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신수(神秀)스님과 더불어 홍인스님 문하의 2대 선사로서, 후세에 신수의 계통을 받은 선을 북종선(北宗禪), 혜능의 계통을 받은 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했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했다.
혜능스님의 선법은 자성(自性)의 발견으로 일관된다. 스님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 전편에 흐르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자기 본성을 깨치라는 것이다. 이때 말하는 자기 본성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 갖추고 있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이 현실에 있는 존재자 각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부처나 중생 모두가 개체적 실존, 즉 주체의 다른 경계이지 결코 또 하나의 다른 주체가 있어, 우리가 그것을 부처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번뇌와 해탈은 동일한 주체(主體)의 다른 활동이며 결코 이 번뇌의 주인공을 떠나 따로 보리(菩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스님이 말하는 바의 깨달음(見性)은, ‘인간의 자성(自性)’을 유일한 근거로 해, 불성(佛性)인 자성을 몰록 발견(頓悟見性)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 스님이 표방하는 바의 깨달음(見性)은, 오랫동안의 좌선간심(坐禪看心) 끝에 청정한 자성(自性)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말 끝에 문득 깨달아[言下便悟] 자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은 일상 속에서 만법(萬法)을 념(念)하되 그 념(念)에 미혹되지 않고 항상 청정한 자성(自性)을 유지하며 자재해탈(自在解脫)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증오론(證悟論)은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통하여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어가 무념행(無念行)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념행이란 무엇인가? 스님은 설파한다. “우리의 법문은 먼저 무념을 세워서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는다. 무상이란 상에 있어서 상을 떠남이다. 무념이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음이다. 무주는 생각 생각 가운데 전경(前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때 무주란 세간의 모든 일은 전부 다 실체가 없는 공(空)이므로 거짓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의 모양으로서 상이라는 것은, 모두 생멸변화하는 가(假)이어서 진실한 것이 아니므로, 상에 사로잡혀서는 안되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념은 모든 대상에 있어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은 마음에 본래 두 상이 없고 청정 그 자체이어서, 떠나야할 망념 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경〉에 의하면 선정수행과 깨달음의 지혜, 즉 정혜(定慧)는 불이일원(不二一元)의 체용(體用) 관계로서 그 선후가 있지 않다. 스님은 설파한다.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미혹하게도 정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혜는 일체로써 둘이 아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작의(作意)하여 정에 든 다음에 혜가 발(發)한다거나[先定發慧] 혜가 먼저 있고서 정을 발한다거나[先慧發定]하여 정혜가 서로 다르다고 하지 말라.”
스님에 의하면 자성의 정혜는 불이(不二)로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과 깨달음은 선후가 없기 때문에 정혜불이(定慧不二)이며 오수동시(悟修同時)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달마스님을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선이라는 새로운 선문(禪門)을 처음으로 열어제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조(開祖)는 혜능스님이다. 그것은 실천형태의 측면에서는 점수(漸修)에서 돈오(頓悟)에로의 변화를 의미하고, 심성관(心性觀)과 수증관(修證觀)의 측면에서는 사망귀진(捨妄歸眞)과 수인증과(修因證果)에서 일체개진(一切皆眞)과 정혜불이(定慧不二)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혜능스님이 새롭게 연 이러한 선법은 이후 중국을 위시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전파된 선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며, 특히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으로 계승된다. 따라서 혜능의 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중국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된다.