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381년, 자녀 다 출가시키고 염불하여 극락 간 강양군 부인
우왕 7(1381)
자료 : 『쌍매당협장집(雙梅堂先生篋藏集)』 권25,
비명류(碑銘類)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강양군 부인 이씨 무덤돌 글(江陽郡夫人李氏墓誌銘)
허계도許繼道 군은 나의 소중한 친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머무르며 시묘하고 있는데, 돌을 옮기고 흙짐을 지면서도 오직 괴로움을 달게 여기고 있다. 하루는 내가 가서 위문하자 허 군이 나에게 말하였다.
”자네는 나와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다. 소유少由형의 아들 창昶이 자네에게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되고, 자네의 사촌 동생 거秬 또한 형의 조카가 되며, 또 우리 누이의 남편인 강綱과 호晧 또한 모두 자식을 보았네. 우리 가문을 자네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지. 자네가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일찍이 글을 지어 벼슬에 나아갔고, 낭서郎署의 관리를 지냈으니 글솜씨 또한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일세. 우리 어머니의 평소 언행 가운데 후대에 보여주어도 욕되지 않을 것이 한두 개 있으니, 자네가 나를 위하여 글을 지어 주게.“
내가 즉시 애써 사양하며 말하였다.
”비록 평소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모두 다 말하기는 힘들고, 때를 잘못 만났으니 말을 한다고 하여도 세상이 믿어 주기 더욱 어렵네. 하물며 뒷사람들 깨우치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그러하네.“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뒤 허 군이 부인의 언행에 관한 대체 줄거리를 적어 왔는데 그 뜻이 더욱 굳으니, 그러한 뒤에야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부인의 성은 이씨이고 합주陜州 선비 집안이다. 증조할아버지 남충南沖과 할아버지 경방景芳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식植은 관직이 승봉랑 통례문지후承奉郎 通禮門祗候에 이르렀다. 지후공祗候公이 중현대부 내영윤中顯大夫 內盈尹인 정서鄭犀씨 딸과 결혼하여 경릉 을사년(충렬 31, 1305)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의릉懿陵 기미년(충숙 6, 1319)에 봉익대부 전리판서 진현관제학 상호군奉翊大夫 典理判書 進賢館提學 上護軍으로 돌아가신 우헌迂軒 허옹許邕의 짝이 되었다. 우헌 공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기꺼이 과감하게 말하고는 하였다. 부인은 능히 그 곁에서 유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정숙하였으며, 타당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모두 다 경계하여 바로잡았다. 그러므로 공이 여러 차례 대간臺諫을 지내면서 말을 하지 않음이 없는 가운데 위태롭기도 하였으나 지지 않고, 도리어 받아들이도록 하여 그 끝을 아름답게 맺은 것은 부인이 안에서 도운 덕분이었다.
영릉(충혜왕) 아무 해에 공이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간절하게 임금의 잘못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믿고 일을 꾸미는 자들이 글을 써서 올리자,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비난하니, 거의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부인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공이 강직하므로, 이 직책을 떠나지 않는다면 비방이 어찌 그치겠습니까?”라고 하며, 스스로 물러나기를 권하였다. 이윽고 비방이 가라앉게 되고 얼마 뒤 파직되자 드디어 가족을 이끌고 단계현丹溪縣으로 내려왔다.
명릉 을유년(충목왕 1, 1345)에 공이 감찰집의監察執義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게 되었다. 가족을 데리고 가려 하자 부인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공이 이제 사헌司憲직에 있게 되었으니 반드시 사람들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옮기거나 내쫓기는 일이 따를 터인데, 집안이 다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함께 가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 또한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 뒤 과연 언사에 연루되어 행성行省에 잡혀가니 부인의 말처럼 되었다. 얼마 뒤 관직을 면하고 와서 함께 해로하였다.
현릉 정유년(공민왕 6, 1357) 5월에 공이 병들어 위독하게 되자 부인과 자녀들이 곁에 있으면서 소리를 내어 슬피 울었다. 공이 부인을 가리키며 여러 자녀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제 어머니가 족히 너희들을 돌보아 줄 것이니, 뒷일에 대해 나는 걱정이 없다”라고 말을 마치자 돌아가셨다.
부인이 홀로된 지 20년 남짓 어머니의 도리를 지키며 자녀들을 기르면서 모두 다 결혼시켰으나 재산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마음을 서녘(극락)에 두고 입으로는 그 세계를 다스리는 분(아미따불)의 이름을 외며, 이에 부처님께 향을 사르고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무릇 절 세 곳을 지었는데, 몽선사夢禪寺는 공이 살아 있을 때 함께 원을 세워 다시 새롭게 지은 것이고, 가은난야加恩蘭若와 운룡사 雲龍寺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가까운 곳에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운룡사에 재물을 이바지하는 것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였다.
76세인 홍무 13년(우왕 6, 1380) 5월 25일 돌아가시자, 작고한 지 몇 개월 지난 이듬해 아무 월 아무 일을 가려 단계현의 아무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임금(우왕)이 즉위한 지 8년이 되는 해이다.
부인은 아들 6명과 딸 2명을 낳았다. 장념少由는 봉상대부 감찰장령 직보문각奉常大夫 監察掌令 直寶文閣이었는데 먼저 죽고, 7남 4녀를 두었다. 차남 광보光甫는 벼슬하지 않고 먼저 사망하였으나, 2남 3녀를 두었다. 3남 종도宗道는 봉순대부 판사재시사奉順大夫 判司宰寺事로 부인이 작고한 이듬해 아무 월에 작고하였다. 4남 승유 承孺는 전 좌우위보승낭장前 左右衛保勝郎將으로, 5남 2녀를 두었다. 5남은 출가하여 범액사梵額寺의 주지로 었던 대선사大禪師 각경恪經인데, 이미 작고하였다. 6남 계도 繼道는 전 통직랑 계림부판관前 通直郞鷄林府判官으로, 딸이 한 명 있다. 맏딸은 전 봉선대부 전의부정前 奉善大夫 典醫副正 장강張綱에게 시집갔는데, 딸이 한 명 있다. 둘째 딸은 □(前?) 봉상대부 삼사부사奉常大夫 三司副使 이호李皓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아들과 딸이 한 명 있으나 (그들의) 자녀는 없다. 외 · 손 남녀가 모두 25명인데, 소유의 아들인 전 별장前 別將 창昶도 □손孫이□, 소유의 외손인 영동정令同正 정선재鄭善財가 또한 증손의 맏이이다. 나머지 손자 6명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명銘하여 이른다.
여자이면서도 선비의 행실을 갖추었으니
말은 간단하면서도 뜻은 크도다.
군자가 이에 힘을 입고 자손은 창성하였으며
덕을 이룬 뒤에 복이 따르도다.
자연의 이치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아, 부인이시어, 이제는 돌아가셨네.
卍 보정의 꼬리말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마음을 극락(西方)에 두고 입으로는 아미따불 이름을 외며, 이에 부처님께 향을 사르고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을 일로 삼았으며 절을 세 곳이나 지었다. 이는 앞에서 본 극락 가는 조건 가운데, 가운데 동아리(中輩)를 갈 수 있는 조건을 다 채운 것이다. 다만 아들이 이 글을 쓴 친구에게 마지막 가는 모습을 서주지 않아서 그렇지 마지막까지 염불하여 극락 갔다고 본다. “보살은 씨앗(因)을 중요하게 여기지 열매(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과를 믿는 보살에게 그 결과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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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청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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