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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향 원문보기 글쓴이: 박소향
1. 반(反) 비평가론 - 서론
작가(시인, 소설가, 수필가)들 중에서 비평활동을 마음으로 환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작가들은 비평의 존재가치를 원칙적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비평가가 동석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대개 비평무용론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비평에 대하여 또는 비평가에 대하여 완강히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비평이 또 하나의 문학 형태로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그들 나름의 불변적 절개요, 그 지조’ 같은 것인지 모른다.
“저 개를 내쫓아라! 저놈은 비평가니까,”
괴테가 유명한 세계적 문호인 만큼 그 같은 ‘위인’의 이 한 마디는 마치 만고의 진리인 양 그 후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반(反)비평가론 또는 비평무용론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지론이다. 더구나 괴테처럼 말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문학이란 무엇인가?”하며 제법 학술적 연구태도를 보인 저서에서 피력한 ‘비평가론’이다.
사르트르라면 현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일 뿐 아니라 더러는 현대의 양삼이라고까지 추켜세우고 있는 인물인 즉 그의 말을 깎아서 들을 문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당사자인 비평가만 제외하고)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이 같은 비평가 야유론도 작가나 기타 그 비평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고 호평이 자자한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괴테나 사르트르의 이 같은 표현은 그들의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표현에 비하자면 너무나도 이질적인 데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이태백을 시성(詩聖)이라고 부르듯이 괴테의 같은 인물은 서양의 시성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일반적으로 평판이 높은 시인이었으며 그 인격도 별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60대의 노경에 들어서서 10대 소녀와 맺은 사랑을 굳이 노인의 망령이요 탈선이라고 본다면 그런 것이 그의 인격적 결함일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것 역시 로맨스그레이의 가장 대표적인 아름다운 예로 기억하고 있기는 할망정 그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르트르 역시 그렇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성적인 판단력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며, 적도 물론 있지만 남들을 야비하게 비방하고 또는 간지럽게 야유함으로써 쾌감이나 얻으려는 저속한 인물은 아니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격면에서도 작품 자체의 세계와 별로 큰 차이가 없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에 대한 그들의 표현은 전혀 색다른 데가 있다. “저 개를 내쫓아라.” 이 말은 지극히 격분한 상태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비평가를 보면 이가 갈릴 정도의 생리적 저항감이 느껴질 때만 나올 수 있는 반(反)이성적 흥분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말 역시 마찬가지다. 비평가를 가리켜서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묘지기라는 한적하고도 보잘 것 없는 직업을 발견한 인간”이라고 했으니 이 정도라면 상대방을 경멸하고 야유해서 그들로 하여금 속이 끓어 올라와 견딜 수 없도록 정신적 고문을 가하는데 필요한 대표적 용어는 모두 동원한 셈이다. 더구나 이 말을 한번 하고 그치자는 것이 아니요 영구히 남기기 위해서 활자화했다.
그렇다면 괴테나 사르트르가 그들의 작품 자체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처럼 과격한 표현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비평가에 대해서 그만큼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정도의 원한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사실로 그것은 일시적인 분노도 아니고 지극히 지속성이 강한 원한이며,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도의 과격한 표현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비평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본다면 괴테나 사르트르처럼 과격한 표현을 할 감정적 자세를 지니고 살아 나가는 것은 이 두 사람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소설가나 시인들의 사회에선 그것이 보편적인 감정상태이며 그 같은 안티 크리티시즘이 그 사회 공통의 풍습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반비평가론이나 비평무용론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체계적 이론으로서 주장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평 따위에 전연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도 말하고 있지만 비평가들 앞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치고 비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비평을 읽지 않는 시인이나 소설가라도 짧아서 읽기 쉽고 그때그때 자기의 작품이나 자기와의 라이벌이 될 사람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된 월평을 무관심하게 보아 넘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평가는 비평에 무관심한 소설가나 시인들로 인해서 실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비평에 너무도 관심이 지나친 소설가나 시인들 때문에 실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비평가들이 너무도 절실히 체험하고 때로는 당황하게 되는 사실이다. 또 그것은 무명인들만이 아니라 괴테나 사르트르나 또는 그렇게 세계적 명성도 얻고 돈도 많이 벌었던 헤밍웨이가 비평가들을 상어 떼들(<노인과 바다>에서처럼)에게 비유했던 사실 등에서도 입증되고 있듯이 세계적 정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비평에 대해서 너무나 지나친 관심을 지니고 있어서 오히려 비평가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비평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더 나아가서 그 무용론, 아니 백해무익론까지도 주장하고 나오건만 그것을 설득력 있는 체계적 이론으로 설명하고 나선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토록 무관심할 수가 있는 것이 비평이면서도 비평무용론이 지금까지 제대로의 이론으로서 활자화된 것이 전연 없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찌하여 그것은 대개가 단편적인 비난이나 무조건 싫다 하는 감정적 표현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찌하여 그것은 특히 비평에 대한 비난보다도 그 비평가라는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같은 비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펴악들이 그 같은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동기는 무엇일까? 더구나 한국처럼 아무리 서로 썩어도 비판을 삼가는 ‘에티켓 사회’에서 말이다.
