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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대학교문예창작전문가과정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하
나는 밤과 비 속에서
빛의 탑이 되고 싶다ㅡ
대구와 황어를 위하여,
모든 작은 배를 위하여ㅡ
나 자신 스스로
난파선이네!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 5. 12∼1947. 11. 20)는 누구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병사, 나치스에 반대한 반전론자, 사형선고를 받았던 군인, 단 2년 동안의 작품 활동, 26년 6개월의 삶, 전후 독일문학사의 빛나는 별……. 나는 봄날의 목련과 같이 잠시 피었다 자라진 보르헤르트를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에 만났다. 얼마나 가슴 벅찬 조우였던가. 신문 심인 광고란에 가출소년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그 시절에.
보르헤르트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4년이었다. 외국어대학 독어과를 나온 시인 채희문의 번역으로 나온 『문 밖에서』(문예출판사)에는 유일한 장막희곡 「문 밖에서」와 4편의 자유단편(Erzhlung)이 실려 있다. 자유단편이란 뚜렷한 줄거리가 없이 삶의 단면을 잔잔히 들려주는 수필류의 짧은 소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5년에 독문학자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주연 번역으로 『이별 없는 세대』(민음사)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25편의 자유단편과 1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나의 애독서는 바로 이 민음사판이었다.
보르헤르트에 대해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는 채희문은 1990년에 도서출판 작가정신을 통해 보르헤르트 전집을 냈는데, 작가가 살아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가로등과 밤과 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에는 시 15편과 자유단편 34편 및 「문 밖에서」가 실려 있지만 유고작품 등 여러 편이 빠져 있어 전집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바가 있다.
완전한 전집이 번역 출간된 것은 1996년, 도서출판 강에서였다. 소설 전집인 제1권의 제목을 『5월에, 5월에 뻐꾸기가 울었다』로, 시/희곡 전집인 제2권의 제목은 『문 밖에서』로 정해졌다. 특히 『5월에, 5월에 뻐꾸기가 울었다』에는 채희문의 번역본에 누락된 유고작품을 비롯해 39편의 자유단편이 실려 있어 나는 보르헤르트를 알게 된 지 20년 만에 그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되었다. 도서출판 강에서 나온 전집은 특히 번역자 김길웅이 나와 동갑이라 그런지 문장이 수월하게 읽히는 장점이 있었고, 누락된 작품이 없다는 믿음은 한 위대한 정신과 보다 완전한 만남을 이제서야 이루게 되었다는 흐뭇한 마음까지 갖게 하였다.
지상에 단 26년 6개월 동안 살다 죽은 한 독일 작가에 대해 내가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작품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것 외에, ‘요절’이라는 말을 붙여 애석해 하기에는 부족한 한 이국 젊은이의 고뇌에 찼던 생애 때문일 것이다. ‘전시’라는 벗어날 수 없는 시대와, ‘군인’이라는 생사의 고비에 선 상황은 보르헤르트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그는 문학을 통해 나와 20년 동안이나 만나고 있다.
죽음 앞에서 더욱 치열했던 그의 문학정신, 자유를 갈망했기에 불멸하게 된 영혼, 그리고 문학의 위대함과 영원함을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며 전율한다. 그는 황달과 디프테리아로 병원에 있어야 할 몸으로 엄동의 독방과 전선의 참호를 오가며 생명의 심지를 꺼트렸다. 하지만 어두운 세계와 병든 시대, 침묵하는 신과의 싸움으로 다량의 피를 흘렸고, 어둠의 끝을 찾아 혼신의 힘으로 기어가다 혼절하고 말았기에 영원히 젊은 목숨으로 살아갈 것이다. 친구였던 베른하르트 마이어-마르비츠의 작가 해설과 여러 책자의 연보를 종합해 그의 불운했던 생애를 몇 줄로 요약해본다.
군복무를 하던 스무 살의 보르헤르트는 수백만 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나치스 정권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가 재판에 회부된다. 보초 근무 중 왼손 가운뎃손가락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당국은 이를 병역의무를 기피하기 위한 자해 행위로 간주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한 것이다. 손가락 부상은 가택수색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정권을 비판하는 편지가 집에서 몇 통 발견된다. 황달과 디프테리아 등으로 깊이 병든 상태에서 독방생활을 3개월 동안이나 한 후에 재판을 받는데, 검사는 총살형을 구형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 그러나 검찰은 상고심에서 편지에 담긴 반국가적인 내용과 원수 모독 혐의를 물고 늘어져 다시 사형을 구형한다. 재판부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와 일부 무혐의를 인정하여 전선에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형집행 정지를 선고한다.
