓰여 있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쓰기 연습에 의한 새로운 기법의 창작물이다.
목차의 제목만을 따로 적어서 그 방법을 배우면 좋을 것도 같지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참기로 한다. 아흔아홉 가지 기법으로 꼬고 비틀고 뒤집는 등 각각의 기법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발상의 글쓰기 연습을 나는 처음 보는 특별한 책 읽기 경험이었다. 에세이 쓰기를 지도해주시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이 책은 놀라움 그 그 자체였다.
「약기略記」에서 (11P)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인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바라보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첫 번째 이야기인 약기는 메모나 노트 등 잊지 않기 위해 급하게 적어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위의 상황의 설정으로 변주되는 아흔아홉 가지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시제가 바뀌기도 하고 어절 단위로 낱말 단위로 빼기도 놓기도 하는 등 상상 초월의 방법이 동원된다.
한 장면을 축소하거나 확대하고 빼거나 넣는 등이 연속되었다. 그 변주는 반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세 페이지가 넘기도 했다. 현장 상황의 서너 가지는 변하지 않는 상황으로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 표현 방식만 아흔아홉 가지로 바뀐다. 335P의 다소 두꺼운 책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변화무쌍한 변주에 호기심이 생겨서 계속해서 읽고 싶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만 예시로 적고자 한다.
「책이 나왔습니다」(36P)에서
“일찍이 수많은 걸작을 선보여 그 명성이 자자한 소설가 모씨는 유니크한 재능으로 한껏 빛나는 이번 신작 소설에서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수긍할 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인물들로만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제법 수수께끼 같은 한 인물을 자기가 타고 있는 버스 안에서 공교롭게 맞닥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연이 소설 전반을 가득 수놓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멋쟁이 중 단연코 최고인 어느 친구의 조언을 매우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인물과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고귀한 행복감에 젖어 소설가 모씨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넣은 힘찬 필치에서 뿜어나오는 매력과 감동이 작품 전반에 흘러넘친다."
위의 이야기 변주에 대한 해설은 (197P)에서 읽을 수 있다. 「42. 책이 나왔습니다」에서
“원제는 ‘출판 광고 문안’이다. 이는 책의 발간을 선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구이며 간혹 책 띠지에 실릴 문구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의 경우, 출판사에서 직접 작성해 제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작가가 직접 작성해 출판사에 보낸다. 이 문체는 1956년 피에를 포셰의 제작으로 발간된 〚문체 연습〛에서 별도의 종이에 인쇄되어 책에 삽입된 바 있다. 각주 〚주석-전집〛,1568,1572쪽” 이렇게 변주의 기법마다 설명이 자세하게 달려 있으며 프랑스어 원문도 실려 있으며 바뀐 부분을 비교하여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앞부분은 아흔아홉가지의 다른 표현의 이야기가 있고, 뒷부분은 앞의 목차에 따라 원어가 나오고 조재룡 평론가의 해설이 덧붙여졌다. 바뀐 부분을 설명해주고 그 기법도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앞부분과 뒷부분을 함께 펼쳐서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표현기법이 쓰였는지를 밑줄 그으며 공들여 읽었다. 문체 연습의 기법에 대해 공부도 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꼼꼼한 설명이 좋았다.
그가 1,000편에 가까운 시와 16편의 소설, 그 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글과 영상 작업을 남겼다고 한 그의 약력을 보고 실험적 글쓰기 책인 『문체 연습』을 낸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한꺼번에 쭉 훑어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나는 시간을 갖고 매일 적정한 분량을 정해서 음미하며 읽었다. 새로운 시도로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큰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작가님께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