이 같은 문제에 있어서 소설가나 시인들이 반감을 일으키는 비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혀 보자.
2. 반(反)비평의 감정적 이유
1. 숙명적 반감
비평이 남들의 진지한 창작활동에 대해서 그 형태와 내용을 해부하며 비판을 전개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간에 우선 그 활동자체가 개인적 감정을 자극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작품을 분석하는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어느 누구의 작품이든 결코 그의 권위를 분석이 끝날 때까지는 인정하지 않는데 있기 때문이다. 또 권위 있는 문인들에 의해서 아무리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세계적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같은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 그 작품에 대한 권위가 모든 비평가에게 통용될 수는 없다. 아무리 높은 평가를 얻고 세계적 명작의 레테르가 붙어 있더라도 그 작품을 처음으로 분석 비판하려는 비평가에 있어서는 그 같은 모든 권위가 백지화되고 만다. 모든 비평가는 어떠한 타인의 의견도 또 어떠한 선입견도 새로운 비평작업장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것은 참으로 무력한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같은 타인들의 평가나 기왕에 얻어 들은 선입견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작품분석평가에 영향을 받을 만큼 자신이 없는 비평가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비평 이전에 그 작품에 대한 타인의 의견을 듣지 말고 그런 글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평에 임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이처럼 가장 오만한 것이라야 한다. 가장 올바른 객관적 비평안(批評眼)을 지니기 위해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모든 권위의 의상을 벗겨 버리고 알몸뚱이의 순수한 작품으로서 마음대로 해부에 임하는 것이 비평인 이상, 이것이 소설가나 시인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숙명적인 것이요, 비평가와 작가간의 인간관계에서 이것은 본질적인 속성일 수밖에 없다.
비평가와 작가간의 감정관계가 이처럼 숙명적이요 본질적인 것인 이상 비평가가 굳이 소설가나 시인들의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요구하거나 같은 입장에서 감정적 비난을 하거나 또는 이쪽이 항상 미안하다는 죄의식을 지닐 필요는 없다. 비평 자체의 존재가치를 부인하지 않는 이상 그 같은 감정관계는 숙명적이요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이미 숙명이요 본질로서 전제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결코 비평가나 작가나 그 밖의 어느 누구의 윤리적 도덕적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숙명적인 인간관계에서 오는 반감을 맨 먼저 한국의 문단에서 활자화시킨 사람은 김동인이다.
그는 염상섭에 대하여 “비평가란 작품에 대하여 활동사진의 변사와 마찬가지로 작품에 대한 해설만 하면 그만이지 그 작품에 대하여 마치 재판관처럼 시비를 노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염상섭은 김동인의 주장이 너무 비평을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리고 김동인은 그 뒤의 염상섭을 가리켜서 자기가 소설가가 될 것은 미처 모르고 비평가 옹호론을 주장했다고 묘한 회고담을 끌어낸 일이 있다.
염상섭은 작고할 때까지 40여 년간 주로 단편을 쓰고 그 밖에 소수의 장편을 썼으며 기타 잡문은 거의 안 썼지만, 이것은 그가 소설을 쓰기 직전에 발표한 작품 비평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김동인의 반감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론 그 직접적인 원인은 김동인의 그 당시의 유아독존적 권위의식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명예감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동인은 그 비평 자체의 이론적인 면에 대한 시비보다는 비평가라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에 대하여 반발을 일으켰다. 비평가는 작품에 대하여 활동사진의 변사와 같은 기능만 맡으라고 한 것, 다시 말해서 작품의 가치판단을 하지 말고 이미 완성된 예술품으로서의 신성불가침적인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심부름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평이라는 활동이 “모든 문학 작품에 대하여 분석평가 이전에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문학 양식(樣式)이다.”하는 숙명적인 본질인 속성에 대하여 반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비평 뒤의 반감
(1) 소설가 P씨의 경우
그런데 김동인의 예는 비평활동이 한국 문단에서 또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서의 객관적 위치를 차지하기 이전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비평이 작품비평 이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여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이후로는 이 같은 형태의 반발의식은 적어도 활자로 나타난 것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 대신 소설가나 시인들의 반감은 비평 뒤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언제나 언급된 작품의 임자 자신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지 딴 작가들이 범문단적 입장에서 대변하고 나온 예는 역시 발견하기 어렵다.