보르헤르트는 군 입대 전 연극배우였다. 운 좋게 전선 위문극단에 배속되어 떠나기 전날 밤, 동료들이 열어준 환송연에서 한 고별사가 괴벨스 국무장관 모독이라고 누가 밀고해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는 감옥에 방치되어 있다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뒤 북진하는 미군 탱크를 따라 병든 몸으로 장장 600㎞를 걸어 고향에 도착한다. 회복 불능의 몸으로 병상에 누워서 죽음을 목적에 두고서 쓴 글은 전장에서 돌아온 전세계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아니, 전후 독일문학사가 그로부터 씌어지게 한다. 너무나 깊이 병든 보르헤르트의 육체는 스위스의 한 요양소에서 그의 영혼과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1947년 11월 20일,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뒤였다.
작품들의 주요 무대는 엄동의 러시아 전선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 투입된 독일 병사들은 총 든 적과도 싸워야 했지만 동상과 굶주림의 고통, 이[蝨]와 양심의 소리와도 싸워야 했다. 병사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밤꾀꼬리가 노래한다」「문 밖에서」), 탈영하여(「예수는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 감옥으로 끌려간다(「우리의 키 작은 모차르트」「민들레」). 폭격을 당한 집 속에는 어린 동생이나 어머니의 시체가 있다(「밤이면 쥐들도 잔을 잔다」「부엌 시계」).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확인사살 작업(「구주희 레인」)은 또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가. 보르헤르트는 숱한 죽음과 죽임의 장면, 주검과 환자들을 보고서 절망한다. 그렇다면 그의 문학은 절망한 자의 넋두리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 데에 보르헤르트 문학의 위대함이 있다.
그의 문학이 발하는 광채는 생명체와 사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력에서도 뿜어 나오지만 연약하고 고통받는 것들을 따뜻이 감싸 안으려는 사랑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매일 행해지는 30분간의 산책 때에 한 송이의 민들레를 발견하고, 그것의 냄새를 통해 세계와 교감하는 죄수. 눈이 몇 미터나 쌓인 러시아의 숲 속에서 적막감을 못 참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힘차게 부르는 기관총 사수와 그 병사에게 다가가 웃으며 포옹하는 상사. 혀가 짧아 시지프스를 ‘시쉬푸시’로 발음하는 작다리 사환의 열등감을 위로하는 나의 백부. 어린 동생의 시체를 쥐들이 뜯어먹을까 걱정하여 폭격을 당한 집을 떠나지 못하는 아홉 살 소년에게 밤에는 쥐들도 잠잔다고 설득하고는 토끼를 선물하는 사내. 이렇듯 그의 소설에 나오는 대개의 인물은 정감이 많아 상처받은 이웃을 보면 힘껏 껴안아준다.
스스로 절망적인 상황을 맞았고 절망했으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그의 문학은 비극을 넘어선 곳에 있기에 독일 문학의 빛나는 탑이 되었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기에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빛의 문학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찾아본 몇 권의 독일 문학사는 하나같이 보르헤르트를 전후 세대의 선두주자로 언급하고 있었다. 독일 문학사의 한 시대가 2년밖에 활동하지 않은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었으니, 시며 평론을 써오고 있으면서 실낱같은 족적도 못 남긴 나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어야 마땅하리.
완벽한 절망과 완전한 희망의 사도 보르헤르트. 그는 저승사자에게 불려간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빛의 문학'을 위해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또한 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심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름을 아득한 그리움과, 세월에 희석된 절망감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기억해낼 수 없다. “밤과 비 속에서 빛의 탑이 되고 싶다”는 부르짖음을 비롯한 수많은 명문·명구는 내 삶의 행로를 비춰주는 등불로 빛나고 있다. 그 등불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도 『이별 없는 세대』를 펼쳐들 때면 그를 처음 접하고서 완전히 매혹된 뒤, 그의 책을 벗삼아 가출을 일삼던 반항의 시절이 생각나 새삼스레 울분에 휩싸이게 된다. 사춘기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10대에 과연 ‘이유 없는 반항’을 했던 것일까.