필자 자신에게 가해졌던 작가의 항변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분이 뭣을 하는 분인지 나는 아직 확실히 모르거니와 어느 편에선지 모 학교의 국어선생 노릇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이 나라 문단을 자기 교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고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착각을 했다 하더라도 “문장은 주부(主部)와 술부(述部)로 된다”는 것만을 알 뿐 문장에 어떤 종류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그런 말본 지식의 국어선생이라면 이분 밑의 학생들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싶다.(중략)
다음 또 그 문제의 단어 ‘퍼어져’의 건. 이 낱말을 이 분은 ‘기형적인 단어’라면서 “자국어(自國語)의 어미 변화조차 잘 모른다.”고 나의 무식을 지적한 다음 “이 나라의 기성작가의 대열 속에는” 이런 “문학입문도 통과할 수 없는 실격자”들이 적지 않다고 전문단을 들먹여 개탄을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골목대장적인 행패요 자기 무식의 토로인가.
(1962. 12. 29 <경향신문>)
이것은 작가 박경수씨의 글이다. 그는 <좀더 성실성을......>이란 큰 제목에 ‘김우종씨의 문장론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여서 이 글을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62년 12월 5일자로 필자의 <12월의 창작평>이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는데 특호활자로 <한심한 피날레>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내용도 과격했지만 제목이 더욱 과격했으며 이 같은 것이 작가들의 감정적 반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 창작평에서는 몇 작가의 문장만을 주로 인용하면서 문법 이전의 초보적 문제부터 따지며 작가로서의 기본적 자격부터 부인했기 때문에 물의를 일으킬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그 중에서 지면을 통한 반론까지 제기한 작가가 바로 박경수씨였는데 앞의 인용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의 글에서는 ‘펴어져’ 같은 단어가 대표적인 예로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책이 펴져 있다.”고 말하지 “펴어져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법적 설명을 이 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겠기에 생략하지만 하여간 작가 박경수씨가 “책이 펴져 있다”가 아니라 “퍼어져 있다”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반론을 펴 온 것은 흥미있는 일이었다. “책이 펴어져 있습니다.”하는 기이한 언어관습을 갖고 있는 인물이겠기 때문이다. “책이 <꺽어>져 있다” “책이 <찢어>져 있다” “책이 <떨어>져 있다”처럼 어간에 받침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은 그대로 ‘펴져’다.
그런데 이 글이 특히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은 “이분이 뭣을 하는 분인지 나는 아직 확실히 모르거니와......”로 시작되는 반론양식이다. 그 표현은 곧 “문인으로서의 최소한도의 역량도 아직 인정받은 일이 없는 무능하고 이름 없는 사나이”라는 뜻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로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를 서로 기억하며 이미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는 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 학교의 국어선생 노릇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는 것 역시 같은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에 서 있는 사람이나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의 교설에 서 있는 사람이나 사회적 지위가 그로 말미암아 달리 평가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일반적 통념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의 신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모 학교 국어선생 운운”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작가들이 비평가에 대해서 때때로 얼마나 저돌적인 반발의식을 갖게 되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보자면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당한 이론 같은 것이 그들에게 굳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감정적 반발이 강해질 때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곡시켜서 중상할 결의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분 밑의 학생들이 너무 가엾지 않는가”하며 직장에서 추방되기를 원하는 듯한 도전의식까지 나타낸다.
비평이 작가의 이 같은 저돌적 항의를 받는 것은 작가의 소중한 자존심을 지나치게 훼손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을 밝히는 작업이요 또 그 같은 작업이 갖는 사회적 공익성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작가 개인의 명예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로 말미암아 그 작가가 보다 우수한 작가로 발전할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가장 큰 약점이 공개되고 더구나 그것이 독자 다수의 지지를 받을 만큼 정연한 이론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 때라면 작가의 반발의식은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미 자신의 명성이 정점에 도달해 있으며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갖고 있는 세계적 일류급 작가들마저 한 사람의 비평에 대하여 그토록 반감을 표현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로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자신 있는 작가라면 비평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다는 태도를 굳이 밝히는 것도 별로 필요한 일이 아니겠지만, 사실로 반발의식을 활자화할 만큼 지나치게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훌륭한 태도는 못된다. 그것은 타인의 의견에 대해서 초연할 만큼 자신 있는 자기 세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2) 여류 작가들의 경우
다음엔 좀더 집단적으로 나타난 예를 들어본다.
나는 대체로 남의 말에 의해 어떤 선입견 같은 것을 지니기를 경계한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나는 나대로 다시 처음부터 백지상태에서 파악해 보며 노력하는 편이다.
또한 나의 작품에 대해 어떤 사람이 호평을 하였다 하여도 결코 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우쭐하지 않는다. 반대로 누가 어떤 혹평을 하였대도 아무런 타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작가 전병순(田炳淳)씨가 발표한 <문학의 자세>의 한 토막이다. 여기에는 “<여류 작가에게 주는 고언(苦言)>을 읽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편집자는 필자 김우종씨의 글을 읽고 쓴 전병순씨의 ‘조용한 반론’이라고 주역을 붙여 놓았다.
이렇게 ‘조용한 반론’이란 설명이 붙어 있듯이 이 작가는 조용하게 자신의 괴롭던 작가적 성장과정을 고백해 나가면서 문학관 또는 비평 및 비평가에 대한 생각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로 앞에 인용한 글을 보면 비평을 대하는 작가로서의 태도가 매우 침착하고도 자신에 넘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평활동 자체가 남의 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 쉬운 어떤 선입견을 일체 배제해 버린 백지의 상태에서 작품 분석을 시작해 나가듯이 작가들 역시 자기 작품을 판단함에 있어서 남의 판단을 지나치게 믿을 필요는 없다. 모든 개인들의 주장은 다만 하나의 참고자료로서 받아들이고, 특히 자신을 호평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를 부정해 보는 노력이 작가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호평은 하였다 하더라도 결코 우쭐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어떤 혹평르 하였대도 아무런 타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하는 이 작가의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도 자신이 있는 훌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대개의 작가나 시인들이 비평에 대해서 이토록 담담하고 침착할 만큼 초연하고 무관심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개 드러내고 있듯이 이 작가 역시 다음 페이지에서는 앞의 말과 다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섹스의 바겐세일로 치부하고 인기를 얻고 일약 무명의 설움에서 벗어나고’
따위의 그렇게 품위 없는 저속한 문장으로서 평론도 아니요 격려도 아니며 그렇다고 애교라고 받아지기도 어려운 인신공격에 가까운 폭언 같은 그 글이 그런 인상을 풍긴다는 것조차 모르고 낱말 하나하나가 지닌 미묘한 차이, 엄청난 효과 같은 것도 생각할 줄 모른 채 버젓이 내놓을 수 있는 아직 어리달까 젊달까 하는 소위 평론가라는 그런 사람에겐 문학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일러주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러한 글은 우리가 대학에서 듣던 Y 교수의 말씀대로 무명에서 유명으로 올라서려면 오른손엔 펜을 왼손엔 몽둥이를 쥐고, 한손으로는 쓰며 한손으로는 기성인을 갈기며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에헴’에 해당되는 무명의 풋내기 평론가나 지망자나 할 일이지 양식과 품격을 갖춘 어엿한 기성 평론가들의 할 일이 아니라는 충고를 해두는 바이다.
이 글을 보면 “누가 어떤 혹평을 하였대도 아무런 타격으로 생각지 않는다.”하는 담담하고 침착하고 초연하고 더 나아가서 무관심하기까지 할 수 있는 그런 자신 있는 자세는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타격으로도 생각지 않는다.”하는 주장은 이 작가가 장차 지향해 나가고 싶은 작가적 수양의 목표이고 그 다음 페이지에서 “아직 어리달까 젊달까” “무명의 풋내기 평론가 지망자” 등의 낱말로 엮어진 글은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의 자신을 고백한 글이다.