나는 고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한테는 고문의 고통을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적이 없는 자는 폭력이 가져다주는 그 절망적인 고통에 대해서 대강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집에서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였고, 홍당무 소년이었고, 신문에 중학교 졸업 앨범에 나와 있는 사진이나 실리는 가출 소년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제자들을 폭언과 매로 다스리는 체육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체육에 완전히 맥주병이었던 나인지라 시간 중 곧잘 얻어터져 체육 과목이 든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 시간이 되기까지 내내 기분이 울적한 상태로 있을 정도였다. 그분 최대의 폭력은 발바닥 때리기였고, 제일 많이 구사하는 폭력은 양쪽 귀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리는 독특한 체벌이었다. 하루는 무슨 이유인가로 급우들 몇 명과 함께 유도장에서 발바닥이 퉁퉁 부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 그날 도보로 40분이 걸리는 집에까지 절뚝절뚝 1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울음을 참으며 걸어갔을 뿐 아니라 일주일은 족히 족(足)의 고통을 당한 나는 체육 선생님이라면 똑바로 쳐다보기가 싫을 정도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졸업 후 몇 년이 지나서 그 선생님과 엇갈려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었을 때 숨이 콱 막히는 고통이 엄습해 와 얼른 외면한 채 길을 건너고 만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교련 선생님 탓에 또 학교에 갈 기분이 영 나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은 장교 출신이라 첫 시간에 군기를 잡겠다는 생각에서인지 학생들이 트릿하게 군다는 트집을 잡아 선착순이란 것을 시켰다. 반 학생 전부를 운동장 저 끝에 있는 버드나무를 돌고 오게 해서 선두 몇 명만 쉬게 하고는 나머지는 계속 뜀박질을 시키는 군대식 체벌이었다. 선두 그룹은 등수에 들어 벌을 계속 받지 않는 처지가 되려고 줄을둥살둥 달렸지만 나는 약간의 평발이어서 회수가 거듭될수록 뒤로 처졌다. 한참 동안의 뜀박질 끝에 꼴찌를 기록한 나 한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은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 열 바퀴를 더 돌고 와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선착순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나는 다음 수업 시간에 들어갈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운동장 열 바퀴를 수많은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헐레벌떡 달려야 했다. 나는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곁을 영원히 떠나는 것으로. 고교 시절 2개월이 다 되어갈 시점이었다.
학교라는 데는 지식도 습득하지만 동년배 급우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사회성도 터득하고 협동심도 배울 수 있는 생활 공동체이다. 한편 가정은 혈육의 정을 나누는 안락한 울타리 속인 동시에 가정교육이 행해지는 장소이므로 둘 다 인성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다. 그런데 교육은커녕 폭력으로 나날을 보내야 한다면 탈출하는 것이 오히려 바르게 자라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중학교 시절 내내,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가정에서의 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특수함 때문에 어린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가 없다. 또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의 편애로 말미암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낄 때의 소외감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낳아주신 아버지라는 이유로,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이라는 이유로 아무 죄의식 없이 행하는 무자비한 폭력에 거듭된 탈출로써밖에 반항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나는 열여섯 혹은 열일곱의 나이였고, 내 가방 속에는 『이별 없는 세대』가 들어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성숙하는 고등학교 시절이 나에게는 없었기에 세계의 어둠을 응시한 보르헤르트를 교과서를 대신해 만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두운 세계와 병든 세대, 침묵하는 신과의 싸움으로 다량의 피를 흘렸고, 어둠의 끝을 찾아 혼신의 힘으로 기어가다 혼절하고 말았기에 영원히 젊은 목숨으로 살고 있는 독일인이다.
돌이켜보면 내 사춘기 시절의 방황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엄연히 살아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많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도 없는 시간)의 세례를 받고 있다. 그리고 펜을 쥐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나는 많은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은, 『이별 없는 세대』를 읽었던 나의 세대는 너무나 행복한 세대가 아닌가. ‘볼프강 보르헤르트에 얽힌 추억’이라는 부제를 단 시 「길 위에서의 약속」(『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을 부기하면서 이 부끄러운 글을 거둬들이자.
가야 할 길은 또 얼마나 멀고 험할까
돌아다보면 참 아득도 해라 눈꽃 핀
세상, 사람들은 얼어붙어 정육점의 가축처럼
(어린 시절, 정육점 앞을 지날 때는 눈길을 돌렸었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걸려 있었네
20세기의 지상 곳곳, 대리전과 침략전과 내전이 끝난 뒤
통곡하는 상복의 여인을, 미쳐버린 스물네 살의 처녀를
너는 본 적이 있는가 네가 본 세상의 어둠은
눈으로 덮여 있어 더 환하고 순결했을 것이네
얼마를 더 가야 쉴 곳이 나올까
밑창 다 떨어진 구두와 지폐 몇 장
젖은 가방을 베고 누워 운 적이 있었네
(그 가방 속에는 『이별 없는 世代』가 있었고)
젊은 탕아들이여 귀가하지 말라
너희들이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고 외치고 싶던 그날
눈 쌓인 길 위에서, 볼프강 보르헤르트
왜 너는 더없이 순수한 죽음에 관한 것들을 들려주었었나?
왜 너는 나한테 관련맺음의 아름다움을 들려주었었나?
나도 언젠가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수십 번도 더 내가 살해하고 용서했던
부모와 형제(=가족=가축?)가 준 상처는
(그 상처는, 다른 누가 주는 상처보다 깊으리)
이 우주의 역사와 더불어 불멸할 거라고 저주하며
집을 떠났었네, 네 짧은 소설마다 눈 내리고 눈은 꽃피워
겨울이 오면 늘 다시 읽고 싶은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날, 길 위에서 너는 나한테 손 내밀며 말했었네
가장 가까운 것, 힘없이 늙어가는 것들은 다 사랑하라고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학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졸저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을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