더구나 비평가에 대한 작가의 감정적 인간관계라는 것이 공적이기보다는 사적인 이해관계와 주로 관련이 된 것인 이상 구체적인 내용들은 항상 독자가 모르는 이면세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전병순씨의 이 글이 발표되기까지 이 잡지의 편집자들은 무척 곤경에 빠져서 괴로웠다는 사실을 그들은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첫째는 이 필자의 글에 대한 항의문을 게재해 달라고 주장한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이 작가가 필자에게 가하기 시작한 감정적 비난은 도저히 활자화시킬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 그러나 이 작가가 이 잡지에 연재소설, 산문 심사 등의 인연을 맺어 온 사람이라는 특별한 인연도 무시할 수 없거니와 그 흥분의 정도로 보아 그냥 물러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사실 수차에 걸쳐 설득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집책임자로서도 이 문제를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편집 책임자는 1960년대를 총결산하는 특집원고 중에서 필자의 원고만은 70년 정월 호에 단독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여류 사회의 건전한 발전상을 일반적으로 다룬 딴 원고들에 비해서 이 글은 여류 문단의 비정상적 성장을, 그 내막을, 치부를 주로 분석 폭로했으며, 특히 그 비판의 대상은 한국 여류문단에서 대중적 인기도가 높은 소설가들이므로 딴 원고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래서 필자는 편집장에게 이 원고가 혹시 물의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면 게재하지 말고 원고를 반환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편집장은 그 원고의 내용으로 보아서 일부 작가들에게는 불만을 주더라도 여류 문단 전체와 또 근래의 많은 여성들에게 각성을 시켜 주기 위해서는 발표해야겠다고 했다.
발표 전에 이미 이 같은 논의가 있었으므로 편집자로서는 작가가 일으킨 개인적 감정을 간단히 발표해서 선의의 비평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자신의 성장과정을 회고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는 형태의 ‘조용한 반론’을 쓰도록 권유한 것인데 결말 부분에 가서는 기어코 ‘조용하지 않은 반론’을 쓰고야 말았다.
이것이 곧 비평을 대하는 작가들의 일반적인 반응 형태다. 더구나 이 당시의 항의사태는 이 같은 한 작가의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많은 여류 작가들을 규합하여 ‘김우종의 영원한 매장’을 목표로 하는 집단적 항의 공동전선을 펴려 했으나 대개들은 그 같은 방법에 동의하지 않고 개별적인 방법으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 독자의 입장과 작가 개인의 입장
그런데 비평가에 대한 소설가나 시인들의 거부의식은 비평가 자신들의 사실상의 과오에도 기인하는 수가 많다.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이 잘못되고 그 평가가 객관성을 잃었을 때 그 작가가 감정적 반발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 이 같은 과오는 대부분의 작자와 대부분의 비평가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반론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비평가와 작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인간관계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문제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라도 비평의 대상이 될 때는 모든 기존적인 세평(世評)의 옷을 벗겨 버리고, 모든 기존적인 권위를 거부해 버린 백지상태에서 다룬다는 점, 이 같은 원천적 기본 양식이 유발하는 감정과 아울러 일단 분석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는 작자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키는 혹평도 나온다는 것, 그것이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타당한 객관성을 지닌 경우에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원인이 작자와 비평가와의 인간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대표적인 문제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같은 감정관계는 한 비평가와 한 작자와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로서는 비록 타당한 이유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 개인의 문제를 떠난 작품활동의 본질적 의의에서 본다면 그 같은 감정은 결코 떳떳한 명분이 서지 않는 것이다. 비평이나 소설이나 시가 다 같이 개인의 사적인 명예 및 출세를 위한 수단이기보다는 다수 독자라는 사회 일반을 위한 문화활동인 이상 작가의 개인적 감정은 다만 개인적 감정으로 끝나고 말아야 한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면이 작가 자신들보다는 바르게 이해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감정적 문제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객관적 태도로 비평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비평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 <현대문학>지가 조사한 설문식 통계에 의하면 그 독자들은 비평을 딴 분야보다 더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설문에 대답한 사람들이 대개는 <현대문학>지의 고정독자라는데 있다. 순문예지인 <현대문학>의 고정독자는 일반 대중독자와는 다른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각 학교 교사를 비롯한 고급지식층 및 그 같은 계층을 지향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번 조사의 응답자들도 대개는 각급 학교의 교사들이었다.
그런데 비록 이 같은 특수성이 있더라도 이것은 문학 각 분야에 대한 독자의 관심도를 측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에 속한다. 비평의 독서는 딴 분야에 비해서 훨씬 힘이 드는 분야이며 또 그것은 소설처럼 흥미로운 상상의 세계도 적고 시처럼 매혹적인 메타포의 표현 양식도 거의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비평에 대한 독자의 관심도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현대문학>지의 집계가 특수 독자만을 상대로 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사실상 독자 전체의 비율을 따져 본다면 소설이 가장 많고 그 다음에는 시 또는 비평일 것이라고 추정해 보자. 그러나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도를 수로만 따지는 것도 잘못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이 결코 대중적 인기도, 그 독자수에 의해서 정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상식에 속한다. 그러므로 좀더 고급한 독자의 좀더 진지한 관심도라는 면에서 본다면 비평이 문학 전체적인 분야에서 지니는 비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독자와 비평가와의 인간관계에서 본다면 그것도 비평가 나름이고 독자 나름이겠지만 독자들 대개는 소설가나 시인들이 대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의 자세로 비평가를 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작품을 바르게 또는 값있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비평으로부터 매우 귀중한 예비지식을 얻게 된다. 비평가는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짧은 단평(短評)만을 일삼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통해서 비평가 자신의 또 하나의 인격을 그 속에 투영시켜 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또 그들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므로 한편의 비평이 비록 독자가 읽으려는 어느 구체적 작품을 실제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독자에게 딴 모든 작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 준다.
둘째로, 이 같은 비평은 독자로 하여금 많은 작품들 속에서 사이비 걸작을 가려내고 좋은 작품만을 선택할 총명한 지혜를 길러 준다.
셋째로, 비평은 독자로 하여금 무능하고 비양심적인 작가와 유능하고도 양심적인 작가가 누구인지를 가려내고 어느 쪽을 성원해야 되는지를 판단하는 주체적 능력을 갖게 해준다.
이런 것이 비평이 독자에게 주는 도움인 이상 그들은 비평가에 대하여 개인적 반발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비평이 이렇게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처럼 독자에게 이로운 것을 작가나 시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문학에선 독자가 주인이요 작가들의 사적인 명예나 출세문제는 그 다음에 따라야 될 문제다. 자기가 써서 자기 혼자 비밀히 간직할 문서가 아니요 일반에게 공개하고 그들에게 읽혀서 그들의 생활에, 더구나 깊숙한 영혼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상 그것은 개인적 이익을 위한 활동이기보다 먼저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올바른 모랄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화활동에서 독자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상반될 때 개인의 이익을 먼저 취하고 공익을 배반하는 감정적 표현은 삼가는 것이 건전한 모랄일 것이다.
4. 창작 속의 비평의식
1. 허구와 비특정 인물
그런데 비평이라는 것이 소설이나 시인들에게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문학형태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비평가들의 비평에만 국한된 것이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평은 작품론 작가론만이 아니라 더욱 넓게 다양한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작가나 시인들에게 감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작품론이나 작가론이다. 여기서 비평은 그 작품을 완벽한 것으로 다루고, 그 작가의 인격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문학관의 차이에 의해서도 거부적인 비판이 나타나고, 작품 자체의 기본적 미스테이크에 의해서도 거부적인 비판이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비평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작업은 비평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도 역시 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무엇이 그 같은 작업의 대상이 되느냐 만이 다를 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학비평은 문학작품 자체를 우선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우리의 현실적인 개인 및 그 집단으로서의 인간에 결부시켜 ‘작품과 현실’을 동시에 비평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 이에 비해서 시와 소설은 ‘작품’을 빼버린 ‘현실’만을 대상으로 삼고 그 속에 개인 및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비평해 나간다는 것, 이 같은 점에서 양자는 다만 대상만을 달리하고 있을 뿐 비평을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학을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 또는 인간의 탐구라고도 한다. 그런데 반영이든 탐구이든 생각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시인과 작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 운명을, 그 속의 인생을 그대로 맡겨진 채로 감수하지는 않았다. 체념은 있을지 모르지만 무조건적인 긍정이란 있을 수 없다. 맡겨진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나 시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엉터리가 아닌 이상은 일단은 생각하고 비판해 본 뒤에 받아들인다. 자유주의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회체제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체제와의 비교를 통한 비판으로서 그것을 긍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적을 옮길 수 없어서 체념적으로 그 사회에 순응한다는 것이 생각하는 작가의 당연한 삶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품세계가 현실을 반영하고 또는 인간을 탐구하는 내용이다 하는 것은 그 같은 대상에 대하여 어떤 비평을 가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이나 시인이나 문학비평가나 다 같이 비평작업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같은 비평작업은 어느 쪽이나 다 같이 우리 인간들 자신의 보다 귀한 삶을 위한, 보다 값있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적 공리성을 띠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한 시인이 그의 작품 속에서 간악한 무리들로 말미암아 병들어 버린 이 세상을 슬퍼한다면 그것은 그 같은 무리가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될 것이며, 그 같은 갈망은 그 시인 개인의 갈망만이 아니라 그 사회 공동의 갈망이 되고,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는 곧 독자의 인격형성에 작용할 것이요, 그 인격들이 곧 이 사회, 이 역사를 운영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비평이나 기타 창작활동이나 다 같이 사회적 공리성을 띠게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같은 공통성이 있으면서도 소설가나 시인들이 비평가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감정의 반발을 자초하는 예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세계에선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구체적인 특정인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일 때는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특정인을 실명(實名)으로 등장시키지는 않는다. 실명 기재는 우선 개인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또 서설은 사실의 재생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허구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개인을 사실대로 옮긴다는 것은 비록 가능한 일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작업은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이상 허구일 수밖에 없고 허구인 이상 거기서 실명 기재를 함은 그 개인에 대한 거짓을 쓰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이 같은 작품세계는 그 형태 자체가 본질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개인의 반발을 유발할 아무 이유도 없다.
2. 소설 속의 특정 인물
그런데 작가나 시인들 역시 때때로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손상시키고 물의를 일으키는 특수한 예가 있다. 즉, 작자의 주변에 있는, 작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그 주변의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그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소설은 그 같은 예에 속한다. 더구나 김동인의 경우처럼 자기와 동향이며 <창조>의 동인이며, 필명이 김탄실(金彈實)이었던 여류 작가를 모델로 하고 그 이름마저 ‘김연실’이라고 아주 유사하게 했을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김동인은 여기서 작품명마저 <김연실전(金姸實傳)>으로 하고 그녀에 대한 온갖 야유를 퍼부었으며 또 당시의 딴 사람들도 그녀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폭로하고 비난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결국 신문학 최초의 여류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김탄실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와 달리 전영택은 <김탄실과 그의 아들>이란 소설로서 아주 실명소설을 썼었지만, 김동인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함께 동향이요 <창조>지 동인이었던 그는 김동인과 전연 다른 입장에서 김탄실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나왔을 때에는 이미 김탄실이 동경에서 시 당국에 의하여 정신병자수용소로 끌려가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 그녀가 전설적 인물로 남게 된 때였다.
이 두 가지의 소설을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어떤 특정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비평가들이 서로 상반되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가 된다. 이런 경우에 후자의 소설은 비록 그 주인공이 생존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감정적 반발을 일으킬 하등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그와 반대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데 반해서 전자의 소설은 사실 그대로 선의의 인간을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해 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 같은 정신적 고문에 의한 죽음은 육체적 고문에 의한 죽음보다 몇 곱절 가혹한 것이니까,
3. 시 속의 특정 인물, 특정 사회
또 이와 같은 것은 시에도 나타난다. 시에는 일반적으로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서사시적인 형태는 소설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이나 <비어(蜚語)>는 비록 실명 기재는 아니지만 그것은 특정 이름을 지니고 생존해 있는 국가원수와 그 밖의 몇 특정 인물을 모델로 등장시킨 것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설정된 무대와 표현상의 특정 용어와 풍속 등이 어느 특정 사회 특정 국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실명 기재냐 아니냐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시가 그 특정인의 찬양이라면 모르되 비판이며 야유인 이상 특정인들의 감정적 반발을 유발할 충분한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소설이나 시가 어떤 특정적인 개인을 모델로 하기보다 어떤 특정 정권이나 특정 학교나 특정 사회단체 같은 집단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 때에도 같은 감정적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들은 작가들 일반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김동인이나 김지하 같은 경우는 특수한 예에 속한다. 그리고 신문윤리위원회의 규정에 의한 문제들이 종종 발생해 왔지만 그것은 대개 법이나 규정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되어 왔으며, 또 조속하고 원만한 해결이 없는 경우라도 그것은 소수의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문제는 한국의 문단 인구비율로 보아서 특히 비평가들에게 더 많이 활동상의 문제를 일으켜 온 것이다.
하여간 이런 면에서도 소설가나 시인들이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비평정신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로 인한 어떤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직접적 반발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창작활동의 자유를 함부로 방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또 문인들이 그만큼 자기 권리를 자기 스스로 지킬 역량을 쌓아 온 까닭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특정 집단의 고유명칭이나 개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5. 비평이란 ‘반항’의 의미
이렇게 본다면 비평만이 유독 많은 반발을 일으키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나쁜 관용어를 빌린다면 비평은 이 ‘사회의 문제아이며 문단의 문제아’가 된다. 그러나 ‘문제아’가 아닌 비평가는 비평가가 아니다. 비평가는 현실에 그대로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반항적 기질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타고난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 반항은 결코 이유 없는 반항은 아니다. 비평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논리적이고 실증적이다. 비평은 항상 사실을 사실대로 증언한다. 더구나 시와 소설처럼 상징적인 암시의 행태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상징적인 암시의 형태는 때때로 자기 사상의 빈곤과 혼돈을 그 연막 속에 은폐해 버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문제에 대한 결정론적 주장보다는 문제 자체의 제공만으로 끝나기도 하는 것이 가장 예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작가들의 작품에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이와 반대로 비평은 대개가 직접적 설명이고 증언이고 강한 주장이다.
이런 방법으로 분석하고 증거를 찾고 과학적 논리를 전개하여 문제를 끌어내는 이상 비평가의 반항은 너무나 이유가 분명한 반항이다. 그것은 자로 보다 나은 문학을,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는 반항이다. 또 작품 비평을 작품 자체만의 독립된 문화로 보기보다는 현실사회 속에 작품,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에 투영된 작품으로 파악하는 이상 여기서 주장되는 반항은 보다 나은 사회, 보다 이상적인 인간의 생존 양식을 추구하는 반항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문학비평은 비록 이 사회 모든 분야의 비평 중 그 일부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이 같은 비평이 없는 곳에서는 역사의 시간이 발을 멈추고 그 역사의 물은 흐르지 않아 썩은 웅덩이를 이루며, 인간은 더 발전할 미래의 시간에 영원히 한 걸음도 접근해 가지 못할 것이다.
인류문명의 현상유지는 적어도 값있는 것을 보존하고 무가치한 것을 제거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가치한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버리는 그레샴법칙이 작용해서 인류문명은 망하고 만다. 그것이 밝혀져야만 인류는 ‘현상유지’라는 정적(靜的)인 의식구조를 ‘현상으로부터의 발전“이란 동적(動的)인 의식구조로 바꾸고 움직이게 된다. 시계 태엽을 틀어 주고, 천년을 살아온 초가를 기와집으로 고치고, 평면으로만 뻗어가던 2차원적인 생활구조를 하늘로 올라가는 3차원적인 생활구조로 바꿔 나가게 된다.
이 같은 미래지향적인, 동적인 의식구조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바로 비평이다. 그것은 비평이란 작업 자체가 무가치를 제거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 사회에 전달하고,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달한다는 것은 기존 문화의 현상유지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딴 말로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주장하는 ‘전통의 발견이요 그 본존’이다. 가치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문화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언젠가는 연멸되기 쉽다. 백제 문화의 유적이라는 돌을 깨다가 구들장이나 기타 석재로 소비한 것은 그러한 예에 속한다.
비평이 가치 있는 것의 발견인 이상 이 같은 비평활동이 곧 좋은 문학작품을 찾아내고 문학 속의 전통을 확립해 나가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이 같은 비평은 항상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반항적인 동적인 의식구조 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활동이 작가나 시인들에게는 개인적인 감정적 반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같은 사적인 감정을, 더구나 공익을 배반하는 사적 감정을 활자화하기까지 한다. 무명의 작가들만이 아니라 세계적 정상에 오른 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적지 않은 소설가나 시인들이 그들의 작품에 반영된 인격과는 관계없이 또 얼마나 이기적이요 타산적이며 속이 비좁은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또 자기 작품 속에 반영된 인격과 상반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작품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곧 그 작가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가 자기를 배반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그런 감정적 반발에 의한 중상과 인신공격을 문단의 이면에서 구전문학처럼 입으로 전하거나 또는 메스콤의 힘을 빌어 활자화하는 것까지는 비평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끼치지는 않는다. 독자에게는 영향이 있겠지만 비평가는 자기 역량에 의해서 계속하여 자기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잡지사나 신문사 문화부에는 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그곳에서 편집을 맡고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고를 실을 수도 있고 영원히 거부할 수도 있다. 작가나 시인들의 이기적인 개인 감정표현이 그 사회의 비평활동과 문화발전에 얼마나 큰 지장을 초래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이 같은 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날 것이다.
김우종 (1975. 9. <예술원 논문집> 제1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